2019년 4월에 아시아N에서 재방송해준 구주해상목운기를 3주간 75부작을 모두보았다.

시즌 1 -  8부작 - 폭풍의 예언

시즌 2 - 30부작 - 천하의 주인

시즌 3 - 37부작 - 천쟁의 서막

다 보았으나 아직은 드라마가 종료된 것 같지는 않다.

아직 시즌4에 대한 소식은 없다. 그러나 기다려진다. 그래서 75부작을 본 감동을 조금만 기록해 놓고자 한다.

 반혜와 목운생의 모습

사람은 누구나 욕망이 있다. 그러나 자리는 한정되어 있고 오르고자 하는 사람들은 많고, 이것을 과학에서는 적자생존이라한다. 인간세계도 마찬가지다. 적자생존의 투쟁을 그린 것이다.

소어응과 목여한강

소어웅과 목여한강의 사랑은 너무 깊은 사랑이며, 서로를 기다리는 아름다운 사랑이다.

소어응의 모습
목운생의 어머니 은용(황후)과 아버지 목운근(황제)

두 사람의 사랑은 일편단심이다.

 

긴긴 드라마 내용중에서 위 3 커플이 기억에 남는다.

많은 주인공들의 노력으로 시즌 3까지 왔는데 시즌4가 언제나 나오려나 기다려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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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잃어버린 역사를 찾는 테마 - 실증환국사 1,2 - 실증배달국사1

[중동 화약고] 또 하나의 중동 뇌관 '골란고원' 이를 건드린 트럼프


정치인은 표를 먹고 산다.

표를 위해서는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당장을 생각한다.

트럼프는 유대인의 표를 얻기 위하여 당장에 그들이 좋아할 테마를 선정했다.

[사진 001]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모습


트럼프 대통령은 2019.03.22일 이스라엘이 주장하고 있는 골란고원의 주권을

인정하는 발언을 했다. 즉 골란고원은 시리아로부터 빼앗아서 점령하고 있는

땅이지만, '이제는 이스라엘 땅이다.'라고 인정한 것이다.


그럼 골란고원은 어떤 땅인지 알아보자.

골란 고원은 1967년 3차 중동전쟁 당시 이스라엘이 시리아로부터 골란 고원을 점령한 이후 중동 분쟁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잃어버린 땅을 되찾겠다는 시리아와 실효 지배를 강화하려는 이스라엘은 52년째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림 002]흰색 부분이 바로 골란 고원이다. 이스라엘과 시리아의 접경이고 이곳을 통과하면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이 활짝 열리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이다.



이스라엘 북부, 시리아 남서쪽 끝 해발 1000m에 위치한 바위투성이 고지대이다. 이 고원을 두고 이스라엘과 시리아가 수십년간 갈등을 빚고 있는 건 군사적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골란은 이스라엘·시리아외 요르단, 레바논과도 맞닿아 잇다. 고원에 오르면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까지 한 눈에 보인다. 또 레바논쪽 베카계곡은 대이스라엘 무장투쟁을 이어가는 강경 시아파 헤즈볼라의 거점이다. 골란고원을 차지하는 쪽은 상대의 움직임을 손쉽게 간파하는 전략적 잇점을 가진다.

여기에 토지가 비옥해 포도를 재배하기 좋고, 물의 원천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경제적으로도 중요한 지역이다.

골란 고원에는 약 4만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이들은 1967년 중동전쟁 이전부터 거주해 온 주민이거나 그들의 후손으로, 대다수는 드루즈파(이슬람 시아파의 한 분파)로 알려져 있다. 나머지 절반은 이스라엘이 영토를 점령한 후 이주해 온 유대인 정착민들이다.



[그림 003]갈릴리호에서 바라본 골란 고원의 모습


문화와 문명이 충돌하는 것은 그들이 믿는 신이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유대교와 이슬람은 골란고원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는 상황이다.

시리아의 땅을 이슬라엘의 땅으로 인정하면

결국에는 분쟁과 심해지면 전쟁의 불씨가 된다.

그것도 강대국이 관여하는 대 전쟁이 될 수 있다.

지구의 화약고는 중동과 한반도이다.


과연 3차 세계의 불씨는 어디에서 폭발하게 될 것인가?


[그림 004] 전운이 드리운 골라고원에서의  훈련 모습


인류의 마지막 3차 대전으로 인류는 폭망하고 인구의 99%가

전멸하는 참화를 격고나서 새로운 시대가 열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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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편 30장 ]
요순에 얽힌 역사의 진실

1 세상에서 우순(虞舜)을 대효(大孝)라 일러 오나 순은 천하의 대불효니라.

2 그 부친 고수의 악명이 반만년 동안이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하였으니 어찌 한스럽지 않으리오.

3 세상에서 요순지치(堯舜之治)를 일러 왔으나 9년 홍수는 곧 창생의 눈물로 일어났나니

4 요(堯)는 천하를 무력으로 쳐서 얻었고, 형벌(刑罰)은 순(舜)으로부터 나왔느니라.

이는 순의 부친이 순을 죽이려 하였다는 것과
부친이 봉사였다는 기록으로
부모가 나쁜사람으로 인식되도록 했으니
천하의 불효이며
오죽 부모의 말을 따르지 않았으면
죽이려 하였을까!
순임금이 효자라 일러오나 이는
역사 인식이 잘못된것이다.

2019.3.22일 아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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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순임금

강태공

History(역사) 2019.03.06 21:13
태공망 여상(강태공)의 생애와 심법연구   
 
십년 경영으로 3600 개의 낚시를 벌리다 (10년동안 3600개의 빈 낚시를 벌리다)

 강태공 -  태공망 여상은 지금으로 부터 3000 여년 전인 서기전 12세기경 사람이다.
 

성은 강(姜), 이름은 상(尙)이며 자(字)는 자아(子牙)로  염제신농씨의 후손이다.  
그의 선조는 일찍이 사악(四嶽 : 四方제후의 장관)이 되어 우임금을 보좌했으며 치수사업에도
큰 공을 세운 바 있었다.    우임금(중국 하은주 시대-하나라,은나라,주나라,  하나라의 창업자 시조)

그후 그의 선조가 여(呂) 나라에 봉하여졌으므로 본성은 강씨이지만 봉지 명을 따라
성씨를 삼기 때문에 여상(呂尙)이라고도 불렀다.
 
여상은 가난 속에서 곤궁하게 살며 언제나 책을 가까이 하며 학문에 열중했는데
집안 살림은 부인 마씨가 맡아 뒷바라지를 했다.  
하루는 마씨 부인이 들에 일을 나가면서 비가 오면 마당에 말려놓은 갱피를 거두어 놓으라고
당부를 하고 나갔다.  
그후 많은 비가 내렸는데 마씨 부인이 집에 돌아와 보니 마당에 늘어놓은 갱피가 빗물에
다 떠내려가고 없었다. 
 
그런데 여상은 비가 오는 것도 모르고 책만 읽고 있었다.  

마씨 부인은 더 이상 가난한 살림을 참지 못하고 집을 나가 재가를 해버렸다. 
이후에도 여상은 여전히 책을 읽거나 위수에서 낚시를 하며 사색하곤 했다. 
 
은, 주나라의 시대상

 

이 무렵은 은나라가 쇠퇴하고 주나라가 일어서기 전의 시대로
그 전후 시대상을 대략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은나라의 조상인 ‘설’ 과 주나라의 조상인 ‘후직’ 은 모두 순임금 시대의 인물로
사도(司徒)와 농사(農師) 벼슬을 맡았는데 후에 상(商)과 태(邰)에 봉해졌다.
 

 은나라는 설의 14 대손 탕에 와서 하의 걸(桀)을 멸하고 상(商)나라를 건국했다.  
이후 18 대 반경(盤庚)에 가서 도읍을 은(殷)지역으로 옮기면서 은(殷)나라로 불렸다.
 
주나라는 후직으로 부터 태에 살다가 4세 공유(公劉)에 이르러 ‘빈’으로 천도하였고
13세 고공단보에 이르러 기산(岐山)아래 주원(周原)으로 도읍지를 옮겼다.
 

 이때 비로소 나라이름을  주(周)라 부르게 되었다.    고공단보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 셋째 계력이 아들 창(昌)을 낳았는데 성덕이 있어 계력과 창에게 지위를 물려주게 되었다.

창은 서백(西伯)이라고도 불렸으며,  후일, 주나라를 연 문왕(文王)이다.
 
이 당시는 은나라의 마지막 왕 주(紂)가 통치하고 있었는데 주왕(紂王)은 애첩 달기에 빠져
호화궁전인 녹대를 짓고 주지육림(酒池肉林,술로 채운 연못과 고기안주를 매단 나무숲)을 만들어
향락과 사치를 일삼았고 충언하는 신하들을 포락지형으로 처형하였다.

이후 민심은 떠나고 백성은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炮烙之形,포락지형은 은나라 마지막 임금인 주왕이 기름을 바른 구리 기둥을 숯불 위에 걸쳐 달군 후,
죄인으로 하여금 그 위를 맨발로 걸어가게 하여 발이 미끄러져 불속으로 떨어지면 그대로 타죽게
하는 것으로, 이를 '포락지형'이라 불렀다.
 
기름을 발라 숯불 위에 걸쳐 놓은 구리기둥 위를 걷게 하는 포락지형(炮烙之刑)을 내려 미끄러져서
타 죽는 모습을 구경하면서 즐거워하였다. 특히 자신에게 충심으로 간언하였던 왕자 비간(比干)을 죽였다.
잠깐! - 
주왕산의 전설에 나오는 중국에서 도망왔다는 주왕은 이 주왕이 아니다, 주왕산 전설의 주왕은
신라왕족 김주원이라는 설과, 중국 당나라때 사람인 주도라는 설이 있는데 이 주도가 은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왕과 이름이 비슷하여, 청송지역 약수터 이름을 달기약수라 지은것이다.
사실 주도(주왕)와 달기는 전혀 관련이 없다. 은나라의 주왕과 달기는 3천년전 사람이고, 주도(주왕)는
1400년전쯤의 사람인것이다. 

 

 주왕과 달기는 충신들이 산 채로 불에 타죽는 모습을 보고 박장대소하며 즐거워했다고 한다.
특히 옳은 말을 하는 충간자(忠諫者)는 모두 이 형에 처했다고 한다. 약칭으로 '포락'이라고도 한다.  
 -사마천의 사기史記(殷本紀)-
 
- 한편 은나라의 제후국인 주나라의 서백 창은 덕을 쌓고 인망을 얻어서
    귀순하는 자가 많아져 날로 세력이 강해지자, 주왕(紂王)은 서백 창을 유리에 감금시켰다.
 

  이어 서백 창의 큰아들 백읍고를 죽여서 포를 뜬 다음 고깃국을 끊여서 서백 창에게 갖다 주며
“ 세상에서 서백 창을 소위 성인이라 하는데 그가 이 국을 먹으면 제 자식의 살점을 먹는 것이니
성인도 아니요, 먹지 않으면 성인이므로 죽이라.” 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간계를 알아챈, 서백 창은 눈물을 머금고 국을 먹는 시늉
 (살아남기 위해 진짜로 먹었다고도 함)을 했다.

한편 서백 창의 신하인 산의생, 굉요 등이 서백 창을 구해내기 위해주왕에게
낙서의 땅과 미녀와 명마를 뇌물로 바쳤다. 주왕은 크게 기뻐하며 서백 창을 석방하고
궁시(弓矢)와 부월(斧鉞)을 하사하며 천자인 주왕을 대신하여 서쪽 제후들을 다스리게 했다.

 

 서백 창(주나라를 연  문왕), 태공망을 얻다
 

하루는 서백 창이 사냥을 나가려 귀갑(거북등껍질)으로 점을 쳐보니 사관(史官) 편(編)이
‘ 얻는 것은 용도 아니요 이무기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니며 큰곰도 아닌, 사냥에서 얻는 것은 인재다.
’ 라는  점괘를 얻었다.

 

 서백 창은 3일 밤낮을 목욕재계하고 삼가다가 위수(渭水) 상류로 사냥을 나가 위수 번계(磻溪)에서
곧은 낚시를 하고 있는 여상을 만나게 된다.

    여기서 서백 창과 여상은 인재등용의 원리,  인심을 얻어 천하를 얻고 천하를 경륜하는 방법 등에 대해  
문답을 하였다.

여상의 말을 다 듣고 난 서백 창은 경의를 표하며 절하고 나서 
“ 우리 조상 태공 때 부터 머지 않아 큰 성인이 나타나 우리 주(周)족을 크게 부흥시킬 것이라는
예언이 있었는데 당신이 바로 그분이요.  우리 태공께서 기다린 지 오래였소.” 하였다.
 

그 후 여상을 태공망(太公望, 태공이 기다리던 사람?) 혹은 태공으로 부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서백 창은 태공을 자기 수레에 태워 함께 돌아가서 스승으로 모시었다.

 
 문왕과 무왕을 도와 주나라를 열다

 서백 창은 매일 아침 단명전에서 조회를 마친 뒤에는 신하들과 함께
치란흥망(治亂興亡,천하의 난리를 다스리고 망하고 흥하는 이치)의 요체에
관한 강태공의 강의를 들었다.
 
 강태공은 서백 창을 도와 성수(별자리)의 움직임을 살펴 절기와 일기에 따라
씨를 뿌리고 수확하는 법을 가르치고,  주나라를 크게 융성하게 했으며 특히 군사력을 강화시켰다.
    강태공은 덕과 계책으로 제후들을 결속시켜 천하의 3분의 2를 주(周)나라에 귀속시키게 했다. 
그러나 서백 창은 대업을 이루지 못하고 강태공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세상을 떠났다. 
 
 서백 창의 뒤를 이어 아들 발이 주나라의 무왕으로 즉위했다.
 
 무왕은 고공단보를 태왕(太王)으로 계력을 왕계(王季)라 추존하였으며, 
 서백 창을 문왕(文王)으로 추존하였다. 
 무왕 13년,  천자국인 은나라의 주왕(紂王)을 정벌하고자 맹진에서 포고문을 발표하고 목야에 진을 쳤다. 
은나라 백성들은 밥과 물을 가지고 나와 무왕의 군사들을 환영하였으며, 
 주왕의 군사들은 창을 거꾸로 잡고 무왕의 군대에게 길을 내주었다.
이렇게 해서 은나라는 멸망했다.
 
 무왕은 은나라 수도를 점령한 이튿날 아침
몸소 사단(社壇,제사를 지내는 단)에 나아가 상제(上帝)님께 제사(천제)를 드렸다.
 이어서 무왕은 공신들을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의 다섯 등급으로 작위를 나누어 영토를 분배하고 제후로 봉함으로써 비로소 봉건제도를 실시하였다.
 강태공도 천하통일의 대공로로  제(齊)나라 땅 백 리의 영토를 받고 제후로 봉해졌다.
 
마씨 부인을 서낭신으로 봉함
 제나라 왕으로 부임한 강태공은 처음에는 많은 이민족의 반항을 받기도 하였지만 정치를 개선하고
풍속을 존중하고 예의를 간략히 하는 등 다스리기에 노력하여 모두가 잘 동화되었다. 
 
 어느 날 강태공이 수레를 타고 시찰을 나갔다.
 어느 거리를 지나는데 옛날 자기를 버리고 재가한 마씨가 들에서 갱피(곡식의 일종)를 훑고 있었다. 
내내 아무 것도 없는 집에 재가하여 갱피를 훑으며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강태공은 수레를 멈추고 마씨를 불렀다.  마씨는 옛일을 후회하며 다시 자신을 받아주기를 간청했다. 
강태공은 물을 한동이 떠오라고 시킨후 마씨부인에게 땅에 쏟으라고 한후
 한번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수 없듯이 한번 끊어진 인연은 다시 맺을 수 없다며 재가해 살고있는 마씨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고 떠났다. 
 
 이후 마씨 부인은 가난하게 살다가 어느 고개 마루턱에서 죽었다.
그후 강태공은 그래도 옛날의 자기 신세를 갚기 위해 마씨 부인을 서낭신으로 만들어 주었는데, 
서낭신은 마을의 수호신으로 마을의 액운을 막고 잡귀를 막는 신이다.
   마씨 부인이 잡귀가 되어 죽어서도 몇십년 살다 없어질 운명을 강태공이 근 3천년이란 세월동안
향화(향불,제사)를 받도록 해서 지난날의 은공을 갚은것이다.  초기 성황당의 유래
  
귀신을 뜻대로 부리다
 
  " 강태공은 72후를 써서 귀신을 종처럼 부렸다"
강태공은 1년을 72후로 나눠 (1후는 5일) 동식물 또는 기타 자연현상 변화의 징후에 근거하여 절기의 변화를 설명하고 이름을 붙여 농사에 이용하였다.
    또한 강태공은 귀신도 마음대로 사역케 하는 신권을 갖추고 있었는데 중국설화 속에 많은 일화들이
 전해온다.
 [봉신연의]에 보면 은나라 주왕의 애첩 달기는 소후의 딸로 은주역 청당에 묵을 때
곤륜산의 천년 묵은 암 여우가 그녀의 혼백을 빼앗고 그녀의 몸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서
주왕의 비(妃)가 되어 온갖 악행을 일삼게 되자
곤륜산에서 40 년간 수행을 한 강태공이 도술로 여우를 물리치게 된다는 내용이 나온다. 
 또 정산에 좋은 진흙이 있는데 미꾸라지 정령의 방해로 수로를 이용하지 못하고 육로로 운송해야 했다. 이에 강태공이 신조(神釣)로 미꾸라지 정령을 잡아 수로를 내도록 하였다.  
그 증거로 조어대(釣魚臺)가 있다.
 
 “ 봉서사의 진묵(조선 중기 진묵대사)은 3둔(遁)을 하였고
주나라의 강태공은 52둔을 하였으나
나는 이제 72둔을 다 써서 화둔(火遁)을 트리라.”하신 내용이 있다.  봉서사(전라도 완주군 용진면소재)
 
『봉신연의』에 의하면 강태공이 토둔(土遁) 수둔(水遁) 목둔(木遁) 등을 행하여 몸을 감추어 이동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와 같이 강태공은 도술에 능통하여 귀신도 능히 뜻대로 부리는 신권이 있었다고 전한다.
 
- 중국소설은 무협소설처럼 워낙 뻥이 심하게 가미돼있는것이 특색이다. 
1%의 객관적인 사실을 서술하는데 99%의 과장과 뻥?으로 뻥튀기하니 사람들이 다 뻥이라고 하는것이다.
그래도 강태공이 귀신을 부리는 신권을 행사했다는것은 1%의 객관적사실이었을거라고 나는 믿는다-   
 
 

 신교의 맥을 중국 한족에 전수하다

 주나라를 건국하는데 지대한 공을 쌓았던 강태공은 강족(姜族)으로 정통 동이족 출신이다. 
강태공은 동방 조선족으로서 신교의 한 맥을 중국 한족에게 전수하게 되는데, 
그는 삼신상제님의 가르침을 받아내려서 나라를 세우고 국가를 통치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삶의 좌표로
삼았다.  그의 저서인 『육도삼략』의 중심에는 동방 신교(神敎)의 가르침이 그대로 녹아있다. 

사마천 『사기』의 「주본기」에 보면  “ 무왕이 주왕을 처단하고 이튿 날 아침 몸소 사단(社壇)에 나아가 
남쪽을 향하여 모숙정은 맑은 물을 받쳐들고
                     위강숙보는 자리를 깔았으며 … 
                     윤일은 축문을 읽어 주왕의 죄악을 상제께서 듣도록 명백히 아뢰었다” 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청수(淸水,맑은 물)를 모시고 상제께 고하는 부분은 동방 조선족 신교 문화의 원형이다.

또 『사기』「 봉선서」에 의하면 “ 조정의 동남쪽에 태일단(太一壇)을 설하고 천일신(天一神) 지일신(地一神) 태일신(太一神)을 모셨다.” 는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이 천지인(天地人) 삼재관을 바탕으로 천일신, 지일신, 태일신으로서 삼신(三神)을 숭배한

제천행사가 있었는데,  이것이 동방 한민족의 신교(神敎)의 신관이다.

 

 지금으로 부터 8백년전 고려 공민왕 때 행촌 이암은 천일은 조화(造化)의 신,
                                                                       지일은 교화(敎化)의 신,
                                                                       태일은 치화(治化)의 신으로 정의했다.
강태공은 산동성 제나라의 왕이 된 후 동방신교의 삼신관을 서방 중국 땅에 뿌리내렸다.

 

 이로부터 제나라에서 삼신상제님과 치우천황(한민족 배달국 임금)과 천지일월에 제사하는
 팔신제(八神祭)풍속이 더욱 널리 성행하게 되었다.
팔신제는 천지의 여덟 신을 섬기는 문화로,  삼신 상제님을 모시는 천주(天主), 지주(地主), 병주(兵主), 음주(陰主), 양주(陽主), 월주(月主), 일주(日主), 사시주(四時主) 등의 신을 모셨다.

 

사기』 , 『진역유기(震域留記)』에 의하면 진시황과 한나라 고조(유방)까지도 팔신제를 봉행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팔신제는 고대 중국문화 속에 살아있던 동방신교 제사문화의 원형이며 산 증거이다.
 
병법과 정치로 천하만세에 은혜를 베풀다


 강태공이 지은 병법서인 『육도(六韜)』는 다른 병서와 달리 치세(治世)의 대도(大道)로 부터
인간학 조직학을 논급하고 정전(政戰) 및 인륜을 논한 것이 특색이다.

또한 『삼략(三略)』은 감추어져 비전 되다가 진(秦)나라 시대의 황석공이
장량(한나라를 창업한 유방의 책사,장자방)에게 전수하여 세상에 드러났다.
 
 태공망의 육도가 역대 병법사상가들에게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후대의 손자병법의 손자(孫子), 오자(吳子,오자서), 위료자(尉?子), 이위공(李衛公) 등 중국의 제가(諸家) 병법사상도 『육도삼략』을 기간(基幹)으로 하고 있다.

    전국시대에 6국의 재상을 지낸 유명한 유세가인 소진은 태공망의 병법서를 접하고

비로소 군왕들을 설득하여 천하를 경륜할 도를 터득하게 되었다.
 
 “ 강태공이 제잔금폭(除殘禁暴, 잔악함을 제어하고 폭정을 금하는)의 묘략과 부국강병(富國强兵)의 술법을 전수함으로부터  천하가 그 덕으로 대업을 이루었으되 그 은덕을 보답지 않고

    다만 디딜방아에 동티막이로  ‘ 경신년 모월 모일 강태공 조작(姜太公造作)’ 이라 써 붙일 뿐이니
  어찌 도의(道義)에 합당하리오.”  하시며 “
  이제 해원(모든 원한을 풀어내는)시대를 당하여 모든 신명이 태공의 은혜를 보답하게 되리라.”
  

디딜방아에 동티막이 (예전에는 집집마다 디딜방아가 있었는데 동티막이라는것은 액막이, 즉 올 한해도 잡귀로부터 오는
모든 액(질병,사고)을 강태공의 힘을 빌어 막고자 디딜방아에 써 붙인 풍속)   
 

예로부터 잡신을 물리친다는 제살(除煞)의 한 풍속으로 디딜방아를 짓고 나면 흔히 방아몸체에, 
강태공이 태어났다고 하는 연월일시인 ‘경신년(庚申年) 경신월(庚申月) 경신일(庚申日) 경신시(庚申時) 강태공 조작(姜太公 造作)’ 이라고 쓴다.

 

  이를 ‘ 방아상량’이라고 하는데 디딜방아를 고치거나 새로 놓을 때는 반드시 경신일 경신시에 맞추어
방아 동티 (귀신을 노하게 하였을 때 받는 재앙의 하나)를 막고자 하였다. 
 
 이는 강태공을 내세워 잡귀가 덤벼들어 해를 끼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인데, 우주원리로 보면
금극목(金克木)의 상극(相克)원리로 강한 금기(金氣)를 지닌 경금(庚金)과 신금(申金)으로써
목기(木氣)에 의한 동티를 막으려는 것이었다. 
 
 강태공은 160살을 살다가 죽었다.  
80년은 초야에 묻혀서 가난하게 살았고, 80년은 세상에 뜻을 펼치며 영광스럽게 살았다.

그래서 강태공의 삶을 두고 ‘ 궁팔십(窮八十) 달팔십(達八十)’이라고 한다.

 

강태공이 죽자 그를 장사를 지내려 하는데 사체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여상은 시해선(尸解仙,육체를 가지고 신선으로 승천)이 되었다고 믿었다. 
또 일각에서는 『육도』라는 여섯 권의 병법서를 남기고 세상을 뜨자 영구(營丘)에
장사를 지냈다는 이야기도 있다.

 
천하사 심법
 강태공  

"강태공이 십년 경영으로 삼천육백 개의 낚시를 벌였음이 어찌 한갓 주(周)나라를 일으켜
봉작(封爵)을 얻기 위함이었으랴.  이를 널리 후세에 전하려 하였음이다” 

  

강태공이 80 평생을 가난 속에 살면서도 끊임없이 공부하고 마음을 닦으며 위수에서 10년 동안
삼천육백 개의 낚시를 벌려놓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바로 후세에 천하사를 하는 심법을
전수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 내 종자는 삼천년 전 부터 내가 뿌려놓았느니라.”

 


 <참고자료> 
 『육도삼략』이상옥 역해 명문당 /
『사기』 사마천 원저 김병총 평역 집문당 /
『봉신연의』 안능무 평역 솔출판사 /
『서경』 권덕주 역해 혜원출판사 /
『주대의 상제의식과 유학사상』 배옥영 지음 다른생각 /
 『디딜방아 연구』 김광언 저 지식산업사
태공망 여상(강태공)의 생애와 심법연구   
 
십년 경영으로 3600 개의 낚시를 벌리다 (10년동안 3600개의 빈 낚시를 벌리다)


 강태공 -  태공망 여상은 지금으로 부터 3000 여년 전인 서기전 12세기경 사람이다.
 

성은 강(姜), 이름은 상(尙)이며 자(字)는 자아(子牙)로  염제신농씨의 후손이다.  
그의 선조는 일찍이 사악(四嶽 : 四方제후의 장관)이 되어 우임금을 보좌했으며 치수사업에도
큰 공을 세운 바 있었다.    우임금(중국 하은주 시대-하나라,은나라,주나라,  하나라의 창업자 시조)

그후 그의 선조가 여(呂) 나라에 봉하여졌으므로 본성은 강씨이지만 봉지 명을 따라
성씨를 삼기 때문에 여상(呂尙)이라고도 불렀다.
 
여상은 가난 속에서 곤궁하게 살며 언제나 책을 가까이 하며 학문에 열중했는데
집안 살림은 부인 마씨가 맡아 뒷바라지를 했다.  
하루는 마씨 부인이 들에 일을 나가면서 비가 오면 마당에 말려놓은 갱피를 거두어 놓으라고
당부를 하고 나갔다.  
그후 많은 비가 내렸는데 마씨 부인이 집에 돌아와 보니 마당에 늘어놓은 갱피가 빗물에
다 떠내려가고 없었다. 
 
그런데 여상은 비가 오는 것도 모르고 책만 읽고 있었다.  

마씨 부인은 더 이상 가난한 살림을 참지 못하고 집을 나가 재가를 해버렸다. 
이후에도 여상은 여전히 책을 읽거나 위수에서 낚시를 하며 사색하곤 했다. 
 
은, 주나라의 시대상

 

이 무렵은 은나라가 쇠퇴하고 주나라가 일어서기 전의 시대로
그 전후 시대상을 대략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은나라의 조상인 ‘설’ 과 주나라의 조상인 ‘후직’ 은 모두 순임금 시대의 인물로
사도(司徒)와 농사(農師) 벼슬을 맡았는데 후에 상(商)과 태(邰)에 봉해졌다.
 

 은나라는 설의 14 대손 탕에 와서 하의 걸(桀)을 멸하고 상(商)나라를 건국했다.  
이후 18 대 반경(盤庚)에 가서 도읍을 은(殷)지역으로 옮기면서 은(殷)나라로 불렸다.
 
주나라는 후직으로 부터 태에 살다가 4세 공유(公劉)에 이르러 ‘빈’으로 천도하였고
13세 고공단보에 이르러 기산(岐山)아래 주원(周原)으로 도읍지를 옮겼다.
 

 이때 비로소 나라이름을  주(周)라 부르게 되었다.    고공단보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 셋째 계력이 아들 창(昌)을 낳았는데 성덕이 있어 계력과 창에게 지위를 물려주게 되었다.

창은 서백(西伯)이라고도 불렸으며,  후일, 주나라를 연 문왕(文王)이다.
 
이 당시는 은나라의 마지막 왕 주(紂)가 통치하고 있었는데 주왕(紂王)은 애첩 달기에 빠져
호화궁전인 녹대를 짓고 주지육림(酒池肉林,술로 채운 연못과 고기안주를 매단 나무숲)을 만들어
향락과 사치를 일삼았고 충언하는 신하들을 포락지형으로 처형하였다.

이후 민심은 떠나고 백성은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炮烙之形,포락지형은 은나라 마지막 임금인 주왕이 기름을 바른 구리 기둥을 숯불 위에 걸쳐 달군 후,
죄인으로 하여금 그 위를 맨발로 걸어가게 하여 발이 미끄러져 불속으로 떨어지면 그대로 타죽게
하는 것으로, 이를 '포락지형'이라 불렀다.
 
기름을 발라 숯불 위에 걸쳐 놓은 구리기둥 위를 걷게 하는 포락지형(炮烙之刑)을 내려 미끄러져서
타 죽는 모습을 구경하면서 즐거워하였다. 특히 자신에게 충심으로 간언하였던 왕자 비간(比干)을 죽였다.
잠깐! - 
주왕산의 전설에 나오는 중국에서 도망왔다는 주왕은 이 주왕이 아니다, 주왕산 전설의 주왕은
신라왕족 김주원이라는 설과, 중국 당나라때 사람인 주도라는 설이 있는데 이 주도가 은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왕과 이름이 비슷하여, 청송지역 약수터 이름을 달기약수라 지은것이다.
사실 주도(주왕)와 달기는 전혀 관련이 없다. 은나라의 주왕과 달기는 3천년전 사람이고, 주도(주왕)는
1400년전쯤의 사람인것이다. 

 

 주왕과 달기는 충신들이 산 채로 불에 타죽는 모습을 보고 박장대소하며 즐거워했다고 한다.
특히 옳은 말을 하는 충간자(忠諫者)는 모두 이 형에 처했다고 한다. 약칭으로 '포락'이라고도 한다.  
 -사마천의 사기史記(殷本紀)-
 
- 한편 은나라의 제후국인 주나라의 서백 창은 덕을 쌓고 인망을 얻어서
    귀순하는 자가 많아져 날로 세력이 강해지자, 주왕(紂王)은 서백 창을 유리에 감금시켰다.
 

  이어 서백 창의 큰아들 백읍고를 죽여서 포를 뜬 다음 고깃국을 끊여서 서백 창에게 갖다 주며
“ 세상에서 서백 창을 소위 성인이라 하는데 그가 이 국을 먹으면 제 자식의 살점을 먹는 것이니
성인도 아니요, 먹지 않으면 성인이므로 죽이라.” 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간계를 알아챈, 서백 창은 눈물을 머금고 국을 먹는 시늉
 (살아남기 위해 진짜로 먹었다고도 함)을 했다.

한편 서백 창의 신하인 산의생, 굉요 등이 서백 창을 구해내기 위해주왕에게
낙서의 땅과 미녀와 명마를 뇌물로 바쳤다. 주왕은 크게 기뻐하며 서백 창을 석방하고
궁시(弓矢)와 부월(斧鉞)을 하사하며 천자인 주왕을 대신하여 서쪽 제후들을 다스리게 했다.

 

 서백 창(주나라를 연  문왕), 태공망을 얻다
 

하루는 서백 창이 사냥을 나가려 귀갑(거북등껍질)으로 점을 쳐보니 사관(史官) 편(編)이
‘ 얻는 것은 용도 아니요 이무기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니며 큰곰도 아닌, 사냥에서 얻는 것은 인재다.
’ 라는  점괘를 얻었다.

 

 서백 창은 3일 밤낮을 목욕재계하고 삼가다가 위수(渭水) 상류로 사냥을 나가 위수 번계(磻溪)에서
곧은 낚시를 하고 있는 여상을 만나게 된다.

    여기서 서백 창과 여상은 인재등용의 원리,  인심을 얻어 천하를 얻고 천하를 경륜하는 방법 등에 대해  
문답을 하였다.

여상의 말을 다 듣고 난 서백 창은 경의를 표하며 절하고 나서 
“ 우리 조상 태공 때 부터 머지 않아 큰 성인이 나타나 우리 주(周)족을 크게 부흥시킬 것이라는
예언이 있었는데 당신이 바로 그분이요.  우리 태공께서 기다린 지 오래였소.” 하였다.
 

그 후 여상을 태공망(太公望, 태공이 기다리던 사람?) 혹은 태공으로 부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서백 창은 태공을 자기 수레에 태워 함께 돌아가서 스승으로 모시었다.

 
 문왕과 무왕을 도와 주나라를 열다

 서백 창은 매일 아침 단명전에서 조회를 마친 뒤에는 신하들과 함께
치란흥망(治亂興亡,천하의 난리를 다스리고 망하고 흥하는 이치)의 요체에
관한 강태공의 강의를 들었다.
 
 강태공은 서백 창을 도와 성수(별자리)의 움직임을 살펴 절기와 일기에 따라
씨를 뿌리고 수확하는 법을 가르치고,  주나라를 크게 융성하게 했으며 특히 군사력을 강화시켰다.
    강태공은 덕과 계책으로 제후들을 결속시켜 천하의 3분의 2를 주(周)나라에 귀속시키게 했다. 
그러나 서백 창은 대업을 이루지 못하고 강태공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세상을 떠났다. 
 
 서백 창의 뒤를 이어 아들 발이 주나라의 무왕으로 즉위했다.
 
 무왕은 고공단보를 태왕(太王)으로 계력을 왕계(王季)라 추존하였으며, 
 서백 창을 문왕(文王)으로 추존하였다. 
 무왕 13년,  천자국인 은나라의 주왕(紂王)을 정벌하고자 맹진에서 포고문을 발표하고 목야에 진을 쳤다. 
은나라 백성들은 밥과 물을 가지고 나와 무왕의 군사들을 환영하였으며, 
 주왕의 군사들은 창을 거꾸로 잡고 무왕의 군대에게 길을 내주었다.
이렇게 해서 은나라는 멸망했다.
 
 무왕은 은나라 수도를 점령한 이튿날 아침
몸소 사단(社壇,제사를 지내는 단)에 나아가 상제(上帝)님께 제사(천제)를 드렸다.
 이어서 무왕은 공신들을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의 다섯 등급으로 작위를 나누어 영토를 분배하고 제후로 봉함으로써 비로소 봉건제도를 실시하였다.
 강태공도 천하통일의 대공로로  제(齊)나라 땅 백 리의 영토를 받고 제후로 봉해졌다.
 
마씨 부인을 서낭신으로 봉함
 제나라 왕으로 부임한 강태공은 처음에는 많은 이민족의 반항을 받기도 하였지만 정치를 개선하고
풍속을 존중하고 예의를 간략히 하는 등 다스리기에 노력하여 모두가 잘 동화되었다. 
 
 어느 날 강태공이 수레를 타고 시찰을 나갔다.
 어느 거리를 지나는데 옛날 자기를 버리고 재가한 마씨가 들에서 갱피(곡식의 일종)를 훑고 있었다. 
내내 아무 것도 없는 집에 재가하여 갱피를 훑으며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강태공은 수레를 멈추고 마씨를 불렀다.  마씨는 옛일을 후회하며 다시 자신을 받아주기를 간청했다. 
강태공은 물을 한동이 떠오라고 시킨후 마씨부인에게 땅에 쏟으라고 한후
 한번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을 수 없듯이 한번 끊어진 인연은 다시 맺을 수 없다며 재가해 살고있는 마씨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고 떠났다. 
 
 이후 마씨 부인은 가난하게 살다가 어느 고개 마루턱에서 죽었다.
그후 강태공은 그래도 옛날의 자기 신세를 갚기 위해 마씨 부인을 서낭신으로 만들어 주었는데, 
서낭신은 마을의 수호신으로 마을의 액운을 막고 잡귀를 막는 신이다.
   마씨 부인이 잡귀가 되어 죽어서도 몇십년 살다 없어질 운명을 강태공이 근 3천년이란 세월동안
향화(향불,제사)를 받도록 해서 지난날의 은공을 갚은것이다.  초기 성황당의 유래
  
귀신을 뜻대로 부리다
 
  " 강태공은 72후를 써서 귀신을 종처럼 부렸다"
강태공은 1년을 72후로 나눠 (1후는 5일) 동식물 또는 기타 자연현상 변화의 징후에 근거하여 절기의 변화를 설명하고 이름을 붙여 농사에 이용하였다.
    또한 강태공은 귀신도 마음대로 사역케 하는 신권을 갖추고 있었는데 중국설화 속에 많은 일화들이
 전해온다.
 [봉신연의]에 보면 은나라 주왕의 애첩 달기는 소후의 딸로 은주역 청당에 묵을 때
곤륜산의 천년 묵은 암 여우가 그녀의 혼백을 빼앗고 그녀의 몸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서
주왕의 비(妃)가 되어 온갖 악행을 일삼게 되자
곤륜산에서 40 년간 수행을 한 강태공이 도술로 여우를 물리치게 된다는 내용이 나온다. 
 또 정산에 좋은 진흙이 있는데 미꾸라지 정령의 방해로 수로를 이용하지 못하고 육로로 운송해야 했다. 이에 강태공이 신조(神釣)로 미꾸라지 정령을 잡아 수로를 내도록 하였다.  
그 증거로 조어대(釣魚臺)가 있다.
 
 “ 봉서사의 진묵(조선 중기 진묵대사)은 3둔(遁)을 하였고
주나라의 강태공은 52둔을 하였으나
나는 이제 72둔을 다 써서 화둔(火遁)을 트리라.”하신 내용이 있다.  봉서사(전라도 완주군 용진면소재)
 
『봉신연의』에 의하면 강태공이 토둔(土遁) 수둔(水遁) 목둔(木遁) 등을 행하여 몸을 감추어 이동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와 같이 강태공은 도술에 능통하여 귀신도 능히 뜻대로 부리는 신권이 있었다고 전한다.
 
- 중국소설은 무협소설처럼 워낙 뻥이 심하게 가미돼있는것이 특색이다. 
1%의 객관적인 사실을 서술하는데 99%의 과장과 뻥?으로 뻥튀기하니 사람들이 다 뻥이라고 하는것이다.
그래도 강태공이 귀신을 부리는 신권을 행사했다는것은 1%의 객관적사실이었을거라고 나는 믿는다-   
 
 

 신교의 맥을 중국 한족에 전수하다

 주나라를 건국하는데 지대한 공을 쌓았던 강태공은 강족(姜族)으로 정통 동이족 출신이다. 
강태공은 동방 조선족으로서 신교의 한 맥을 중국 한족에게 전수하게 되는데, 
그는 삼신상제님의 가르침을 받아내려서 나라를 세우고 국가를 통치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삶의 좌표로
삼았다.  그의 저서인 『육도삼략』의 중심에는 동방 신교(神敎)의 가르침이 그대로 녹아있다. 

사마천 『사기』의 「주본기」에 보면  “ 무왕이 주왕을 처단하고 이튿 날 아침 몸소 사단(社壇)에 나아가 
남쪽을 향하여 모숙정은 맑은 물을 받쳐들고
                     위강숙보는 자리를 깔았으며 … 
                     윤일은 축문을 읽어 주왕의 죄악을 상제께서 듣도록 명백히 아뢰었다” 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청수(淸水,맑은 물)를 모시고 상제께 고하는 부분은 동방 조선족 신교 문화의 원형이다.

또 『사기』「 봉선서」에 의하면 “ 조정의 동남쪽에 태일단(太一壇)을 설하고 천일신(天一神) 지일신(地一神) 태일신(太一神)을 모셨다.” 는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이 천지인(天地人) 삼재관을 바탕으로 천일신, 지일신, 태일신으로서 삼신(三神)을 숭배한

제천행사가 있었는데,  이것이 동방 한민족의 신교(神敎)의 신관이다.

 

 지금으로 부터 8백년전 고려 공민왕 때 행촌 이암은 천일은 조화(造化)의 신,
                                                                       지일은 교화(敎化)의 신,
                                                                       태일은 치화(治化)의 신으로 정의했다.
강태공은 산동성 제나라의 왕이 된 후 동방신교의 삼신관을 서방 중국 땅에 뿌리내렸다.

 

 이로부터 제나라에서 삼신상제님과 치우천황(한민족 배달국 임금)과 천지일월에 제사하는
 팔신제(八神祭)풍속이 더욱 널리 성행하게 되었다.
팔신제는 천지의 여덟 신을 섬기는 문화로,  삼신 상제님을 모시는 천주(天主), 지주(地主), 병주(兵主), 음주(陰主), 양주(陽主), 월주(月主), 일주(日主), 사시주(四時主) 등의 신을 모셨다.

 

사기』 , 『진역유기(震域留記)』에 의하면 진시황과 한나라 고조(유방)까지도 팔신제를 봉행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팔신제는 고대 중국문화 속에 살아있던 동방신교 제사문화의 원형이며 산 증거이다.
 
병법과 정치로 천하만세에 은혜를 베풀다


 강태공이 지은 병법서인 『육도(六韜)』는 다른 병서와 달리 치세(治世)의 대도(大道)로 부터
인간학 조직학을 논급하고 정전(政戰) 및 인륜을 논한 것이 특색이다.

또한 『삼략(三略)』은 감추어져 비전 되다가 진(秦)나라 시대의 황석공이
장량(한나라를 창업한 유방의 책사,장자방)에게 전수하여 세상에 드러났다.
 
 태공망의 육도가 역대 병법사상가들에게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후대의 손자병법의 손자(孫子), 오자(吳子,오자서), 위료자(尉?子), 이위공(李衛公) 등 중국의 제가(諸家) 병법사상도 『육도삼략』을 기간(基幹)으로 하고 있다.

    전국시대에 6국의 재상을 지낸 유명한 유세가인 소진은 태공망의 병법서를 접하고

비로소 군왕들을 설득하여 천하를 경륜할 도를 터득하게 되었다.
 
 “ 강태공이 제잔금폭(除殘禁暴, 잔악함을 제어하고 폭정을 금하는)의 묘략과 부국강병(富國强兵)의 술법을 전수함으로부터  천하가 그 덕으로 대업을 이루었으되 그 은덕을 보답지 않고

    다만 디딜방아에 동티막이로  ‘ 경신년 모월 모일 강태공 조작(姜太公造作)’ 이라 써 붙일 뿐이니
  어찌 도의(道義)에 합당하리오.”  하시며 “
  이제 해원(모든 원한을 풀어내는)시대를 당하여 모든 신명이 태공의 은혜를 보답하게 되리라.”
  

디딜방아에 동티막이 (예전에는 집집마다 디딜방아가 있었는데 동티막이라는것은 액막이, 즉 올 한해도 잡귀로부터 오는
모든 액(질병,사고)을 강태공의 힘을 빌어 막고자 디딜방아에 써 붙인 풍속)   
 

예로부터 잡신을 물리친다는 제살(除煞)의 한 풍속으로 디딜방아를 짓고 나면 흔히 방아몸체에, 
강태공이 태어났다고 하는 연월일시인 ‘경신년(庚申年) 경신월(庚申月) 경신일(庚申日) 경신시(庚申時) 강태공 조작(姜太公 造作)’ 이라고 쓴다.

 

  이를 ‘ 방아상량’이라고 하는데 디딜방아를 고치거나 새로 놓을 때는 반드시 경신일 경신시에 맞추어
방아 동티 (귀신을 노하게 하였을 때 받는 재앙의 하나)를 막고자 하였다. 
 
 이는 강태공을 내세워 잡귀가 덤벼들어 해를 끼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인데, 우주원리로 보면
금극목(金克木)의 상극(相克)원리로 강한 금기(金氣)를 지닌 경금(庚金)과 신금(申金)으로써
목기(木氣)에 의한 동티를 막으려는 것이었다. 
 
 강태공은 160살을 살다가 죽었다.  
80년은 초야에 묻혀서 가난하게 살았고, 80년은 세상에 뜻을 펼치며 영광스럽게 살았다.

그래서 강태공의 삶을 두고 ‘ 궁팔십(窮八十) 달팔십(達八十)’이라고 한다.

 

강태공이 죽자 그를 장사를 지내려 하는데 사체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여상은 시해선(尸解仙,육체를 가지고 신선으로 승천)이 되었다고 믿었다. 
또 일각에서는 『육도』라는 여섯 권의 병법서를 남기고 세상을 뜨자 영구(營丘)에
장사를 지냈다는 이야기도 있다.

 
천하사 심법
 강태공  

"강태공이 십년 경영으로 삼천육백 개의 낚시를 벌였음이 어찌 한갓 주(周)나라를 일으켜
봉작(封爵)을 얻기 위함이었으랴.  이를 널리 후세에 전하려 하였음이다” 

  

강태공이 80 평생을 가난 속에 살면서도 끊임없이 공부하고 마음을 닦으며 위수에서 10년 동안
삼천육백 개의 낚시를 벌려놓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바로 후세에 천하사를 하는 심법을
전수하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 내 종자는 삼천년 전 부터 내가 뿌려놓았느니라.”

 


 <참고자료> 
 『육도삼략』이상옥 역해 명문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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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잃어버린 역사를 찾는 테마 - 실증환국사 1,2 - 실증배달국사1

다음 달부터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고 스스로 도로 위를 달리는 무인(無人) 자율주행차가 등장할 예정이다. 구글의 지주회사인 알파벳의 자율주행차 개발 자회사 웨이모가 세계 최초로 무인 로봇택시를 상용화하기로 한 것이다.

웨이모의 첫 완전 자율주행차 상용화서비스를 앞두고 현대자동차(005380)가 남모를 속앓이를 하고 있다. 웨이모의 자율주행 기술개발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최고경영자(CEO) 존 크래프칙이 과거 5년간 현대차의 미국 법인장을 맡았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북미국제오토쇼’에서 자동차업계 관계자, 취재진 등과 이야기를 나누는 존 크래프칙 웨이모 CEO/진상훈 기자
알파벳은 존 크래프칙을 기용해 향후 엄청난 수익을 거둘 것으로 전망되는 자율주행 플랫폼 시장을 선점할 가능성이 커졌다. 반면 그가 떠난 후 최근 미국에서 판매량 감소와 실적 악화로 어려움을 겪는 현대차는 속이 쓰릴 수 없는 상황이다.

◇ 웨이모, 세계 최초 무인택시 상용화 눈 앞…200조원 시장 선점

지난 14일(현지시각) 블룸버그 등 주요 외신에 따르면 웨이모는 다음달부터 미국 애리조나주 피닉스에서 무인 로봇택시 자율주행서비스를 시작할 예정이다. 웨이모는 그동안 피닉스 주민 400여명을 대상으로 자율주행차를 시범 운행해 왔지만, 상용화 서비스가 시작되면 누구나 피닉스에서 이용료를 지불하고 로봇택시를 이용할 수 있다.

블룸버그는 웨이모가 새로운 브랜드를 만들고 우버, 리프트 등 현재 미국에서 운영되고 있는 호출형 차량공유서비스(카헤일링) 업체들과 직접 경쟁을 시작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웨이모는 지난 2009년부터 무인 자율주행차 연구를 시작한 이후 줄곧 완성차 업체나 경쟁 IT 기업들에 비해 기술 수준이 한 발 앞서가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현재까지 웨이모의 완전 자율주행차가 공용도로에서 주행한 거리는 1000만마일(1600만km)로 2위인 우버(300만마일)를 크게 앞선다. 올해 미국의 기술조사업체인 내비건트리서치가 매긴 글로벌 자율주행차 기술 순위에서도 웨이모는 제너럴모터스(GM), 메르세데스-벤츠 등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원본보기

웨이모와 피아트크라이슬러(FCA)가 공동으로 개발한 자율주행 미니밴 ‘퍼시피카’/웨이모 홈페이지
글로벌 자동차 업계는 특히 존 크래프칙이 지난 2015년 CEO로 합류한 이후 웨이모가 기술개발은 물론 사업개발과 상용화 준비에서도 빠른 속도를 내고 있다고 평가한다.

존 크래프칙은 스탠퍼드대학교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한 엔지니어 출신으로 14년간 포드에서 대형 프리미엄차량 개발을 맡았던 인물이다. 게다가 현대차 미국법인(HMA)을 이끌면서 판매와 조직관리에서도 수완을 보였다. 자동차 개발과 영업에서 모두 고른 경력을 쌓은 그가 웨이모를 이끌면서 알파벳은 경쟁사들보다 한발 앞서 무인 로봇택시 상용화를 눈 앞에 두게 된 셈이다.

모건스탠리는 웨이모가 상용화 서비스를 시작하기 전부터 이 회사의 시장가치를 800억달러(약 90조원) 규모로 평가했다. 여기에 무인 자율주행 트럭을 상용화 해 육상운송서비스까지 시작할 경우 960억달러 규모의 부가가치를 추가로 창출할 것으로 전망했다.

◇ 현대차, 존 크래프칙 내보낸 후 내리막…신기술 개발도 고전 

반면 크래프칙이 떠난 후 현대차는 미국 시장에서 판매는 물론 신기술 개발에서도 별다른 성과를 보지 못한 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지난해 현대차의 미국 판매량은 68만5555대로 전년대비 11.5% 감소했다. 올들어 10월까지 누적 판매대수도 54만5444대로 극심한 부진이 이어졌던 지난해보다도 0.4% 줄었다. 세단 중심으로 구성된 판매차종 라인업을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중심으로 빠르게 전환하지 못한 탓에 미국에서 점유율이 계속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올해 내비건트리서치의 자율주행기술 평가에서도 현대차는 글로벌 완성차 업체 중 최하위권인 12위에 머물렀다.



현대차 미국 법인장으로 일하던 시절의 존 크래프칙/조선일보DB
사실 존 크래프칙은 현대차에서도 능력을 인정받았던 인물이다. 2009년부터 2013년까지 5년간 법인장으로 일하면서 취임 초기 3%에 불과했던 미국 내 점유율을 5%대까지 끌어올렸다. 게다가 제네시스와 엘란트라가 ‘북미 올해의 차’로 선정되는데도 앞장서면서 현대차의 브래드 가치를 크게 높이기도 했다. 크래프칙은 그러나 2014년 실적이 기대에 못 미쳤다는, 다소 석연찮은 이유로 법인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크래프칙에 이어 판매 전문가인 데이브 주코브스키가 법인장을 맡았지만, 실적 부진으로 2년여만에 경질됐다. 후임 법인장은 국내파인 이경수 당시 현대트랜스리드 CEO가 맡았지만, 역시 판매 부진의 책임을 지고 1년만인 지난달 자리를 떠났다.

현재 현대차 미국 법인장 자리는 공석으로 남아있다. 일단 이용우 현대차 북미권역본부장이 겸직하고 있는 상태다. 최근 중국 법인의 경영진을 대거 물갈이한 현대차는 새로운 법인장을 찾는데도 골몰하고 있다. 과거와 달리 새 미국 법인장은 급변하는 시장 상황에 따라 판매와 브랜드 관리 등은 물론 신기술 연구동향 파악 등 전반적인 분야에서 능력을 보여줘야 한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가장 이상적인 새 미국 법인장은 엔지니어 출신으로 자동차 업계 전반에 두터운 인맥까지 가졌던 존 크래프칙과 같은 유형의 인물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진상훈 기자 caesar8199@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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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세계환단학회 추계학술대회

 

 

일시: 2018.12.7.() 09:00-18:00

장소: 부경대학교 대학극장

주최: 세계환단학회

후원: ()대한사랑, STB상생방송

 

세계환단학회는 학제간 융합연구를 통하여 대한민국 뿌리역사와 원형문화를 드러내고 세계화하는 학술모임입니다. 정통 민족사학의 맥을 이어 고대사의 난맥상을 새롭게 해석하고 바로잡는 세계환단학회 학술대회를 개최하오니 많은 관심과 참여바랍니다.

 

 

사전등록

기간: 2018115-1130

방법: 세계환단학회 홈페이지(www.hwandan.org) 참조

등록비: 회원 3만원, 비회원 4만원(현장등록시 1만원 추가)

문의: 010-8868-6964(bwahn@cbu.ac.kr)

 

초대의 글

 

안녕하십니까? 대한의 뿌리역사와 문화를 드러내는 2018년 세계환단학회 추계학술대회에 정중히 모십니다.

오늘 우리는 일제의 군화발에 짓밟힌 강토를 수복한 지 70여년이 지났건만 대못같이 박혀있는 식민사관의 망령은 더욱 세차게 국민의식을 마비시키고 있음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일제가 조선을 영구히 지배하기 위하여 가장 먼저 한 일은 조선역사의 뿌리를 거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단군신화론, 한사군재한반도설, 삼국사기 초기기록불신론, 임나일본부설과 같은 교묘한 역사조작입니다. 그럼에도 작금의 사학계에는 문헌근거가 전무한 이런 거짓주장이 오히려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학문입니까! 역사학은 나라를 위해서 존재할 때 그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역사뿌리를 소중히 되새겨야할 지난 개천절에는 국사교사를 양성하는 유명 국립대 교수가 국립방송에 나와서 단군은 신화이고 단군조선은 존재하지 않은 허구의 역사라고 했습니다. 보고서도 믿기 어려운 천인공노할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알량한 기득권을 위해 역사교과서에도 없는 거짓 주장을 서슴없이 하는 그 비열함은 사대주의 식민사학, 매국사학을 넘어서 나라와 조상을 모독하는 반인륜사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가야사 복원연구에 투입되는 수천억 국가예산은 과연 그 값을 제대로 할 수 있을까요? 가야를 일본이 식민통치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이야말로 역사상 가장 악질적인 매국사학입니다. 금번 학술대회를 통해서 가야가 임나라는 잘못된 인식이 완전히 걷힐 것으로 확신합니다. 부디 귀한 걸음 재촉하셔서 우리역사의 미래에 빛을 밝혀주시길 빕니다.

 

20181030

 

세계환단학회장 이익환

프로그램

 

 

접수 및 등록 09:00-10:00

개회사 및 축사 10:00-10:20

개회사 이익환(세계환단학회장, 연세대학교 명예교수)

축사 김영섭(부경대학교 총장)

 

1부 군사고고학연구기획 국제패널

고대사와 동북아 국제관계

 

사회: 허철부(명지대학교 명예교수)

 

1) 동북공정과 한중관계: 언론의 보도양태 분석 10:20-10:50

발표: 장영덕(인하대학교)

 

2) 오족협화론과 일본-만주국의 관계: 중국의 동북공정 다민족통일국가론과의 비교 10:50-11:20

발표: 이종성(규슈대학교)

 

3) 지정토론 11:20-11:50

토론: 션딩창(북경대학교), 김동수(부경대학교)

 

점심식사 11:50-12:50

 

2부 학술발표

Session 1. 桓檀傳授之眞訣 12:50-13:40

 

사회: 김상일(전 한국신학대학교 교수)

 

환단고기에 대한 역사적비평적 접근의 필요

발표: 민영진(감리교신학대학 명예교수)

 

Session 2. 國猶形 史猶魂 13:40-15:50
 

 

사회: 김철수 (중원대학교)

 

1) 간도(間島, 艮島, 墾島) 수복의 역사적 당위성과 방안 13:40-14:10

발표: 조원홍(육군사관학교 명예교수)

 

2) 대한민국의 네오르네상스, 홍익인간에 길이 있다. 14:10-14:50

발표: 강정모(경희대학교)

 

3) 한민족의 옥문화 14:50-15:20

발표: 정건재(전남과학대학교)

 

4) 종합토론 15:20-15:50

토론: 김상현(전쟁기념관 학예사), 민영현(부산대학교), 윤창열(대전대학교)

 

휴식 15:50-16:10

 

3부 초청특강 16:10-18:00

 

제목: 가야와 임나일본부의 진실

 

연사: 안경전(STB 상생방송 이사장)

 

세계환단학회 역사

평안도 선천출신 독립운동가 운초 계연수 선생은 1911년에 스승 해학 이기, 진사 백관묵, 진사 이형식 그리고 선생의 집안에서 내려오던 한민족 비사를 기록한 삼성기 2,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를 한 권의 책으로 묶어 편찬하면서 이를 󰡔桓檀古記󰡕라고 명명하였다. 󰡔桓檀古記󰡕는 당시 독립운동가가 중심이 된 단학회의 역사교재 역할을 하였다. 1920년 일제의 밀정에게 체포되어 모진 고문 끝에 계연수 선생이 숨지자 제자인 이유립은 1948년에 초판 󰡔桓檀古記󰡕 한 권을 들고 월남하였다. 선생은 단학회를 이어 1966년에 단단학회를 조직하여 󰡔커발한󰡕, 󰡔대배달민족사󰡕 등의 학술지를 발간하면서 󰡔桓檀古記󰡕에 수록된 대한의 역사문화를 회복하기 위한 역사광복운동을 전개하였다. 세계환단학회는 민족사학의 맥이 끊어질 위기에 처하자 식민사학의 자학사관에 염증을 느낀 인문, 사회, 자연과학분야의 학자들이 모여 학제간융합 연구방식으로 명멸해가는 민족사학의 맥을 이어 대한민국의 뿌리역사와 원형문화를 회복하고자 20146월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창립되었다. 초대 백산 박성수 박사를 필두로 이홍범 박사, 홍윤기 박사를 거쳐 현재 이익환 박사가 회장을 맡고 있다. 공식 학술지인 세계환단학회지51호까지 발행되었고, 전국 주요 대학도서관에 배포됨으로써 우리 상고사와 홍익역사철학에 대한 연구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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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로 흐르는 물을 서해로 돌린

칠보 수력발전소와 계화도 간척사업

 

"저 산에 콧구멍이 둘이 있으니 후일에 저 콧구멍으로 물이 나와서 불을 쓰리라" (도전 5:141:9)

 

 

강증산 상제님의 천지공사(천지공사)에 의해

전개되어온 20세기 인류역사

 

19세기말부터 오늘날까지 100여년간 인류사 발전의 행보는 이전의 역사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20세기의 이러한 급속한 역사 발전의 원인을 흔히 과학기술의 발전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러한 역사발전의 이면에 1901년부터 1909년까지 강증산 상제님께서 천지공사(천지공사)를 통해 역사의 물길을 터 놓으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1차 세계대전, 2차세계대전을 비롯하여 우리 나라 남북분단과 최근 현대그룹의 고 정주영씨가 소를 몰로 삼팔선을 넘어간 사건등, 20세기 역사를 움직인 국내외 크고 작은 일들이 모두 상제님이 보신 천지공사가 현실로 이화된 것이다.

전북지역의 가뭄을 해결함으로써 전북 칠군-전주, 태인, 정읍, 고부, 부안, 순창, 함열- 에 흉년을 사라지게 했던 칠보산 수력발전소 건설, 그리고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있었던 우리 나라의 보릿고개를 해소하는 데 기여한 계화도 간척사업, 이 두 가지 사업이 실현된 것도 바로 강증산 상제님의 천지공사 덕분이다.

 

   

 

                        

 

① 칠보 수력발전소(섬진강 수력발전소라고도함) 유역 안내도

② 칠보발전소로 물을 끌어들이는 취수구

③ 운암호의 물이 칠보터널을 지나 이 송수관으로 떨어져내리면 그 아래에서 발전을 한다

 

 

상제님께서 수많은 공사를 보시는 가운데 당신이 직접 강세하신 이 땅 민생들의 생존의 첫 번째 조건인 식록을 걱정하여 이를 해결해주는 공사를 보신 것이다.  칠보 수력발전소와 계화도 간척사업과 관련된 강증산 상제님의 공사내용을 알아보기로하자.

 

"콧구멍으로 물이 나와 불을 쓰리라"

전북 칠군의 가뭄을 해소시킨 칠보발전소 공사(公事)

 

전북 정주시(구, 정읍시) 칠보면에는 칠보산에 터널을 뚫어 만든 칠보발전소가 있다. 칠보산에 뚫린 이 터널로 섬진강 다목적댐에서 끌어올린 물이 지나는 곳이다.

운암댐은 운암면 운정리에서 정읍군 산외면 종산리 팽나무 골까지 759m의 굴을 뚫어 동진강의 태인천 상류에 유입시켜 태안면 낙양리에 이르러서는 우측으로 김제방면, 좌측에는 정읍방면으로 물길을 만든 것이었다. 그런데 이 운암발전소는 1985년 3월 폐쇄되었으며, 현재는 저수지 안에 수몰되었다.

1965년에 준공된 섬진강댐은 그 규모가 길이 342.3m에 높이가 64m이다. 섬진강 상류로부터 84.2km 지점인 전북 임실군에 댐을 축조하고 칠보산을 뚫어 동진강에 방류함으로써 부안의 계화도 간척지까지 농업용수가 풍부하게 되었다. 섬진강 물은 본래 남해로 흐른다. 그런데 섬진강댐을 막고 칠보발전소를 통해 서해로 물길을 돌린 것이다. 국내 최초의 유역변경식 수력발전소인 칠보산발전소는 전력자원이 빈약한 호남지방의 수력에너지를 공급함으로써 주요자원 개발을 위한 동력원을 공급함은 물론, 발전에 사용한 물을 동진강에 방류하여 김제평야의 곡창지대를 기름지게 하고 있다.

또한 섬진강 유역의 홍수피해를 경감시키면서 하류지역의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시설을 갖추고 있다. 전북 지역에 흉년을 없애고, 생활환경을 크게 변화시킨 이 대공사가 바로 강증산 상제님이 100여년 전에 보았던 천지공사의 하나였다는 것이다. 칠보발전소를 만들게 했던 강증산 상제님의 공사내용을 살펴보자

 

* 정미년 12월에 운산리 신경수의 집에 가시어 고사를 행하시며 성도들에게 물으시기를

"일곱 고을 곡식이면 양식이 넉넉하겠느냐?"하시니 대답하기를 "쓰기에 달렸습니다."하거늘

다시 말씀하시기를 "그렇기야 하지만 찻독이 찼다 비었다 하면 못쓸 것이요, 아무리 써도 마르지 않아야 하리니 어떻게 하여야 하겠느냐? " 하시매

성도들이 대답하기를 "그것은 알지 못하겠습니다."하니라.

이에 상제님께서 양지에 무수한 선을 그리시니 성도들이 "신작로 같은 것을 왜 그리십니까?"하고 여쭈거늘

"이게 신작로로 보이냐? 물 나가는 물똘이니라." 하시고 저수지와 물똘의 도면을 그리시어 불사르며 말씀하시기를

"이곳이 운산(雲山)이 아니냐. 운암(雲岩) 물줄기를 금만경(金萬頃)으로 돌리더라도 하류에서 원망은 없을 것이니 이 물줄기가 대한불갈(大旱不竭)이라. 능히 하늘을 겨루리라." 하시니라.

또 말씀하시기를 "강태공은 제(齊)나라 한 고을의 흉년을 없게 하였다 하나 나는 전북 일곱 고을의 흉년을 없게 하리니 운암은 장차 만인간의 젖줄이 되리라."하시니라.

또 행단 앞산을 가리키시며 "저 산에 콧구멍이 둘이 있으니 후 일에 저 콧구멍으로 물이 나와 불을 쓰리라." 하시더니

훗날 과연 상제님께서 도면을 그리신 대로 댐과 저수지가 생기고 행단 앞산에는 수력발전소가 생기니라

 

- 찻독 : 쌀을담아 놓은 쌀독의 전라도 방언. 뒤주.

- 대한불갈 : 큰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아니함.

- 두치강 : 선진강, 전북 진안군 백운면 팔공산에서 발원하여 남해의 광양만으로 흘러든다

 

 

강증산 상제님은100여년 전 공사를 보실 당시 칠보산에는 터널은커녕 굴조차도 없던 산이었다. 그런데 상제님께서는 그때 이미 칠보산에 콧구멍이 둘이 생기고 그것으로부터 물이 나오고 또 그 물로 불(전기)을 생산하게 된다고까지 말씀하신 것이다. 강증산 상제님은 공사를 통해 운암의 물줄기를 김만경으로 돌림으로써, 전북 칠군에 가뭄이 없어지며 돌립으로써, 전북 칠군에 가뭄이 없어지게 될 것이라고 했는데, 그것이 1965년에 현실도 드러난 것이다.

 

보릿고개 해소에 기여한 계화도 간척사업

 

그리고 섬진강의 물줄기는 계화도로까니 뻗어나가 농업용수로 이용되고 있다. 그런데 증산도 도전에 보면 강증산 상제님께서 계화도 간척 사업도 공사로 보신 내용이 나온다.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운암강(雲岩江)이 흘러 두치강이 되었으나 장차 계화도(界火島)로 나가게 되리라. "하시더니

하루는 계화도에 가시어 바다에 떠 있는 배를 가리키시며 "저 배가 물속에 가라앉아 있으니 내가 육지로 건져 놓으리라."하시니라.

 

(계화도 간척지 섬진강물로 계화도 간척지에까지 농업용수를 공급한다. 이 곳에서는 연간 70여만톤의 질좋은 계확미와 4000여톤의 보리가 생산된다.

 

- 계화도 : 전북 부안군에 있던 섬. 변산반도의 북단에서 4km 정도 떨어져 있었는데, 1963~1968년 계화도와 동진면을 연결하는 방조제가 축조되면서 육지가 되었다

 

 

   (섬진강댐을 막아 생긴 운암호(옥정호라고도 함)

 

계화도 간척사업은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대규모로 시도된 간척사업으로 1963년~1971년 사이에 이루어졌다. 본래 섬진강 다목적댐 건설로 정든 곳을 떠나야 했던 수몰민 1992세대를 이주하게 할 목적으로 시작되었다.

간척사업을 하기 전 계화도(界火島)는 전라북도 부안군에 속해 있던 섬으로서 변산반도의 북단에서 4km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간척사업으로 계화도와 부안군의 동진면을 연결하는 방조제가 축조되면서 육지화 되었다. 이 간척사업에 의해 약 830만평(2.74ha)에 이르는 농지가 만들어졌다.

가을에 수확한 식량이 다 떨어져 다음해 초여름 보리가 수확될 때까지 풀뿌리나 나무 껍질을 벗겨 먹던 보릿고개. 지금도 젊은 세대들에게는 TV나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낯선 풍경이지만 우리 부모님 세대에는 대부분 그렇게 끼니를 걱정하며 살았던 보릿고개가 있었다. 그런에 바로 이 계화도 간척사업이 보리고개 해소의 전깃점이 되었다.

이곳에서는 연간 70여만톤의 질 좋은 쌀(계화미)과 4000여톤의 보리가 생산된다. 칠보발전소 건설과 계화도 간척사업, 이 두 공사는 우리 나라의 주식 자급에 일등공신 역할을 한 것이다.

혹자는 강증산 장제님의 이러한 천지공사를 예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예언의 차원이 아니다. 강증산 상제님께서 하늘과 땅을 뜯어고치고치는 천지공사를 통해 장차 그렇게 되도록 직접 짜놓으셨고, 그러 인해 그 때가 되면 그 일이 꼭 이루어지는 것이다.

 

* 내가 천지운로를 뜯어고쳐 물샐틈없이 도수를 굳게 짜 놓았으니 제 도수에 돌아 닿는대로 새 기틀이 열리리라.


 
  (섬진강 상류의 운암강을 막아서 만든 섬진강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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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부시

History(역사) 2018.10.05 11:04
        찬부시
                              전문규
아무 옷이나 입어도 화보인데
비가 온들 아름다움을 가릴수 있나
국화꽃 그윽한 청전하늘에
가을 바람이 옷깃이 스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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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시황은 중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황제로 최초로 중국을 통일했던 진나라의 황제였다. 그런데 진시황은 자신의 죽음을 피하고자 한 예언서를 손에 넣었다고 한다. 28년에는 불사약을 구하기 위하여 많은 동남동녀와 함께 제나라 사람 서시를 동해에 있다고 전하여지는 봉래, 방장, 영주 등 삼신산에 보낸 적이 있었으며, 32년에는 연나라 사람 노생(盧生)이 바다로부터 동아와 보고한 가운데 녹도서(錄圖書)라는 참서(讖書)에 이르기를 「진나라를 망케할 자는 호라」는 말을 듣고 호(胡)자를 자기의 아들인 호해인 줄을 모르고 북호인 흉노인 줄로만 오해하여, 몽렴(蒙렴)이라는 장수를 시켜 군사 삼십만으로 북쪽 오랑캐를 공격하여 물리치는 동시에 다음해에는 북호가 다시 쳐들어오지 못하도록 임조(臨洮)에서 요동(遼東)에 이르는 만리장성을 쌓게 하였던 것이다.

34년에는 승상인 이사가 글을 올려 말하기를, 지금은 세상이 안정되어 백성은 집에서 일만 부지런히 하고 선비는 법령만 배워 익히면 될터인데, 모든 선비들이 그렇지 않아 옛 학문만 하고 지금 것을 배우려하지 않을 뿐 아니라, 새 법령이 나오면 입즉심비하고 출즉항의하여 나라 일을 훼방만 하고 인심을 현혹시키니 이런 일을 일절 금하는 동시에 역사책도 진나라 역사가 아니면 전부 불살라버림은 물론이오, 백가시서를 가지고 있는 자도 모두 관에 가지고 나와 불살라 버리되 만약 시서를 가지고 말썽을 부리는 자가 있으면 당장에 목을 베고, 또 옛날 도리만 옳다하고 지금 정치를 비방하는 자는 일가족을 전멸하고, 만약 관리로서 이것을 알고도 집행하지 않는 자는 같은 죄로 다스리며, 명령이 내린지 30일내에 불살으지 않는 자는 묵형(墨刑)을 가하여 강제노동을 시키도록 하고, 다만 없애지 않은 책은 의약에 관한 것과 점서책 그리고 곡식과 초목을 심는데 관한 것 뿐이고, 법령을 배우려는 자는 관리를 선생으로 모셔야 한다는 것이 대체의 내용이었는데 시황은 이것을 옳게 여겨 그대로 실행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35년에는 후생(候生) 노생(盧生)등이 시황을 비방하고 어디론지 도망해 버렸다. 시황은 크게 노하여 함양에 있는 선비들을 모조리 잡아다가 비방한 자를 문초한 결과 선비들은 자기 발뺌만 하고 남에게 책임을 뒤집어 씌워 서로 불어넣는 것이 460여명에 달하였다. 시황은 이들을 모두 함양에 구덩이를 파고 산채로 묻어버렸던 것이다. 이것을 본 맏아들 부소가 극력 간하였지만 시황은 간하는 말에 또 노하여 부소를 북쪽으로 내쫓아 그곳에 가 있는 몽렴(蒙렴)의 군대를 감독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 해에는 또 조궁(朝宮)을 지으려고 먼저 전궐(前궐)인 아방궁을 짓게 되었는데 그 규모는 동서가 5백보(3천척)요, 남북이 50장으로 위에는 만명가량 않을 수 있고 아래에는 오장기치(五丈旗幟)를 세울 수 있는 굉장한 건물이었다. 그리고 모든 궁전에는 악기와 미인을 가득 채워 놓고 수시로 이곳저곳 가서 마음대로 즐기기도 하였던 것이다. 언젠가는 시황이 양산궁에 갔다가 산위에서 거리에 지나가는 승상의 행차에 수레와 말탄 사람이 너무 많은 것을 보고 좋지 않게 여긴 적이 있었는데 그 후 승상은 시황의 시종 가운데 한사람으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듣고 수레와 말탄 사람의 수효를 많이 줄였다. 그 다음 승상의 행차규모가 전보다 많이 줄어진 것을 본 시황은 이것은 필시 전에 양산궁에 같이 갔던 수행원 가운데 누가 말한 것이라 보고 한 사람 한사람 불러 물어보았으나 누구 하나 실토하는 사람은 없었다. 시황은 성이 날대로 나서 그 당시 같이 갔던 사람을 전부 잡아 죽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 다음 부터는 시황의 간곳을 아는 사람도 없었으며, 모든 정사의 결재는 대소를 막론하고 오직 함양궁에서만 친히 행하여 그의 사생활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37년에는 시황이 지방순시에 나섰는데 좌승상 이사와 작은 아들 호해와 중거부령 조고와 근신 몇 명 등이 수행하게 되었다. 여러 군데를 돌아다니던 중 시황은 무서운 해신과 싸운 꿈을 꾸고 그만 병이 생겨 점차 중하게 되었다. 죽음을 각오 하였던지 자기가 죽으면 함양에 와서 장례를 같이 지내도록 하라는 편지를 써서 만리장성 쪽에 가있는 맏아들 부소에게 전하려고 옥새(玉璽)까지 찍어 놓은 후 이 서신이 조고에게만 넘겨지고 사신이 채 떠나기도 전에 시황은 그만 사구평대(沙丘平臺)에서 죽게 되었다. 그때의 나이는 50세.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 어떤 변란이 일어나지나 않을까 하여 승상 이사는 이것을 절대로 비밀에 붙이고 식사 올리는 것과 보고사항 등 생시와 다름없이 하였기 때문에 시황의 죽음을 아는 사람은 호해, 조고등 근시자 5,6명 뿐이었다. 조고는 호해 이사등과 공모하여 한가지 꾀를 내었다. 그것은 시황의 조서를 위조하여 호해로 태자를 삼고, 공자 부소와 장군 몽렴에게는 족음을 주는 서신을 보내는 동시에, 시황이 죽기 전에 써놓은 부소에게 보내는 글은 몽땅 없애 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길을 재촉하여 함양으로 향하는데 며칠이 지나는 동안 시신이 썩기 시작하여 냄새가 나므로 이것을 속이기 위하여 썩은 복어를 한섬가량 수레에 실어 냄새를 풍기기도 하였던 것이다. 함양에 돌아와서는 즉시 시황의 붕(崩)한 것을 발표하는 동시에 호해가 뒤를 이어 황제의 위에 오르고 시황은 여산(驪山)에 장례 지내기로 하였는데, 여산은 황금과 미옥(美玉)이 많이 나오기 때문이었다.

시황의 무덤은 천광(穿壙)할 때에 70여만명을 동원 하였으며, 무덤안에는 여러 가지 이상한 보물을 간직함은 물론이오, 수은으로 강과 바다를 만들기도 하였으며, 금은으로 오리와 학을 만들어 기계로 오락가락하게 하였으며, 또 사람이 가까이 오면 저절로 화살이 발사되는 장치를 하여 누구나 근접하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자식없는 후궁들은 전부 순장하고, 내부시설을 한 장인들도 그 시설을 세상에 알릴까 봐 전부 그 속에서 죽여 버렸다고 전하여지고 있는데 무덤의 크기는 높이가 50장, 주위가 5리나 되었다고 한다.

2세 황제인 호해는 나이가 21세로 조고의 공작으로 황제가 되었으니만치 언제나 조고를 가장 가깝게 하는 동시에 모든 정치를 조고에게 맡기고, 조고 역시 호해에게 아첨하는 동시에 법을 가혹하게 운용하여 자기의 지위를 더욱 굳혀갔던 것이다. 그런데 다만 이사가 있기 때문에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경우가 있어 먼저 이사를 제거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이사는 본래 초나라에 태어나 순자의 문하에서 공부한 사람으로 언제인가 변소에 갔더니 그곳 쥐는 더러운 것만 먹고 사람을 보면 자주 놀래어 달아나기만 하는데, 창고엘 갔더니 그 곳 쥐는 사람을 겁내는 일도 없고 깊숙이 들어박혀 배부르게 맛있는 곡식만 먹고 있는 것을 보고, 쥐는 마찬가지 쥐인데 어떤 놈은 편안히 잘 살고, 어떤 놈은 잘 먹지도 못하면서 놀래기만 하니 그 이유는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처할 탓에 달렸으니, 사람도 이와 같아 좋은 곳에 처하면 잘 되고 나쁜 곳에 처하면 못될 것이 뻔하니 무엇보다 좋은 곳에 처해야 되겠다 하고 즉시 시골을 떠나 진나라 서울로 가서 길을 밟아 벼슬이 차츰 높은데 올랐던 것이다. 그 후 진나라에는 축객령(逐客令)이 내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다른 나라 사람은 모두 쫓겨나게 되었는데 그때에도 그는 저 유명한 「상진황축객서(上秦皇逐客書)」라는 글을 지어 시황을 감동케 하여 쫓겨나지 않음은 물론이오, 시황의 신임을 더욱 얻어 승상이 되는 동시에 통일사업과 문물제도의 개혁에 큰 공을 세웠던 것이다. 그러나 일을 너무 가혹하게 처리하여 백성의 원망을 사기도 하였는데 순자의 문하에서 같이 공부하였던 한비자가 자기보다 우수한 것을 알고, 그 후 한비자가 진나라에 왔을 때에 임금에게 음해하여 잡아가두는 동시에 제멋대로 사약을 주어 그를 죽이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사가 그만 조고의 모하에 걸려들게 된 것이다. 그것은 시황이 죽은 후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맨처음 진승(陳勝), 오광(吳廣) 등은 기(蘄)에서, 항양(項梁)과 항적(項籍)(項적) 등은 강동인 오에서, 유방은 패(沛)에서 각각 기병하여 온 천하가 어지럽게 되었다. 조고는 임금인 호해에게 대하여 이렇게 나라가 어지럽게 된 것은 이사가 승상으로서의 책임을 제대로 못한 것은 물론이오, 삼천군수로 가있는 그의 아들 이유가 진승등 적과 내통하여 있다고 허위로 이유를 만들어 일가족과 함께 모두 잡아 죽였던 것이다. 이 때에 이사는 자기의 작은 아들을 돌아보며 「내가 부귀공명은 고사하고, 이제는 고향에서 누런 사냥개를 데리고 토끼사냥이나 하고 싶은 마음이 있은들 어찌 이것이 가능하겠는가」하고 비참하게 최후를 마쳤던 것이다.  

이사를 죽인 조고는 호해마저 죽이고 나라를 빼앗을 작정으로 먼저 한 가지 시험을 하였다. 그것은 모든 신하들이 호해를 따르는가 또는 자기를 따르는가를 알아보기 위하여, 일부러 사슴 한 마리를 바치면서 이것은 말이라고 하였다. 호해는 웃으면서 이것은 분명 사슴인데 왜 말이라고 하는가 하고 두 사람은 서로 「말이다 사슴이다」하고 우겨댔다. 그리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물어보아 말인지 사슴인지 판단 짓기로 하였다. 그러나 신하들은 조고의 위세에 눌리어 사슴인줄 뻔히 알면서도 양심을 속여 조고의 편에 들어 말이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어서 그저 묵묵부답으로 있기도 하였다. 그래도 정직한 사람은 사슴이 틀림없다고 솔직하게 대답한 사람도 더러 있었다. 조고는 이런 사람들을 눈여겨 봐뒀다가 그 후 자기 의견에 반대한 사람은 모두 잡아 죽였다. 이것이 유명한 「지록위마(指鹿爲馬)」라는 말이 생겨난 동기인데 이쯤 되고보니 인심은 극도로 공포에 휩싸여 있고 조고의 위세는 황제인 호해를 누르게 되었다.

드디어 조고는 자기의 사위인 함양령염락(咸陽令閻樂)과 동생인 조성등과 공모하여 호해를 없애기로 하였다. 먼저 적이 쳐들어오니 막아야겠다고 거짓 꾸며대어, 사위인 염락(閻樂)을 시켜 군사 천 여명을 이끌고 엉뚱하게도 호해가 있는 망이궁을 포위하였다. 호해를 모시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도망가 버리고 오직 한사람만이 남아 있었는데 호해는 그 사람에게 물었다. 「왜 이런 기미를 미리 알려주지 않았느냐」고. 그러나 그 사람의 대답이 아주 걸작이었다. 「제가 미리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껏 목숨이 붙어있지, 미리 말 하였더라면 벌써 죽은지 오랬을 것입니다」라고. 호해는 아무리 성을 내고 아무리 안타까워했지만 이제는 별도리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염락에게 향하여 승상 조고와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일언지하에 거절당하였다. 그러면 황제의 자리를 내놓을 터이니 한 고을의 왕이나 되게 해달라고 하였지만 안된다고 하였고, 그러면 만호가량 되는 지방에 제후로나 있게 해달라고 하였지만 역시 안된다고 거절당하였다. 마지막에는 할 수 없이 그러면 일개 평민으로 처자와 함께 목숨이나 살려달라고 애원하여 보았지만 염락은 이것마저 안 된다고 거절한 후 「나는 승상의 명령을 받아 너의 목을 베러 여기에 왔다」고 하지 않는가. 호해도 이제는 할 수 없었던지 그만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던 것이다.

이에 조고는 여러 대신과 공자(公子)들을 불러놓고 「시황제 때에는 천하를 통일하였기 때문에 황제라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각국이 모두 자립하여 진나라는 더욱 작아졌으니만치 이름뿐인 황제보다도 옛날과 같이 왕으로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한 후 호해의 형의 아들인 공자 영을 진왕으로 정하기로 하고 호해는 평민장으로 하였는데 호해가 임금의 자리에 있은지 경우 3년, 그 후 조고는 공자영(公子嬰)에게 찔려죽고 그의 삼족도 전멸을 당하였으며, 공자 영도 왕이 된지 46일 만에 진군을 격파하고 관중에 들어온 패공(沛公)에게 항복하고 말았는데, 항우가 함양에 들어와서는 공자 영과 제공자 빛 종족들을 모조리 죽이고, 각종 보물을 탈취하였으며, 아방궁을 위시한 모든 궁실에는 불을 질러 그 불길이 석 달 동안이나 계속되었다고 하며, 진시황의 무덤도 항우에게 무참히 발굴되어 진나라는 여기에서 망해버리고 만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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