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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한국전쟁

[6.25 전쟁] 제3차 대전의 시작과 끝(제2의 한국전쟁)

by 청풍명월7 2023. 9.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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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의  용어 정의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38선을 넘어 불법 남침함으로써 일어난 전쟁을 '6·25전쟁'이라고 부른다. 과거에는 '6·25사변', '6·25동란','한국전쟁' 등 여러 용어가 혼용되어 왔다. 하지만 2004년 4월 교육인적자원부가 학계 전문가들의 감수를 거쳐 교과서 편수 용어를 확정한 이후에는 '6·25전쟁'이 사실상 공식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현재는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은 물론이고 국방부가 간행하는 각종 공식간행물에서도 원칙적으로 '6·25전쟁'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국어사전에서는 일반적으로 '사변' '전쟁 상태에 이르지는 않았으나 경찰이상의 무력이 사용되는 난리' 혹은 '선전포고도 없이 침입하는 일' 등 두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소개한다. 

   후자의 의미에서는 '6·25사변'이라는 표현이 틀린 것은 아니나 전자의 의미에서는 적합하지 않으므로 '6·25사변'이란 표현은 부적합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동란은 폭동·반란·전쟁 따위가 일어나 사회가 질서를 잃고 소란해지는 것을 의미하므로 전쟁 그 자체를 지칭하는 용어는 아니다. 

 '한국전쟁'이란 용어의 경우 한국에서 벌어진 수많은 전쟁 중에 유독 '6·25전쟁'만을 '한국전쟁'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견해 때문에 교과서 용어로 채택되지 않았다. 하지만 외국에서는 여전히 '한국전쟁'(Korean War)'이 일반적인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6.25전쟁전개과정

6.25전쟁은 1950년 庚寅年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개시되어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성립되기 까기 만 3년 1개월 2일간 계속되었다.
그 동안 쌍방은 38도선을 각각3회씩이나 넘나들면서 남으로는 낙동강
북으로는 압록강까지 오르내리며, 전 국토의 80%에 달하는 지역에서
전투를 전개하였다. 6.25전쟁은 크게 4단계로 구분 할 수 있다.  

첫째 단계는 북한군이 38도선을 돌파하여 낙동강까지 이르렀던 북한군 남침기 이다.

북한군 남침시기


둘째 단계는 한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전선으로부터 38도선을 넘어 압록강변의 초산까지 진격하였던 유엔군 반격 및 북진기이다.

유엔군반격 및 북진시기


셋째 단계는 중공군의 개입(1950.11.25일)과 더불어 단행된 공산군의 대공세를 유엔군이 평택-제천-삼척을 연결하는 선까지 후퇴한 다음 재반격 작전으로 38도선을 회복하게 되는 중공군 침공 및 유엔군 재반격기이다.

중공군침공 및 재 반격시기


넷째 단계는 휴전회담 진행과 더불어 38도선 부근에서 공방전을 전개했던 전선교착전기이다.

전선교착시기



6.25전쟁의 참혹함

우리 조국 대한민국이 일본의 식민통치로부터 해방되면서 남북으로 나누어지면 당시 이땅에 살았던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광복의 감격과 더불어 국통분단의 설움을 함께 격었다.

38선

 

38선


 

왕래가 막혀버린 조국


그리고 숨 돌림 틈도 없이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게 되었다.

전 국토의 90%이상이 전화에 휩싸이면서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나 전쟁터에서 또는 피난 중에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기대어 살 수 있는 생활터전도 없이 울어도 흘러내일 눈물조차 말라 버렸던 시절이었다.

 

북한군 모습
살육당한 사람들
죽은 시신이 널려 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세월이 흘러 그 당시로는 잊을래야 잊을 수 없을 것 같던 일들도 이제는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희미해져 가고 있다. 화약연기 자욱했던 산하 , 포성도, 비행기와 탱크의 굉음도, 돌격의 함성도, 깨어진 철모, 찢어진 군화, 마치 연극이 끝나고 막이 내린 무대처럼

부상당한 사람을 치료하는 모습



전쟁과 함께했던 사연을 들춰내는 것도 쉽지 않게 되었다. 그 때의 다급하고 비참하고 허기지고 고달팠던 사정은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거의 상관없고 앞으로도 상관없을 것으로 보여지게 되었다.

피난하는 사람들

전쟁을 체험한 세대와 그렇지 못한 세대들 몸서리 처지도록 고생해 보았던 세대와 그렇지 못한 세대들 그래서 이들 상의 생각의 차이, 의식의 차이가 세대간의 갈등이 되고 있는 현실이다. 수 많은 사람이 피흘려 싸운 6.25전쟁의 명분조차도 의심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미국, 벨기에,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필리핀, 남아프리카공화국, 태국, 터키, 그리스,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뉴질랜드, 콤롬비아, 에티오피아, 프랑스, 영국(16개국)


16개 나라에서 수많은 젊은이 들이 대한민국에 와서 목슴을 바쳤다.

1950년, 1951년,1952년,1953년 동안 벌어진 전쟁은

1953년 7월 17일 휴전협정을 통해서 전쟁의 막을 내렸다.

 

 

전쟁의 상처가 잊쳐지고 경제발전을 이룩한 대한민국에 여전히
북한의 위협이 되고 있다. 아직도 무력으로 통일하려는 야욕을 멈추지
않고 있다.


 다가오는 위협(상씨름)

북한의 비공개 특수부대 인원이 3만명에 달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공개전력 외에도 정찰총국, 적공부(敵工部), 노동당 225국(옛 대외연락부), 보위부 등에 해킹, 암살, 심리전을 담당하는 비공개 전력이 추가로 더 있다는 것이다.

김성민 북한인민해방전선(북민전) 대표는 27일 휴전 협정일을 맞아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연 기자회견에서 "북한은 특수부대 11만명을 포함해 16만5천명의 대남 테러 전력을 갖추고 적화무력통일을 노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김 대표는 이날 "북한의 대남테러 전력은 특수부대인 경보지도국 11만명과 해상·항공 저격 4개 여단 4만명, 전자테러병력 1만명, 정찰총국 정찰대대 5000명 등 16만5000명"이라며 이들은 `내부 교란과 혼란 조성으로 (한국의) 국가이미지 실추' `국가지휘체계를 마비시켜 적화무력통일 국면 조성' 등을 임무로 한다고 말했다.

박영철 북민전 부장은 북한의 29해상저격여단에 대해 "유사시 전투 병력이 아닌 비공개 타격을 전문으로 하는 특수작전 부대로 3천여명의 병력"이라며 "신장 166㎝, 체중 55㎏, 시력 1.2이상의 성분이 우수한 자원을 뽑아 1년간 신병교육을 하며 정신교육과 군사교육을 시킨다"고 말했다.

남북이 전시상황에 돌입하면 북한 특수전병력은 개전초부터 지상, 해상, 공중으로 침투되며 동시에 최대 2만 6000여명이 침투될 수 있다. 해상으로는 공기부양정, 고속상륙정, 잠수함을 이용해 최대 2만명, 공중으로는 AN-2기, 헬기, 수송 등을 통해 최대 6000여명을 침투시킬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특히 특수전부대가 아군복장이나 민간인으로 가장해 활동때에는 피아식별의 어려움으로 많은 혼란이 발생할 것으로 보인다.

북한군 특수전부대 출신 귀순자들은 현재 북한군 특수전 요원들이 한국의 중요시설 90% 이상을 침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고 증언한 것으로 알려졌다.


앞으로 대한민국과 북한은 어떻게 될 것인가?
어쩌면 북한은 대한민국의 큰 위협이 될 수 있다.
여러분의 생각을 댓글에 적어 주시기 바랍니다.
대한민국의 미래가 전쟁이냐! 평화냐!

대한민국에 벌어진 6.25전쟁은  위 내용에서 보듯이 제2차세계대전의 승전국인 미국과 러시아의 대리전쟁이었다. 냉전시대에 자기 세력을 확대하려는 국제전쟁이며 제3차세계대전이다. 그런데 그 이후에도 인도차이나 반도 전쟁(베트남 전쟁), 중동전쟁(아프카니스탄전쟁, 이라크, 시리아내전등)도 미국과 러시아의 대리전쟁이다. 이번에 벌어지고 있는 우크라이나 전쟁도 바로 러시아가 직접 참전하는 전쟁이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제3차 대전은 6.25전쟁으로 시작하여 전세계를 돌고 다시 한반도 몰려오고 있다.
그 전쟁 제3차세계대전도 한반도에서 그 시비의 싸움이 마무리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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