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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

[국내여행]임경업 장군 묘소

by 청풍명월7 2024. 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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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전쟁중이다.
유럽과 중동에서 매일 매일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다.
인류의 역사에서 전쟁은 일상이었다. 우리나라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육이오전쟁등 많은 전쟁이 있었다. 민족과 국가를 지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국방력이 없으면 불가하다. 병자호란의 인물중 임경업장군이 있다. 그 분의 묘소가 충주에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林慶業장군(1594년~1646년)
풍동에는 상풍과 하풍이 있다. 아래쪽에 있는 마을인 하풍마을에 표지판이 보인다.

 

산으로 올라가는 곳에 표지판이 있다.

 

정상에 올라보니 달천들판이 보인다.

 

봄 나물이 파릇 파릇하다.

 

임경업 장군묘소 소개글이 있다.

장군의 시가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발산력 개세기(拔山力 盖世氣)는  초패왕(楚覇王)의 버금이요.
추상절 열일충(秋霜節 烈日忠)은  오자서(伍子胥)의 위로구나.
천고산 늠름장부(凜凜丈夫)는       수정후(壽亭侯)인가 하노라.

산을 뽑을 기운과 세상을 뒤엎을 기상은 항우의 다음이요. 
서릿발 같은 절개와 햇빛같이 뜨거운 충성심은 오자서보다 낫도다. 
오랜 세월에 걸쳐 장부로서 숭배할 사람은 관운장인가 하노라.

정상에 낙낙장송이 늠름하게 서 있다.

 

주차장에 비석이 있다.

 

모역정화 기념비가 있다.
묘소에 왔다.

 

잘 정비되어 있다.

 

시립장수가 좌우에 있다.

 

비석글이 있다.

 

밤에 보면 사람이라고 생각되겠다.

 

명당에 잘 보셔져 있다.

임경업장군은
조선의 무관이자 외교관이다. 명청교체기에 명나라를 위해 여러 활약을 벌였으나, 조선의 정쟁에 휘말려 사망했다.

위에 있는 그림은 현재 남아 있는 임경업 장군의 영정이다. 그런데 이 영정도 그림 주인공의 일생처럼 명나라와 조선의 교집합을 보여준다. 전언에 따르면, 1640년 숭정제가 임경업의 얼굴이 보고 싶다고 해서 명나라 화공이 조선에 와서 그려갔다고 한다. 당시는 임경업이 명나라와 짜고 가짜 전투를 했던 그 시기이다.

이때 화공이 2장을 그려서 한 장은 명나라로 가져가고, 한 장은 조선에 남기고 갔다고 전한다, 현재의 그림은 임경업 사후 다시 그려진 것이다. 우측에 기재된 <충민공 임장군 유상>이라는 표제도 그렇고, 그림체에 조선 후기의 특징과 명나라 화풍의 특징이 많이 묻어난다고 한다. 여담으로 흉배가 아주 특이하다. 이것은 인조 때에 공이 있다고 판단한 무신들에게 특별히 하사한 것으로, 본래 호랑이와 곰 등 동물을 주로 한 것과는 달리 구름과 방사형등 도상적 이미지가 강하다.

1594년 12월 13일 충청도 충주목 남변면 달천촌에서 절충장군(折衝將軍) 행(行) 충무위 부사직(忠武衛副司直)과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을 지낸 임황(林篁)의 7형제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 전쟁놀이를 좋아했는데 하루는 아이들을 모아 놓고 군사놀이를 하는데 군기를 날리며 돌로 성을 쌓고 대전을 하는 도중 때마침 경주에 도임하는 윤진이라는 신임목사가 지나가다가 길을 막아 놨으므로 길을 피하라고 호령을 했다. 임경업은 사람이 성을 피하는 법이지 성이 사람을 피하는 도리가 있느냐 하였다. 이에 윤진 목사는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으로 짐작하고 길을 돌아갔다고 한다.

1620년 종9품 소농보 권관(小農堡權管), 1622년 첨지중추부사를 거쳐 1624년 정충신 휘하에서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진무원종공신 1등이 되었다. 이후 우림위장방답진 첨절제사 등을 지냈으며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좌영장으로 병력을 이끌고 강화도로 나갔으나 이미 화의가 성립된 후였다. 1628년 김류에게 선물을 보낸 것 때문에 탄핵을 받는다. 간원의 언급에 의하면 천얼(얼자) 출신이라고 한다.

1630년 평양 중군으로 검산성과 용골성을 수축하는 한편 평안도 철산군 가도에 주둔한 명나라 도독 유흥치의 군사를 감시해 준동을 막았다. 당시 상황을 설명하면 청군의 요동 공격을 막지 못하고 조선으로 탈출한 모문룡이 압록강의 가도에 주둔한 이래 그가 이끄는 '모군(毛軍)'은 청나라 견제를 위해 조선을 수탈하여 군자금을 마련했다. 인조반정으로 정통성이 취약했던 조선 조정에서는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의 도움을 받은 점 때문에 강경한 대응을 할 수 없었다. 반면 청나라 입장에서는 배후의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서 모문룡의 제거가 필요했다. 이는 2번에 걸친 호란의 배경이 되었다.

이후 모문룡은 원숭환에 의해 제거되지만 모군은 그대로 남아 진계성이 이어받았다가 진계성을 유흥치가 제거하고 그가 수장이 되어있던 상황이었다. 유흥치는 모문룡과 별다를 것 없던 인물로 1만의 조선 양민들을 죽여서 청군의 목이라 위장하여 명나라 본국에 보낸 자였으며 오히려 잔악한 양민 학살을 보다 못한 청군이 나서서 이들을 물리쳐 구해주기까지 했다고 한다.

1631년 산성을 수축하던 중 정묘호란으로 허약해진 군사력 등의 이유로 청천강 이북의 방어를 포기하려던 조정의 정책에 반감을 품고 청북인들의 반발을 사주하였다는 이유로 탄핵받고 구금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1633년 청북 방어사 겸 영변부사로 백마산성과 의주성을 수축했다. 이 시기에 경중명과 공유덕 등 명나라의 장수들이 후금에 투항하려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의주부윤 윤진경과 함께 명나라 대도독에게 연락하여 합동 공격을 벌였는데, 이 공로로 명나라로부터 총병 벼슬을 받았다. 이 사건은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1634년 의주부윤으로 청북 방어사를 겸임할 때 백마산성 수비에 자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조정에서 은 1천 냥과 비단 100필을 지원받았다. 이를 자본으로 삼아 중국 상인과 밀무역을 하여 자본을 축적하고 둔전을 유지하였으므로 공로를 인정받아 가선대부에 올랐다. 하지만 지나치게 이재를 축적하고 상층부에 뇌물을 제공하였다는 이유로 탄핵되어 파직당한다. 하지만 도원수 김자점의 적극적 요청으로 다시 가선대부가 되어 성곽 보수에 나선다.

임기응변에 능한 병사들을 뽑아 청나라인으로 변장시켜 청나라의 수도 심양에 잠입시켜서 첩보 활동도 벌였다는 일화도 있다.

병자년 정월, 임경업은 의주부윤으로 다시 임명되었다. 의주로 돌아온 이후 청나라의 침공이 임박한 것을 감지하고 2만 병력을 내려줄 것을 비변사에 건의했지만, 비변사는 오히려 의주에 배치되었던 부방(赴防) 1600명을 안주로 이동시켜 청천강에서 저지선을 구축하려는 작전계획을 세웠다. 그나마 도원수 김자점이 의주를 지키려는 임경업의 의지를 높이 평가하여 지원했다.

그의 지원에 힘입어 기존의 부방군이 안주로 이동하는 대신 황해도의 부방군 2400명이 의주에 추가로 투입되었다. 이로써 당시 임경업이 거느린 병력은 의주의 장정 2300명과 황해도 부방군 2400명 그리고 기타 의주부 직속 아병(牙兵)과 인근 진보의 병력을 합쳐 5천 명에 달했다. 이제 임경업은 백마산성을 지키는 데 충분한 병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병자호란 당시 임경업 휘하에 고작 300~400명밖에 없었다.'는 설이 널리 퍼져 있지만, 이는 사료에서 근거를 찾을 수 없다.

임경업은 또한 사람을 모집해 압록강 이북에 있는 송골산(松鶻山)과 봉황산(鳳凰山)에 정찰조를 투입해 연락망을 설치했다. 이들은 밤이면 횃불을 들고 낮이면 총포를 쏘는 것으로 의주에 연락을 보냈으며, 일반적인 봉수신호 체계에 따라 아무런 일도 없으면 1거, 적의 움직임이 있으면 2거, 적이 국경을 넘으면 3거, 적과 접전이 벌어지면 4거, 적의 대군이 들을 뒤덮으면 5거를 보내도록 했다. 이 연락망은 의주에서 평안도를 종단하여 도원수 김자점이 있는 황해도 황주까지 곧장 연결되어 있었고, 병자호란 초기에도 정상적으로 작동했다.

하지 않은 의주의 백마산성 공략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우회해 버렸다. 결과적으로 임경업은 병자호란 및 대청전선에서 거의 활약을 하지 못했다. 임경업은 전쟁기간 내내 백마산성에 주둔했지만, 청군의 보급로를 끊지 못했으며, 청군은 한성까지 파죽지세로 돌진하여 강화도를 함락시키고, 남한산성을 포위, 삼전도에서 인조의 항복을 받아낸다.

이렇게 방비를 철저히 했다는 지호집의 이야기도 있지만, 청군은 전략적으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의주의 백마산성 공략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우회해 버렸다. 결과적으로 임경업은 병자호란 및 대청전선에서 거의 활약을 하지 못했다. 임경업은 전쟁기간 내내 백마산성에 주둔했지만, 청군의 보급로를 끊지 못했으며, 청군은 한성까지 파죽지세로 돌진하여 강화도를 함락시키고, 남한산성을 포위, 삼전도에서 인조의 항복을 받아낸다.
청군은 삼전도 강화의 조건으로 조선의 왕자들을 볼모로 삼아 심양으로 압송하고 있었는데, 강화가 맺어치고 이렇게 본국으로 철수하는 부대중에 청태종의 조카, 즉 누루하치의 손자인 요퇴(要魋)가 지휘하는 청군 300명을 공격해 포로로 잡혀가던 조선인들 120명을 구했다. 이것이 사료에 나온 임경업의 유일한 대청군공이다. 이것이 뻥튀기가 되어 요퇴를 참살했다는 기록이 나오기도 하지만, 임경업의 행적이 신화화되면서 나타난 전설일 터이다. 요퇴는 멀쩡히 살아서 그 이후에도 활동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누르하치는 아들만 13명이 넘거니와 손자는 더 많기 때문에, 임경업이 정말로 요퇴를 참살했더라도 요퇴는 중요한 인물은 아닐 것이다. 이런 전설은 삼전도의 치욕을 겪은 조선인들의 정신승리의 일종으로, 박씨전에서 병자호란 이후 철군하는 용골대를 임경업이 대패시켰다는 창작이 가미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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