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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증 배달국사(역사)

[펀글]태백산과 단군사적에 관한 단상

by 청풍명월7 2017. 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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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산과 단군사적에 관한 斷想

                                  김 윤 우

/인산산악회장· 전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전문위원

 

머리말

 

 우리나라 명산 중에서 본명 또는 그 일명으로서 고대시절부터 태백산으로 불리어진 산으로는 한반도 북계의 백두산과 평안북도 영변 일대의 묘향산과 강원도의 태백산을 들 수 있다.

 

상고시대의 태백산은 국조 단군(檀君)의 발상지로서 단군사화에 등장하는 우리 민족의 성산(聖山)이다. 때문에 위의 세 산 모두 상고시대 단군사적과 관련되어 언급되어지고 있는 산들이다.

 

 이 중 백두산과 묘향산은 단군의 발상지로 언급되고 있고, 강원도 태백산은 단군이 천제를 올리던 제의처(祭儀處)의 한 산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단군의 발상지로서의 민족의 성산은 위의 세 산 중 한 산일 것이므로 이 중 어느 산이 과연 상고시대 단군사화에 등장하는 태백산일지 그 사실여부가 문제시된다. 그리고 강원도 태백산도 조선시대까지의 문헌사료상에서는 단군시대의 제의처로서 구체적으로 언급된 바 없어 현재의 태백산정에 있는 천제단(天祭壇)도 과연 단군시대의 제단유적인지 문제가 제기된다.

 

 필자는 일찍부터 위에 제기되는 문제점에 관하여 탐구적인 관심을 가져왔고, 그러한 관심의 일환으로 북한의 묘향산은 어쩔 수 없어 올라보지 못하였으나, 백두산 천지에도 올라 보았고, 강원 태백산에도 두어 차례 올라가 본적이 있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이에 관한 문헌자료도 틈틈이 조금씩 살펴본 바 있다.

 

본고에서는 이에 단군사적과 관련한 태백산에 대하여 그동안 틈틈이 살펴보면서 느낀 단편적인 생각들을 정리하면서 고금을 통하여 일관되게 태백산으로 불리어오고 있는, 범상치 않은 영산의 산 이름으로 여겨질 수도 있는 강원 태백산을 중심으로 그 산 이름과, 단군사적지로서의 태백산에 관한 여러 문제점을 개략적으로 한 번 살펴보려고 한다.

 

 

태백산의 산봉 이름

 

 강원 태백산(太白山:1566.7m)은 고대부터 천제(天祭)를 지내온 민족의 영산(靈山)으로, 강원도 삼척시(三陟市) ‧ 태백시(太白市)와 정선군(旌善郡) ‧ 영월군(寧越郡) 및 경북 영주시(榮州市)와 봉화군(奉化郡)에 걸쳐 큰 산세를 이루고 있는 명산이다. 백두대간의 등줄기를 형성하며 큰 덩치를 지니고 주변 지역 모든 산의 제일 큰 어른처럼 자리하고 있는 장대한 산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봉화조에 의하면, 일찍이 고려시대 최선(崔詵)은 예안(禮安) 용수사기(龍壽寺記)에서 그러한 모습의 태백산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천하의 명산은 삼한(三韓)에 많고, 삼한의 명승은 동남쪽이 가장 뛰어나며, 동남쪽의 거산(巨山)으로는 태백을 으뜸으로 일컫는다”

 

 태백산이 얼마나 큰 산세를 이루고 있는 산인지는 강원도 정선의 정암사(淨岩寺)와 경북 봉화 ‧ 영주에 자리한 각화사(覺華寺), 부석사(浮石寺) 등 신라 명찰들의 일주문 현판에 그 주산을 ‘太白山’으로 표기하고 있는 예에도 잘 드러나 있다. 또 《삼국사기(三國史記)》 제사지(祭祀志)에서 태백산의 소재처를 내이군(奈已郡:현 榮州 일원)이라 언급하고 있는 것과, 《여지승람》에서 경상도 안동(安東) ․ 봉화 및 강원도 삼척의 관내 지역의 산으로서 태백산을 언급하고 있는 예에도 잘 나타나 있다.

 

 

 ‘太白山’이란 산 이름에 대해서는 이만부(李萬敷:1664~1732)의 《지행록(地行錄)》에 의하면 “산마루에 하얀 자갈이 마치 눈이 쌓인 듯 깔려 있기 때문에 ‘太白’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고 하였다. 후대의 김정호(金正浩:1804~1866?)도 “산이 다 하얀 자갈들이라, 이를 바라보면 마치 흰 눈이 쌓여 있는 것 같다. 산 이름 ‘태백’은 이 때문이다.(《대동지지》안동조)”라고 하여, 같은 견해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이들보다 앞서 일찍이 미수(眉叟) 허목(許穆:1595~1682)이 언급한 견해로, 미수의 <태백산기(太白山記)>에 의하면, 그 산봉우리를 문수봉(文殊峯)으로 언급하고 있다.

지금의 문수봉 산정의 너덜지대 위에는 현금에 이르러 쌓은 삼각형 돌탑이 있는데, 미수가 언급한 문수봉은 태백산의 가장 높고 큰 봉우리로, 북쪽으로 두타산 ․ 보현산(선자령 일대의 산)과 이어져 있다고 한 것을 보면 현 문수봉(1515m)이 아닌, 영봉(1561m)을 지칭한 것이 아닐까 한다. 태백산의 영봉 또는 장군봉(1567m)도 근대에 제단을 쌓기 이전의 조선시대에는 영봉 남동쪽의 문수봉과 같이 큰 돌밭지대를 이루고 있지 않았을까 한다.

 

그러나 ‘太白山’은 대체로 ‘크게 밝은 산’이란 의미의 ‘한 밝뫼’ 또는 ‘한밝달’을 소리옮김, 뜻옮김하여 혼용표기한 것으로 본다. ‘한밝달’은 ‘한백달 →한배달’로 전음(轉音)되어 ‘한민족’ ‧ ‘배달민족’과 같이 우리 민족을 상징적으로 일컫는 민족 이름이 되었다.

예부터 우리 민족은 태양을 숭배하는 ‘밝은 민족’으로 하늘에 제사(祭祀)지내는 풍습이 있었으며, 그 제사지내는 산을 ‘밝은 산[白山]’이라 하였다. ‘밝은 산’ 중에서도 가장 크게 밝은 산인 한밝뫼가 바로 태백산인 것이다.

 

 태백산의 최고봉은 현재 장군봉(1566.7m)이라 일컫고 있고, 천왕단이 있는 영봉(靈峯:1560.6m), 그리고 그 남쪽의 부소봉(1546.5m)과 부소봉 동쪽의 문수봉(1517m)이 이 산의 대표적인 봉우리들이다.

 그런데 태백산 북쪽의 함백산(1572.9m) 등 더 높은 봉우리들이 태백산권에 자리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현재 천제단이 있는 산봉이 태백산의 주봉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을 보면 옛날 선인들은 지금과 같이 정밀하게 산 높이를 잴 수 있던 시절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곧 이만부의 《지행록》에 의하면, 태백산의 산봉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문수(文殊) ․ 대박(大朴) ․삼태(三台) ․ 우보(牛甫) ․ 우검(虞檢) ․ 마라읍(摩羅邑:말읍)의 봉우리들이 6 ․ 7백리를 울창하게 서리어 있다.”

 

 위의 대박봉 곧 대박산(大朴山)은 ‘한밝달(한밝산)’의 차용표기로, 전음(轉音)되어 현재는 ‘함백산(咸白山:1572.9m)’으로 불리어지고 있다.

 

 함백산 북서쪽 기슭에는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의 하나가 자리하고 있는,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 14년(645)에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한 정암사(淨岩寺)가 있다. 이 절로 인해 함백산은 《동국여지승람》 정선군조에 의하면, 정암산(淨岩山)으로도 불리었고, 《삼국유사》의 대산월정사 오류성중(臺山月精寺五類聖衆)조에 의하면, 묘범산(妙梵山)으로도 불리었다.

 태백산은 또 《택리지(擇里誌)》의 복거총론(卜居總論) 산수(山水)조에 의하면 작약봉(芍藥峯)으로도 불리었다. 또 《동국명산기(東國名山記)》에 의하면, 함박봉 곧 함박산(含朴山) 속칭 모란봉(牧丹峯)으로도 불리어졌다.

 

 《향약채취월령(鄕藥採取月令)》 〮《향약집성방언해(鄕藥集成方諺解)》에 의하면, 작약(芍藥)의 향명(鄕名)이 ‘大朴花(대박화:함박곳→함박꽃)라 하였다. 그렇다면 지금의 함백산은 ‘한밝달’이 한박산[大朴山]→함박산→함백산으로 전음되어 불리어지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또 《동국명산기》에 의하면, ‘함박(含朴)’은 속칭 ‘모란[牡丹]’이라고도 한다고 하였다. ‘모란(牧丹:牡丹)’ 은 곧 작약과에 속하는 낙엽활엽관목이므로 조선시대에도 함박을 속칭 ‘모란’ 이라고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함백산이 또한 ‘모란산’ 또는 ‘모란봉’ 으로도 불리어 진 것으로 보인다.

 또 태백산사고지(太白山史庫址)와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창건한 각화사(覺華寺)가 자리한 태백산 자락의 산봉우리는 각화산(覺華山:1176.7m), 의상조사(義湘祖師)가 창건한 부석사(浮石寺)가 자리한 태백산 줄기의 산봉우리는 봉황산(鳳凰山)으로 불리어졌다.

 

 태백산은 고금을 통하여 일관되게 ‘태백산’으로 불리어 왔으나, <정암사사적기(淨巖寺事蹟記)>에 의하면 그 일명으로서 ‘대여산(黛輿山)’이라 일컬은 예도 있다.

 

 

 

태백산의 제의사적

 

 예부터 우리민족은 가장 크게 밝은 산인 한밝뫼 곧 태백산을 신성한 곳으로 여기고 그 꼭대기에 제단(祭壇)을 쌓고 봄 ‧ 가을로 하늘에 제사지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신라에서는 이미 일성왕(逸聖王) 5년(138) 10월에 왕이 북방에 순행(巡行)하여 태백산에 제사지낸 일이 있고, 기림왕(基臨王) 3년(300) 3월에는 우두주(牛頭州:춘천)에 이르러 태백산에 망제(望祭)를 지낸 일이 있다.

 또 《삼국사기》 제사지에 의하면, 신라에서는 태백산(太白山)을 사전(祀典)에 올리고 오악(五岳)의 하나인 북악(北岳)으로 삼아 중사(中祀)를 지내왔다. 이에 의하면, 신라에서는 이미 2세기 초엽부터 태백산에 천제(天祭) 또는 산신제(山神祭)를 지내왔음을 살필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 삼척부(三陟府} 태백산사(太白山祠)조에 의하면, 그러한 제의(祭儀)의 전통은 조선시대까지도 이어지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그 내용을 조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태백산사는 산꼭대기에 있는데, 세간에서 천왕당(天王堂)이라 한다. 본도(本道:강원도) 및 경상도에서 이 산 곁 고을 사람들이 봄 ‧ 가을로 이곳에서 제사지내고, 신좌(神座) 앞에 소를 매어 두고는 갑자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난다. 만약에 이를 돌아볼 것 같으면 신(神)이 불공(不恭) 한 것을 알고 죄를 준다고 한다. 사흘이 지난 다음 부(府)에서 그 소를 거두어 이용하는데, 이러한 풍속을 이름하여 ‘퇴우(退牛)’라고 한다.”

 

 위의 태백산제에 관한 내용을 보면, 상고시대 이후 고대시절에는 태백산에서 천제를 지내온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으나, 이후 통일신라시대로 내려오면서 태백산을 사전(祀典)에 올리고 오악의 하나로 삼아 중사를 지내게 된 이후로는 산신제(山神祭)로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곧 《삼국사기》 제사지는 신라 때 전국의 명산대천신(名山大川神)에게 제사를 지내던 명산대천을 사전(祀典)에 올려 언급한 것이므로, 신라 때 중사를 지내던 태백산은 곧 태백산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전국 명산의 하나로서 언급된 것이라 하겠다.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산신제가 음사(淫祠)에 관한 제의의 풍속으로까지 변질되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허목(許穆:1595~1682)의 《기언(記言) 권37》, 척주기사(陟州記事) 퇴우(退牛)조에 의하면, 그러한 미신의 폐단을 보다 못한 당시의 산승(山僧) 충학(沖學)이 태백산사를 불태워 버렸으며, 이후로는 이곳 산신에게 소를 바치는 일이 없어졌다고 하였다.

 다산(茶山)의 《목민심서(牧民心書)》, 예전육조(禮典六條) 제사(祭祀)조에 의하면, 이보다 조금 앞선 시기에도 영남관찰사(嶺南觀察使)로 있던 김치(金緻:1577~1625)에 의해 태백산 신사(太白山神祠)가 미신적 폐단으로 인해 헐린 일이 있었음을 살필 수 있다.

 《여지승람》의 태백산사 이야기는 성현(成俔:1439~1504)의 《허백당집(虛白堂集) 권12》 신당퇴우설(神堂退牛說)에도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여지승람》의 내용은 아마도 이를 참조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태백산에서 천제를 지내던 풍속이 민간 풍속으로나마 겨우 명맥을 유지하며 전래되어 왔을지는 모르나, 그 제의의 풍속이 현대까지 이어왔다는 정사(正史)상의 분명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단군(檀君)을 숭상하는 대종교와 같은 종교적 신앙 차원에서, 그리고 민족주의적 차원에서 현대에 이르러 다시 부활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태백산 정상부 영봉(靈峯:1560.6m) 위에는 자연석 녹니편마암으로 쌓은, 둘레 27.5m,높이 2.4m, 좌 ․ 우폭 7.36m, 전 ․ 후폭 8.26m로 약간 타원형으로 된 20평 가량의 천제단(天祭壇)인 천왕단(天王壇)이 자리하고 있다. 위쪽은 원형이고 아래쪽은 네모꼴인데, 이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사상을 나타낸 구도이다. 그리고 앞쪽에 ‘天祭壇(천제단)’이라 쓴 석축 제단 위 중앙에 잘 다듬어지지 않은 투박한 한글 필체로 ‘한배검’이라 써서 새기고 하얗게 칠한 자연석 위패가 세워져 있다.

 

이는 대종교 교인들이 ‘한배달의 임검’ 또는 ‘한배달의 신(神)’이란 의미로 쓴 국조 단군(檀君)의 위패인 것으로 보인다. 이 비석과 비가 세워져 있는 지금의 모습과 같은 제단은 본래는 없었던 것으로, 예전에는 석단이 9단이라 하여 ‘구단탑(九段塔)’ 또는 ‘구령탑(九靈塔)’으로 불리던 것이 1955년 국군이 무장공비 토벌을 위해 제단 앞쪽에 헬기장을 닦으면서 헌 것을, 1960년대 후반 경에 대종교의 교인 우성조(禹聖祚) 옹 등이 국조 단군에게 제사를 올리기 위해 개축하고 세운 것이라 전한다.

 제단 전면에 천제단이라 쓴 큰 글씨 아래쪽에 ‘대종교 태백시지부(大倧敎 太白市支部)’라 써 놓은 것을 보면 대종교 태백시지부의 교인들도 제단 개축에 참여한 바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곳 영봉 북쪽 상봉인 장군봉에도 사각형으로 된 장군단(將軍壇)이란 천제단이 있고, 영봉 남쪽 아래쪽에도 하단(下壇)이라 일컫는 천제단이 자리하고 있다.

 

 이들 태백산 천제단, 특히 영봉의 천왕단이 현대에 와서는 마치 상고시대 단군의 유적지처럼 인식되기도 하나, 고대이래의 정사(正史)상의 기록이나 역대 지리지상에서 이곳 천제단을 명확히 언급한 예는 찾아볼 수 없다.

 이는 아마도 현금에 이르러 국조 단군을 숭상하는 이들이 민족종교적이며 민족주의적인 관점에서 예부터 천제를 지내온 강화도 마리산[摩尼山]의 참성단(塹城壇) 구조를 모방하여 축조한 것으로 추측된다.

 다만 신라 박제상(朴堤上:363~419)의 저술이 영해박씨(寧海朴氏) 문중에 비전되어 오다가 실전(失傳)된 것을 1953년에 박금(朴錦:1895~?)씨가 예전에 본 기억을 되살려 재생하였다는 《부도지(符都誌)》 따위에 다음과 같은, 유사한 제단의 모습을 언급한 내용이 보인다.

 

“혁거세씨(赫居世氏)는 천성은 신(神)과 같고 지혜는 성인(聖人)과 같았다…능히 여러 부족을 통솔하여 선세(先世)의 도를 행하며 제시(祭市)의 법을 부흥하고, 남태백산(南太白山)에 천부소도(天符小都)를 건설하였다. 중대(中臺)에 천부단(天符壇)을 축조하고 동서남북의 4대(臺)에 보단(堡壇)을 설치하여 계불(禊祓)의 의식을 행하였다.”

 

 이에 의하면, 태백산 천제단이 비록 단군시대의 문화유적은 아니라 하더라도 일찍이 신라 초에 축조된 천제단의 유적지로 전해온 것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신뢰할만한 금석문 사료나 정사류 문헌 사료상에서는 그러한 천제단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세종실록지리지》․ 《여지승람》 등의 삼척조 기록에 태백산정의 태백산사(太白山祠)의 이름을 ‘태백 천왕당(太伯 天王堂)’ 또는 ‘천왕당’이라고도 칭하였던 것을 보면 본래는 이곳이 고대시절부터 천제를 올리던 장소였던 것으로 추측해 볼 수는 있다고 본다.

 

 위의 자료보다 좀더 명확한 단군사적지의 기록으로 오해할 수도 있는 기록은 다음과 같은, 대종교의 2세 교주 김교헌(金敎獻:1868~1923 )과 박은식(朴殷植:1859~1925) 유근(柳瑾:1861~1921) 등 대종교의 석학들이 공동 집필한 것으로 일컬어지는 《단조사고(檀祖事攷)》 외편, 봉화유태백산사(奉化有太白山祠)조에서 찾아볼 수 있다.

“미수기언(眉叟記言)에 이르기를 ‘태백산(太白山)에 단군사(檀君祠)가 있다.’(眉叟記言曰, 太白有檀君祠)라고 하였다”

위의 기록에 의하면 미수 선생이 마치 강원 태백산에 단군사가 있었다고 말한 것처럼 단언하여 언급하고 있으나, 《미수기언》의 원전자료를 보면 위의 인용문은 원전의 산 이름 표기까지도 달리한, 역사왜곡의 소지가 있는 단장취의(斷章取義)적인 인용문이다.

곧 《미수기언》, 권32, 단군세가(檀君世家)조에 의하면, “태백산과 아사달산에는 다 단군사가 있다.(泰伯阿斯達, 皆有檀君祠)”라 하였다. 여기서의 태백산은 이어 언급한 아사달산과 함께 단군사화상의 상고시대 산 이름, 곧 묘향산의 고대 이름으로도 볼 수 있는 태백산을 이른 것이지 꼭 강원 태백산을 지칭한 것은 결코 아니다.

 

이 점은 《미수기언》의 단군세가를 끝까지 읽어보면 알 수 있는 내용이고, 또 위의 《미수기언》의 단군사 기록과 동일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이만부의 《지행록》 구월산조와 태백산조 기록 및 이종휘(李種徽:1731~?)의 《수산집(修山集)》 권12의 신사지(神事志) 기록을 참조해 보면 보다 더 명확히 알 수 있는 내용이다.

 또 미수선생의 태백산기(太白山記:미수기언, 권28)에도 강원 태백산의 산상에는 태백사(太白祠)가 있었다고만 언급하고, 고대의 단군유적이나 또는 어떠한 제단유적이 있었다는 말은 한 마디도 언급한 바 없으며, 또한 태백사가 단군시대 제의처로서의 관련성에 대해서도 한 마디도 언급한 바 없다.

 

 태백산 동북쪽 기슭 태백시 소도동 당골에는 또 단군의 화상을 봉안하고 해마다 개천절에 단군제를 지내고 있는 단군성전(檀君聖殿)이 자리하고 있다. 이 또한 1975년에 태백읍장 전대연의 후원으로 유지들이 창립한 현대 건축물일 뿐이다.

 다만 이 일대의 ‘소도동’과 ‘당골’이라는, 범상치 않은 땅이름이 조금 주목된다. 여지도서 강원도 삼척부, 상장성면(上長省面)조에 의하면, 소도동과 같은 ‘소도리(所道里)’란 땅이름이 조선시대에도 존속해오고 있었음을 살필 수 있다.

 이것이 후대에 인위적으로 행해진 단순한 땅이름의 이동일지도 모르지만,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三聖祠)가 있던 곳 입구에도 ‘소도동(所都洞)”이란 땅이름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단군시대의 문화적 땅이름과 관련이 있어 보이는 측면도 없지 아니하다.

 

 또는 삼국지(三國志) 위지, 동이전 마한조에 의하면, 마한(馬韓)에 속한 여러 나라에 ‘소도(蘇塗)’라는 별읍(別邑)을 두고서 그곳에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아 귀신(천신?)을 섬기었다는, 삼한시대의 신성한 제의처가 있었던 곳에서 유래한 땅이름으로 볼 수 있는 측면도 없지 아니하다. ‘당골’이란 땅이름도 그러한 귀신을 섬기던 무속인들이 당집을 짓고 많이 머물던 골짜기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속전(俗傳)에 의하면, 태백산신은 조선조의 단종대왕(端宗大王)이라고 한다. 곧 태백산 부근 지역 영월에서 승하한 단종의 혼령이 백마를 타고 태백산으로 와서 산신이 되었으며, 당시 태백산 부근의 삼척 ․ 영월 ․ 봉화 등지의 백성들에게 단종이 현몽하였다고 전한다.

 현재 태백산 천왕단이 있는 영봉(靈峯:1560.6m)에서 망경사(望鏡寺) 방면으로 300m되는 하산지점에 ‘조선국 태백산단종대왕지비’라고 쓴 비석을 안치한 단종비각이 자리하고 있다. 이는 곧 1955년에 망경사에 있던 박묵암 스님의 주창에 의해 뜻있는 사람들이 비를 세우고 비각을 지어 단종이 태백산신으로 강림하였음을 기념한 것이라 한다.

이와 같이 이곳 태백산 일원에서는 상고시대 단군의 발자취와 관련한 명확한 유적은 찾아볼 수 없다.

 

 조선시대에 태백산정에 세워져 있었던 태백산사(太白山祠) 천왕당(天王堂)은 조선시대에 음사로 지탄받아 헐리기도 하는 등 여러 차례 수난을 겪기도 하였지만, 근현대에 이르러 축조된 제단도 한국동란 이후 무장공비의 출현으로 인해 1955년 국군이 제단 앞쪽에 헬기장을 닦으면서 예전의 석단인 구단탑이 헐린 적 있고, 2008년 5월 27일에도 의정부 S교회 여목사 함모씨 무리에 의해 천제단의 상당부분이 훼손된 바 있다!

 

 

 

 

단군사적과 태백산

 

 백두대간상의 등줄기를 이루고 있는 강원도 태백산은 고대시절부터 현금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그 주이름을 ‘태백산’이라 불러왔다. 그러나 이곳 태백산에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단군의 사적과 관련한, 상고시대 이래의 명확한 유적지는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이곳 태백산 이외에 고대시절에 ‘太白山’으로 불리었던 명산으로는 곧 우리 민족의 성산(聖山)으로 여겨지는 백두산(白頭山)과 일찍이 서산대사(西山大師)의 명산평(名山評)에 의해 우리나라 제일의 수려한 명승과 웅장한 산세를 갖추고 있는 명산으로 일컬어진 바 있는 묘향산(妙香山)이 있다.

 

이들 두 명산은 모두 상고시대 단군사화(檀君史話)와 관련되는 성산으로 많이 언급되고 있는 산이다. 먼저 상고시대의 태백산과 관련한 단군사화의 내용을, 《삼국유사(三國遺事)》, 고조선(古朝鮮)조에서 조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고기(古記:단군고기)에 이렇게 말하였다. ‘옛날에 환인(桓因)의 서자(庶子) 환웅(桓雄)이란 이가 있었다. 환웅은 자주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탐내어 구하였다. 아버지가 그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태백산[三危太伯山]을 내려다 보니, 그곳은 과연 인간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할만한 곳이었다. 이에 천부인(天符印) 3개를 주어서 환웅으로 하여금 인간 세상에 내려가 이를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은 무리 3천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에 있는 신단수(神壇樹) 밑에 내려왔는데, 이곳을 일러 신시(神市)라고 한다.”

위의 일연(一然:1206~1289)의 《삼국유사》와 비슷한 시기의 저술인, 이승휴(李承休:1224

~1300)의 《제왕운기(帝王韻紀)》 전조선기(前朝鮮紀)에서 또 위의 내용과 관련한, 단군사화의 내용을 조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처음에 어느 누가 나라를 열었던고.

석제(釋帝)의 손자 이름은 단군(檀君)일세.

요제(堯帝)와 같은 해 무진년(戊辰年)에 나라 세워.

순(舜)을 지나 하국(夏國)까지 왕위(王位)에 계셨도다.

은(殷)나라 무정(武丁) 8년 을미년(乙未年)에,

아사달(阿斯達)에 입산(入山)하여 산신이 되었으니,

나라를 누리기를 1천 하고 28년.”

 

앞의 일연의 《삼국유사》 태백산주(太伯山註)에 의하면, ‘즉 태백산은 지금의 묘향산’이라 하였고, 또 이승휴의 《제왕운기》 아사달주(阿斯達註)에서는

“(아사달은)지금의 구월산(九月山)이다. 딴 이름은 궁홀(弓忽), 또는 삼위(三危)라 이름하였다. 사당(祠堂)이 아직도 있다.”

라 언급하고 있다. 그렇다면 <단군고기>에 보이는 환인이 내려다 본 인간 세상의 ‘삼위 ․ 태백산(三危太伯山)’은 바로 지금의 구월산인 삼위산과, 지금의 묘향산인 태백산이었다.

 그리고 인간 세상을 크게 이롭게 할만한 이 두 곳 중 환웅이 내려가 자리잡은 부산(父山) ․ 종산(宗山)이 바로 태백산인 묘향산이요, 그 아들 단군이 도읍을 옮겨가 자리잡은 자산(子山) ․ 지산(支山)이 바로 아사달인 구월산이었던 것이다.

 다만 일연은 고조선의 사적(事蹟)을 정리함에 있어서 우리의 <단군고기>와 중국의 《위서(魏書)》 따위의 사료를 종합, 참고하여 기록하다 보니 기자동래(箕子東來)로 인한 단군조선의 이동경로를 백악산(구월산) 아사달에서 장당경(藏唐京:문화)으로 옮긴 것으로 기술하고 있으나, 이는 평양성에서 백악산 아사달로 옮긴 것을 잘못 기술한 것으로 보인다.

 

곧 묘향산정의 신시(神市) 시대에서 발전적 인간세계로 하산하여 옮긴 곳이 평양성이고, 조선지역으로 동래한 기자의 세력을 피해 행궁처럼 임시 궁궐을 짓고 살던 곳이 구월산 아사달이요, 이후 안정적 평화시대로 접어들어 하산하여 자리잡고 살던 곳이 바로 장당경인 것이다. 이곳에서 단군께서는 마침내 인간세계의 정치 따위 세속적 일과 욕망을 버리고 다시 구월산으로 돌아가 은거하여 산신(山神)이 되신 것이라 하겠다. 현진건(玄鎭健:1900~1941)의 <단군성적순례(檀君聖蹟巡禮)>에서는 그 단군시대의 장당경 일명 당장경(→장장평)을 답사하고서 다음과 같은 순례기를 남겼다.

 

 “문화까지 단숨에 달려들어와 문무면 건산리(乾山里:현 신천군 관내) 동고개에 올라서니 눈앞에 평양촌(平壤村)이 보인다. 이 평양촌은 고명 당장경으로 단군께서 평양으로부터 이도하신 곳이라 전한다. 병풍같이 에둘린 구월산 연봉을 왼편으로 두고 질펀한 광야가 끝없이 열렸다……이 대평야의 한복판에 달걀의 노른자위 모양으로 평양촌이 자리를 잡았다. 지금은 수십 호 되는 한 소촌이라든가.  그러나 저 호망(浩茫)한 불고부저(不高不低)의 벌판엔 그리 많은 조영(造營)의 공(功)을 들이지 않더라도 십 수만호의 대도시를 현출함이 그리 난사가 아니리니, 성도(聖都)의 구지(舊地)로 부끄럼이 없다 할 것이다. 구도(舊都)에 끝없는 공상을 자아내다가 문득 백악의 연봉을 쳐다보매 어천(御天)하셨다는 사황봉(思皇峯:구월산의 상봉)이 벽천(碧天)을 뚫고 일순간 뚜렷이 장엄한 거용(巨容)을 나타내다가 그만 구름속으로 녹아들고 말았다.”

 

 이들 단군사화의 삼위산과 태백산 두 산에 대해서는 그 당시 현재의 어느 산인지를 일찍이 고려시대에 일연과 이승휴 등이 분명하게 밝히고 있으나, 후대의 많은 이들이 대부분 이를 자신의 주관적 관점에 집착하여 신화적(神話的), 언어학적, 종교적, 민족주의적 관점에 의거하여 보려고만 하므로 그 사화 속에 내재된 진실성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 때문에 어떤 이는 이들 삼위산을 중국 감숙성(甘肅省) 돈황시(敦煌市)에 있는 삼위산으로 보기도 하고, 태백산을 중국 섬서성(陝西省) 미현(眉縣) 남쪽에 위치한 태백산(太白山:3767m)으로 보기까지도 한다. 그렇게 본다면 태백산과 관련한 단군사화도 한국의 역사이야기가 아닌, 중국의 역사이야기라는 말인가?

 

이 중에서도 중국 섬서성의 태백산을 단군의 발상지로 보는 것은 언급할 가치도 없는, 참으로 황당한 이야기이다. 필자는 2006년도 여름에 직접 이 태백산을 등산해 본 적도 있지만, 단군사화와 관련한 어떠한 일말의 단서도 보지도, 듣지도 못하였다.

 물론 당시에 3500여 미터 일대까지만 오르고 정상(3767m) 일대의 3대 호수지역까지는 군사지역이고, 귀중한 약초 보전지역이라 하여 외국인에게는 등정을 불허하여 만족할만한 답산은 못하였으나, 이 산에는 고대 노자(老子)가 윤희에게 도덕경을 강설하였다는 전설적 유적지인 설경대(누관대) 및 중국 8대신선 중의 한 선인인 여동빈(呂洞賓)을 모신 도관, 또는 당(唐)나라 때의 약왕 손사막(孫思邈:581~682) 진인을 모신 약왕전 등의 유적만 직간접적으로 살펴볼 수 있었을 뿐이다.

 

다만 세속적 재야사가들을 현혹시킬만한 문구로서 산기슭 태백산국가산림공원 표지석에 ‘웅거천지 기궁고금(雄踞天地 奇窮古今)’ 이라 쓴 문구와 1800m 지점 마을 입구 표지석에 ‘개천관(開天關)’이라 쓴 문구 등이 보인다. 곧 정도에 지나쳐 보이는 재야사가(?)들은 이들 표지석의 문구를 보고 감격하여 웅거천지의 웅거(雄據)할 웅자를 환웅천왕으로 보기도 하고, 이태백의 ‘등태백시(登太白詩)’에 보이는 ‘태백산(신)이 나에게 이야기하길, 날 위해 하늘의 관문 열었다네![太白與我語, 爲我開天關]’라고 한 시구에서 유래한 땅이름 ‘개천관’을 단군의 개천사적지와 관련시켜 언급하기도 하는데, 모두 언급할 가치도 없는 이야기들이다.

 

 고대에 태백산으로도 불리었던 묘향산과 아사달산으로도 불리었던 구월산에는 모두 상고시대 단군의 유적지가 남아 있다. 곧 묘향산의 향로봉 중복에는 단군이 태어나신 곳이라는, 너비16m, 길이 14m, 높이 4m 가량의 단군굴(檀君窟)이 있고, 단군굴 근방에 청정한 천수(泉水)가 있는데, 단군이 잡수며 생장하였던 샘물이라 하며, 그 근방에 있는 단군대(檀君臺)라는 석대(石臺)는 단군이 활을 쏘던 사대(射臺)라고 한다.

 역사학자 장도빈(張道斌:1888~1963. 단국대 초대 학장)은 <단군고적고(檀君古蹟考)>에서 단군사적과 관련한 묘향산을 답사하고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묘향산의 최고봉에 다다르면 백토(白土)로 된 고봉이 하늘에 닿았는데, 그 봉우리는 온전히 단향(檀香)나무로 엄폐되어 있다. 이렇게 백설(白雪)같은 봉만(峯巒)에 푸른 단향나무가 가득차서 산을 가리운 것을 볼 때에 과연 이것이 태백산 단목하(檀木下)인 것을 알았다. 따라서 이 산에 단향나무가 많은 고로 산의 고명(古名)이 향산(香山)이요, 이 산에서 탄생한 신인(神人) 왕검(王儉)을 후세에 존칭하여 단군이라고 한 것을 알았다.”

 

위와 같은 묘향산의 단군유적은 조선 숙종 시대의 고승 설암(雪巖) 추붕(秋鵬:1651~1706)의 《묘향산지(妙香山誌)》에 의하면, 조선시대에도 계속 전래되어 왔음을 살필 수 있다. 설암은 곧 묘향산의 단군유적으로서 단군대(檀君臺)와 , 단군께서 신인(神人)으로 탄강하였다는 탄생지 단군굴(檀君窟)과 단군 강무대(檀君講武臺) 및 단군께서 과녁의 지팡이를 세워 두었던 바위라는 후장암(帿杖巖)을 자세히 언급한 후 이들 전설이 결코 허황한 것만은 아닌, 긍정적인 면으로도 볼 수 있는 것들이라는 것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예전 일은 매우 허황하여 이야깃거리삼아 다 실증하기는 어렵다. 그러나(다만) 《대조기(代朝記:朝代記의 잘못으로 보임. 조대기는 조선시대에 禁書였으므로 의도적으로 바꿔 썼을 수도 있음)》에 이르기를 ‘환인(桓仁:桓因을 오인한 듯)이 태백산 신단수(神檀樹) 아래로 내려와 머물렀다. 어느날 백호(白虎)와 교통하여 아들을 낳으니 이 분이 단군으로서 우리 동방에 나라를 세운 군장이 되었는데, 요임금 연대와 같은 해였다.’ 고 하니, 그렇다면 (앞의 묘향산 단군 유적지에 관한 이러한 전설들은) 세상 사람들이 기이한 것을 좋아하여 잘못을 답습하고 있는 설만은 아님이 분명하다.”

 

 위의 《대조기》(이를 《제대조기》로 읽음은 잘못임. 《조대기》?)의 기록 내용이 조금 부정확한 것으로 볼 때 설암이 이를 직접 본 것이 아니고 전해들은 것을 옮긴 것이라면, 《삼국유사》의 단군사화에 보이는, 환웅의 짝이된 웅녀가 백호로 바뀐 것도 환웅(桓雄)의 수컷 雄자가 곰 웅(熊)자로 오인된 것으로 인해 환웅의 상대가 백호로 오해되어 달리 와전된 전설이 아닐까 추측되기도 한다.

 위의 단군설화의 내용은 기존의 단군사화 내용과 다른 새로운 유형의 단군설화로 일부 학자들에 의해 주목되기도 하지만, 어찌보면 《삼국유사》도 한 번 읽어보지 못한, 역사지식이 그리 깊지 못한 한 불승의 오해로 와전된 단군신화의 기록을 호랑이 토템 민족 운운하며 너무 깊이 들어가면서 과대 해석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조에 의하면, 동부여의 왕 금와(金蛙)가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를 만난 곳이 바로 태백산(太白山) 남쪽 우발수(優渤水)라 하였다.

 조선시대 이만부의 《지행록(地行錄)》에 의하면, 묘향산 남쪽에 우발수란 한 못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고대의 금와 사적지였다고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의 우발수 또한 지금의 묘향산 남쪽, 옛 영변군(寧邊郡) 남쪽 백령면(百嶺面)의 은봉(銀峯) 밑 학암(鶴岩) 위에 있는 것으로 볼 때 《삼국사기》 금와고사에 보이는 태백산도 바로 묘향산을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삼국사기》동명성왕 6년(B.C. 32)조 기사에 의하면, 왕이 오이(鳥伊)와 부분노(扶芬奴)를 명하여 태백산 동남의 행인국(荇人國)을 쳐서 그 땅을 빼앗아 성읍을 삼았다고 하였다.

 《영변군지(寧邊郡誌)》(1971年刊)에 의하면, 행인국은 묘향산 보현사(普賢寺) 일원에 국도(國都)를 정하고 개국(開國)하였던 나라라고 하였다. 고구려 동명성왕 때 오이와 부분노 두 고구려 장수에게 정벌 당하여 전군(全軍)이 대패하자 행인국왕이 보현사 동쪽 4리쯤 되는 곳에 있는 큰 바위 석굴에 피신하여 숨어 있다가 생포되면

서 나라도 멸망 하였다.

 그 석굴은 행인국의 국운이 다한 석굴이라는 의미로 후대에 ‘국진굴(國盡窟)’이라 불리어졌다. 현진건(1900~1943)의 <단군성적순례(檀君聖蹟巡禮)> 에도 이 ‘국진굴’에 관하여 자세히 언급하고 있고, 또 묘향산의 단군굴에 관해서도 매우 상세한 답사기를 남기고 있다. 특히 이 글에서는 옛날 평양감사나 영변부사가 도임할 때 마다 체면 치레로 단군굴을 근참한다고 남여를 타고 행차하여 이에 죽어날 지경인 승려들이 빈봉 동쪽에 있는, 접근하기 쉬운 다른 동굴을 단군굴이라 속여 안내하였다고 하는데, 이를 ‘가단군굴(假檀君窟)’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구월산에도 상봉 북동쪽 오봉(五峯) 중복과 산기슭에 단군대(檀君臺)와 단군굴이 있다. 단군대 부근에 궁궐이 있었으므로 ‘궐산(闕山)’이라 일컫던 산 이름이 연음(延音)되어 ‘구월산(九月山)’이라 불리어지게 되었다.

 

(《대동지지》문화(文化)조 참조). 이곳 단군대는 단군이 등선(登仙)한 곳이라 전한다. 이 산 상봉 남동쪽에는 아사봉(阿斯峯:687m)이란 봉 이름도 전한다. 또 이곳 구월산 기슭 삼성리(三聖里), 옛 성당리(聖堂里)에는 일찍이 고려 때부터 환인(桓因) ․ 환웅(桓雄) ․ 환검(桓儉:단군)을 모신 삼성당(三聖堂) 또는 삼성묘(三聖廟)라 일컫던 신묘(神廟)가 있었다. 《세종실종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문화현조에도 구월산 성당리(聖堂里) 소증산(小甑山)에 삼성사(三聖祠)가 있는 것으로 언급하고, 그 삼성을 ‘단인(檀因) ‧단웅(檀雄) ‧ 단군(檀君)’ 으로도 언급하고 있다.

 

 《삼국유사》의 단군사화에 보이는 ‘삼위산(三危山)’의 ‘危’자는 곧 조선의 역사에 있어서, 그리고 조선의 역대 인민에게 있어서 높고 우뚝하고 거룩한 세 신성(神聖)의 영(靈)이 머물고 있는 삼신산(三神山), ‘삼성산(三聖山)’ 의 의미로서 일컬은 산 이름이라 추측된다.

 물론 《삼국유사》의 단군사화 기록에 의하면, ‘삼위산’은 태초부터 불리어온 고유의 산 이름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상고 이래 전래되는 단군사화의 내용에 의거하여 후대에 인위적으로 의미가 부여되어 불리어진 산 이름으로 볼 수도 있다고 본다.

 묘향산과 함께 고대사상에서 태백산으로 일컬어진 산으로 또 우리민족의 성산(聖山)으로 일컬어지는 백두산이 있다. 백두산을 태백산으로 일컫고 있는 확실한 예로는 우리나라 정사기록으로는 《삼국사기》최치원전(崔致遠塼)에 발해(渤海)의 건국에 관해 말하면서 언급한 것이 있을 뿐이다.

 중국의 정사상에서는 《위서(魏書)》 물길전(勿吉傳)과 《북사(北史)》 물길전 및 《신당서(新唐書)》의 흑수말갈전(黑水靺鞨傳)과 발해전(渤海傳)이 있다. 이 중 《위서》와《북사》의 일본(一本)에는 ‘太白’ 이 ‘太皇(태황)’ 으로도 언급되어 있어 분명치 않다.

 

 이에 의하면 백두산은 고대에 ‘태백산’으로 불리어 온 것은 분명하나, 이곳에는 전설적이던, 고고학적이던 명확한 단군시대 유적지는 전래하지 않는다.

 

단군사적지 백두산설

 

 백두산을 국조 단군의 개국(開國) 발상지로 본 예는 조선시대에도 안정복(安鼎福:1712~1791)의 《동사강목(東史綱目)》 태백산고(太白山考) 및 윤정기(尹廷琦:1814~1879)의 《동환록(東寰錄)》 단군조선조 주(註)에 일부가 보일 뿐이고, 고려시대 사료와 조선시대 역대 지리지 등에는 대체로 묘향산을 그 발상지로 언급하고 있으며, 20세기 이후로도 민족종교적 사서류(史書類)인 북애노인(北崖老人)의 《규원사화(揆園史話)》와 민족주의적 시각이 강하게 보이는 최남선(崔南善:1897~1957)의 《백두산근참기(白頭山覲參記)》 등에서만 일부 보였을 뿐이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서는 정사(正史)의 관점에 의한 고대사 저술로 보기에는 문제가 있어 보이는 《환단고기(桓檀古記)》 등의 고대사 관련 도서가 크게 부각되면서 단군조선의 개국 발상지로서의, 묘향산설이 더 퇴색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그에 관한 뚜렷한 유적이 새로 발굴된 것도 아니고, 대체로 민족주의적 색채가 강하게 드러나고 보다 더 실증적인 관점은 상당히 미흡한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규원사화》에서는 단군사화상의 태백산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는 내용이 보인다.

 

“대개 우리나라의 모든 산이 태백이란 이름을 붙인 것이 많으니 선비들이 대개 영변(寧邊) 묘향산(妙香山)으로써 당하니 실상 일연(一然)의 《삼국유사》에 있는 말에 연유했으되 저들의 시야가 좁아서 어찌 함께 논의하겠는가? 지금의 백두산상에 큰 못이 있으니 둘레가 팔십리요 압록강과 혼동강 등 여러 강물이 이에서 비롯하였으니 천지(天池)라고 말한다.

 곧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신시씨가 구름을 타고 하늘에 오른 곳이다. 묘향산은 일찍이 한 조그마한 물구비도 없으니 환웅이 처음에 내려오신 태백이 되지 못함은 너무도 분명하지 아니한가?”

 

 위의 내용과 같은, 단군사화와 관련한 천지이야기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세종실록》 등 정사상의 단군사적에서는 한 군데도 찾아볼 수 없는 내용이다. 곧 단군사화상의태백산 산정에 큰 못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규원사화》 저자만의 이야기일 뿐이다. 학계에서 위사서(僞史書)로도 논급되고 있는 《환단고기》보다 저술연대나 출현연대가 훨씬 앞서고 있는 《규원사화》도 사료상으로는 진서로 보기 어렵다고 본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학자가 논급한 바 있으며, 그 중에서도 조인성 교수(경남대)의 설이 가장 많이 참조, 운위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재야사가들의 공격적 재반론이 제기되기도 한다. 필자는 이에 기존에 아무도 논급한 바 없는 《규원사화》의 저술시기 등과 관련한 위서로서의 결정적 문제점을 간략하게 제시해 보고자 한다.

 

 규원사화의 저술연대에 대한 일반적 관점은 본서 서문 말미에 저자가 밝힌, ‘상지이년 을묘(上之二年乙卯)’라는 문구에 의하여 ‘조선 숙종 원년(1675년) 을묘’에 저술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대한 전거에 대해서 고평석 스님(홍익사상·고대사 연구가) 등 재야사가들이 자신있게 내세우는 전거는 바로 규원사화 서문에 보이는, 저자가 당시 평양에 돌아왔을 때 마침 조정에서 을지문덕의 사당을 세운다고 했다는 내용이 《조선숙종실록 6권》 숙종 3년 정사 11월 을유조에도 기록되어 있다는 이야기이다.[고평석의 <규원사화 북애노인 친필본>(한배달 6호, 1989년 12월 등 참조] 그러나 이는 숙종실록의 내용을 정밀하게 살펴보지도 않고 언급하고 있으며 역사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한 이야기이다.

 

실록의 숙종 3년 11월조 기사에는 “을유일에 예관을 보내어 고구려 을지문덕 사우의 편액 이름[額號]을 내려주고 인하여 치제(致祭)하게 하였다.”(乙酉, 遣禮官, 賜高麗乙支文德祠宇額號, 仍爲致祭) 이 기사는 곧 조정에서 을지문덕 장군의 사우에 대한 편액의 액호를 내려준 사액연대 기사이지 을지문덕사우의 건립연대를 언급한 내용이 아니다. 조선시대 사우와 서원은 거의 모두가 건립연대와 사액연대가 다르다.

 

여기에 보이는 을지문덕사우는 평양 창광산 남쪽에 있었던 충무사(忠武祠)를 말한 것으로, 이에 관한 연혁은 《여지도서》 평양조와 《대동지지》 및 《연려실기술》 별집4 등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곧 충무사는 인조 을유에 감사 김세렴이 창건한 후 양몽재(養蒙齋)라 하였고, 현종 경술에 감사 민유중이 중창한 후 을지문덕 장군을 봉안하였으며, 숙종 3년 정사에 충무사라 사액하였다. 이로써 볼 때 을지문덕 사당과 관련한 규원사화의 저술 시기는 결코 숙종 원년 을묘로 볼 수 없다. 위에서 저자가 밝힌 규원사화의 저술 시기는 저자가 저서의 역사성을 높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조작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혹 저자 당시에 을지문덕 장군 사당에 관하여 당시 조정에서 피폐된 사우를 중수하고 치제하게 한 사실이 있었을 수도 있는데, 그러한 사실이 있었다면 그 시기는 순종 2년(1909)의 일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곧 순종실록 2년 기유 1월31일조 기사에 각지의 무덤과 사우 등을 찾아 보수할 때 숭령전·숭인전과 을지문덕 사당 등에 지방관을 보내어 치제하게 한 기사가 보인다.

 

필자는 규원사화가 이 무렵 곧 1910년대 전후 시기에 단군을 종교적으로 숭배하는 대종교 계통의 대학자가 저술하였을 것으로 보며, 그 결정적 단서는 곧 대종교인들만이 그들의 교리를 언급할 때 금과옥조처럼 쓰고 있는 ‘성통공완(性通功完)’이란 용어이다. 이 말은 진성이 열리어(통하여져) 공을 완수한다는 말로서, 불가의 ‘자리이타(自利利他)’와 유사한 의미의 철학 용어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깨달음의 의식 상태에 도달하여 자아완성을 이루는 것이 성통이고, 깨달은 바를 행하는 것이 공완이다.

 이 용어는 대종교의 3대 경전 중 교화경인 《삼일신고 (三一神誥)》에 두 번이나 언급되고 있는 전문 용어이나, 조선왕조실록·한국문집총간 등 다른 어떤 문헌에서도 이 용어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데 이 ‘성통공완’이란 용어가 《규원사화》의 단군기와 만설 두 군데나 보이고 있으니, 규원사화의 저자가 어찌 대종교인이 아니랴?

 

 

 또 백두산기로서는 상당히 해박한 명문으로 인구에 회자되는 최남선의 《백두산근참기》에서 백두산과 단군사화를 결부시켜 언급하고 있는 내용을 조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 최초의 입국지(立國地)를 천평에 의(擬) 하기는…… 조선의 고전(古傳)을 거(據) 하건대 그 국근(國根) 인 환국(桓國:桓因을 잘못 읽는 예로서 근거 미흡)도 천국을 의미하고 수군(首君)인 환웅(桓雄)도 천왕을 의미하는 등 약간 잔여한 명구가 모두 천(天)으로써 일관하였는데, 전설상의 발상지로 동방의 천산인 백두산이 정(頂)에는 천지를 대(戴)하고, 신(身)에는 대하(大河:승가리우라)를 수(垂)하고, 요(腰)에는 천평을 대(帶)하는 등, 다 없어지고 겨우 남은 지명들이 시방까지 판에 박은 듯 천자(天字)를 지녀옴이 결코 우연이 아니겠음으로부터 추론함이었다.”

 

최남선은 위의 천지(天池), 천평(天坪), 천왕당(天王堂) 따위와 같이 ‘天’자가 붙은 지명 일부를 가지고 언어학적 관점에서 막연하게 추리적으로만 일관되게 언급하고 있을 뿐 백두산 일원에 어떠한 단군조선의 유적지가(전설적 유적지라도)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것을 가지고 실증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예는 하나도 없다.

 특히 ‘천평’이란 땅이름은 《증보문헌비고》 등 조선 후기의 문헌자료나 18, 19세기의 고지도 《해동지도》, 《대동여지도》 등에 그 전거가 보일 뿐이고, 천지는 조선시대 역대 지리지와 고지도에 대택(大澤), 대지(大池), 달문지(闥門池) 등으로 달리 지칭한 못 이름은 보이나 ‘천지’란 못 이름은 보이지 않으므로 막연하게 백두산의 ‘천’ 자가 붙은 지명을 가지고 단군시대부터 불리어온 옛 땅이름으로 보는 데는 크게 무리가 있다고 본다.

 

또 천왕당이란 사당과 그 사당에 봉안한 위패에 보이는 국사대천왕신을 단군신과 동격으로 보는 것도 문제가 있다고 본다.

 

예컨대 조선시대에 속리산 산정에도 대자재천왕사(大自在天王祠)에 천왕신을 모셨으나, 이 천왕신이 속리산 산신이었을 뿐 단군신은 아니었고, 지리산 산정의 천왕당에도 지리산 산신인 지리성모를 모셨을 뿐(조선시대 박여량의 <지리산일록> 참조) 단군신을 모신 적은 없다. 백두산 천왕당의 천왕신 또한 그 산의 산신인 백두산 산신이었을 뿐 단군신이었다는 근거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묘향산 단군굴 안에 모셔져 있었던 위패는 이와 다르다. 곧 현진건(1900~1941)의 <단군성적순례>에 의하면, 굴안 서편 좌측 중앙 우측에 ‘나무환인천왕지위(南無桓因天王之位), 나무단군천신지위(南無檀君天神之位), 나무환웅천왕지위(南無桓雄天王之位)’라 씌어 있는 위패가 모셔져 있었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현진건의 묘향산 답산 시기보다 한 해 앞서는, 1931년 7월에 묘향산을 다녀간 후 산행기를 남긴, 노산 이은상(李殷相:1903~1982)의 <향산유기(香山遊記)>에도 이곳 단군굴에 대한 자세한 답사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나는 이 굴 앞에 이르자 무조건으로 무릎을 꿀었으며 무의식으로 눈물을 흘렸습니다. 한 쪽 구석에 목비(木碑) 셋이 계시다 함으로 자세히 찾으니 땅바닥 진흙에 넘어져 있습니다. 나는 강건한 마음으로 목비를 모셔 안고 그 몸에 발린 흙을 씻은 뒤에 바위 벽에 세 위(位)를 모시어 세우니 중앙 목비에 단군천신지위(檀君天神之位)라 썼고 좌우의 목비에는 남무환인천왕지위(南無桓因天王之位), 남무환웅천왕지위(南無桓雄天王之位)라 씌어져 있습니다.

 남무란 곧 귀명(歸命)이란 뜻이니 우리 천왕에게로 돌아오라는 말입니다. ‘돌아오라’ 얼마나 우리 마음을 일깨워주는 말입니까. 나는 이 ‘귀명’ 일언(一言)으로써 우리의 표어를 삼고자 하거니와 이 말이야말로 더럽고 적고 약하고 어리석고 무디고 간사하고 조라지고 어둡고 미지근하고······이러한 온갖 악점밖에 못 가진 우리에게 내려주시는 명령이요 또한 복음입니다.”

 

 

맺는 말

 

 필자의 선친 [인산 김일훈(仁山 金一勳:1909~1992)]은 일제시대에 독립운동가로서 왜경을 피해 백두산 ‧ 묘향산에 십수년간 은신하여 지냈던 분이다.

 

필자는 일찍이 선친께 백두산에도 묘향산과 같이 단군의 유적지로 전래하는 곳이 있는지 여쭈어 본 일이 있으나, 없다고 단언하셨다. 그리고는 단군사화와 관련한 단목(檀木)으로 보이는 눈처럼 흰 박달나무는 묘향산에만 총생하고 있기 때문에 그 향(香)이 신묘하다고 하여 산 이름도 묘향산이라 하고, 그 봉우리 이름도 설령봉(雪靈峯) 이라 한다고 말씀하였다.

 

* 위의 논고는 <<山書, 20호>>(2009년 12월, 한국산서회 발행)에 게재한 논고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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