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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평론.시사용어

우키시마호(浮島丸) 폭파 사건

by 청풍명월7 2024.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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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출발해 부산으로 가던 수송선 우키시마호(浮島丸)가 1945년 8월 24일 일본 마이즈루만 앞 바다에서 침몰한 사건. 우키시마호는 해방 후인 1945년 8월 22일 오후 10시, 일본 아오모리현 시모키타 반도에 있는 오미나토 항에서 강제노역을 위해 연행되었던 조선인 노동자와 가족들을 태우고 출항했다.



우키시마호는 4,730톤에 108m에 이르는 해군수송선으로, 조선인들의 귀국을 위해 마련된 첫번째 귀국선이었다. 우키시마호에 승선한 조선인들의 숫자는 사고 직후 우키시마호의 도미우리 함장이 3,725명, 사망자 524명으로 알려졌으나, 당시 아오모리 근처 조선인 강제 노역자들의 숫자를 고려할 때 1만 여 명으로 추정되며, 생존자 일부는 1만 2천여 명으로 주장하고 있다.



우키시마호의 침몰이 역사적 문제로 남은 이유는 우키시마호의 침몰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다는데 있다. 우키시마호의 침몰 원인은 크게 촉뢰설과 폭침설로 나뉜다. 촉뢰설은 우키시마호가 일본 연안에 부설했던 기뢰에 접촉하여 발생한 것으로 보는 설이다. 이 경우 사건은 우연적인 사건으로 종결된다. 그러나 생존자 및 목격자의 증언에 의하면 우키시마호가 침몰할 때, 기뢰에 접촉했을 때 발생하는 물기둥이 치솟지 않았다는 점 및, 이 당시 이미 연안에서 기뢰를 제거했다는 통보를 받고 입항했다는 점에서 촉뢰설은 입증하기 어렵다고 추정되고 있다.



폭침설은 일본 군부가 자폭을 유도했거나 선체 안에서 폭발을 일으켜 의도적으로 침몰시켰을 것이라는 설이다. 그 이유는 당시 강제노역하던 조선인들이 강제노역의 내용을 전 세계로 알리는 증인이 될 것이라는 점 및, 강제노역 현장에서 알게 되었을 군사적 기밀의 유출을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추정하고 있다. 이 사건의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채, 1954년 마이즈루만에서 인양된 우키시마호의 선체에서는 후미 바닥에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부풀어 오른 구멍이 발견되어, 배의 내부에서 강한 폭발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촉뢰설을 주장해 왔으며, 당시 일본 정부의 책임이 없음을 주장하고 있으나, 희생자와 유족들은 1992년 일본 법원에 배상청구 소송을 제소했으나 2003년 원고 패소의 판결을 받았다. 이후 추가적인 진상 조사는 진행되지 않은 가운데, 한국의 민간 단체와 일본의 활동가들에 의한 지속적인 진상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우키시마호(浮島丸) 실제사진



1945년 8월 22일, 패망 이후 일본 전범 재판과 관련하여 강제징용했던 조선인 노동자들이 폭동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우려 하에 일제는 수많은 조선인 노동자들을 일본 해군에서 징발한 4740톤급 화물선 우키시마호(浮島丸, 부도환, 우키시마마루, Ukishima Maru)에 태워 오미나토 항에서 부산으로 돌려보내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이렇게 오미나토에서 출항한 우키시마호가 돌연 방향을 돌려 일본 마이즈루 항으로 향하더니 8월 24일에 해상에서 갑자기 폭음과 함께 폭발한 사건이다.

당시 일본의 선박법은 하위규정(선박법 취급수속=船舶法取扱手続)에서 "선박 명칭에는 되도록 어미에 '마루(丸)' 자를 붙이도록" 훈시하고 있었기에 일본 민간 선박들은 ~마루라는 흔히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우키시마마루 사건이라고 불리고 대한민국에서는 우키시마호 외에도 우키시마호 폭발사건, 부도호 사건 등으로 불린다.

폭발의 원인에 대한 주장은 배에 함께 탔던 일본인 장교들이 부산에 도착했을 때 보복이 두려워 자폭했다는 한국 측 주장과 당시 미군의 명령대로 방향을 바꾸었을 뿐이며 만내에 부설했던 미군의 기뢰와 충돌하여 침몰했다는 일본 측의 주장으로 나뉜다. 

일본은 당시 공식 발표를 통해 선인 승선자 3,725명, 사망자 524명, 실종자 수천여명으로 집계하였으나 현지 주민의 목격담에 따르면 사망자만 1,000명이 넘으며 당시 생존자의 목격담에 따르면 7,000명 이상이 승선하였다고 한다. 조선인 1만명이 넘게 승선하였으며 최소 5,000명이 사망했다는 자료도 있다. 




1945년 8월 21일, 일본의 우키시마호는 약 7,000여 명의 조선인 노동자들을 오미나토 항에서 태워 부산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해군에 징발되어 해군 승조원들이 몰고 있던 우키시마마루에게 내려진 본래 명령은 조선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들을 데려오는 것이었지만 명령이 바뀌어 우키시마마루에도 일본 북부지방에 있던 조선인 노동자들을 부산으로 실어 보내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승조원들 중 일부 해군 하사관들은 이 명령에 항의했지만 상부의 강력한 지시로 어쩔 수 없이 우키시마마루에 조선인 노동자들과 일부 가족들이 탑승하게 되었다.

대한민국의 상당수의 여론, 특히 당시 우키시마호에 탑승했던 여러 한국인 생존자들은 "우키시마호가 폭발한 것은 일본 해군의 계획적인 범죄"라고 주장했다. 우키시마마루의 승조원들은 배가 부산에 도착할 경우에 분노한 조선인들에게 보복을 당할 것을 두려워해서 우키시마마루에 조선인을 탑승시키라는 명령에 강하게 항의하고 항명했다는 것이다. 김영주 우키시마호 추모 협회 이사는 당시 조선인 징용자들을 일본에 남겨두자니 폭동이 우려되고 살려두자니 국제 사회에서 일제의 만행을 증언할 수 있었기 때문에 폭발 사고로 위장해 수장시킨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항해 동안에도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여러 수상한 정황이 있었다. 폭발 전에 일본 군인들이 문서 등의 물건들을 바다로 내던진 것은 물론, 다수의 일본 선원들이 보트를 타고 배를 탈출하였다는 증언도 이어졌다.  생존자인 故 정기영씨의 증언에 따르면 일본 병사 둘이서 젖을 먹고 있는 아기를 보며 "저 불쌍한 어린애가 꽃봉오리도 피우지 못하고 가게 생겼으니 큰일이다."라고 얘기했다고 한다.

또한 침몰시의 정황에 대해서도 양측의 견해가 다르다. 일본측은 승조원들이 탑승자들을 갑판으로 유도했다고 하는데 사건 바로 다음해인 1946년에 남긴 생존자 채길영 씨의 증언은 정반대다. "승조원들이 탑승한 조선인들을 갑자기 배 밑으로 내려가도록 채근하는 사이에, 승조원들은 우키시마마루의 소함을 타고 배를 빠져나갔으며 그 뒤에 배가 폭발했다"는 것이다. 생존자 강이순 씨 역시 당시 배에 있던 승조원들이 사라지는 일들이 있었고, 배가 폭발하기 전에 승조원들이 기관실로 몰려갔으며 이내 없어졌다고 증언했다. 

우키시마마루가 기뢰에 의한 폭발이 아닌 내부에 설치된 폭발물에 의한 폭발이라는 근거는 생존자들의 증언에서 나왔다. 생존자들은 하나같이 "폭발음이 3~4회 들렸다"고 증언하고 있다. 만약 기뢰에 의한 폭발이라면 폭발음이 서너 차례 들린다는 것은 이상하다는 것. 게다가 기뢰에 의한 폭발일 때 나타나는 수십 m의 물기둥도 나타나야 하는데 그런 것 또한 없었다는 것이다. 설사 기뢰였다고 해도 기뢰가 존재하는 걸 알고 있는 일본이 출항을 시도했다는 것부터가 의심스럽다.

기뢰폭발시 물기둥



또 1954년 일본 기업이 선체를 인양했을 당시 배의 선체가 모두 바깥쪽을 향해 구부러져 있었다는 것도 자폭설의 근거로 제기된다. 만약 수뢰에 접촉해서 폭발한 것이라면 안쪽으로 구부러져야 마땅하겠지만 우키시마마루의 선체는 모두 바깥쪽을 향해 구부러져 있었다는 것. 이는 선체 내부에서 폭발이 일어났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2016년 김문길 한일문화연구소장 등이 배에 폭발물이 실려 있었다고 추정되는 일본 방위청 문서를 입수해 공개했다. 




2019년에 전달된 사고 넉 달 뒤 연합군 요청으로 작성한 조사 보고서에는 출항 전 일본 승조원들이 조선인 때문에 생명을 바칠 수 없다며 위험한 구역 항해는 절대 반대한다는 규탄시위를 했다고 적혀 있으며 그러자 일본 해군 참모장이 의무를 수행해 깨끗이 목숨을 바치라'폭탄적인 선언'을 했다는 내용이 담겨있어 고의성 의혹이 커졌다.

일본이 주장하는 사건의 원인은 미군이 부설한 기뢰에 우키시마마루가 접촉하면서 폭발이 일어났다는 것. 당시 마이즈루만에는 미군이 부설한 기뢰들이 깔려 있었는데 자기기뢰에 대해서는 우키시마마루 자체의 장비로 탐색이 가능했지만 음향기뢰는 소해정이 음향 발신기로 음향 기뢰의 위치를 파악하는 게 필요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아시아 태평양 전쟁기에 미군이 부설했던 기뢰의 규모는 상당하였기에 종전 후 이 기뢰들의 해제를 위해 일본 육해군이 공식적인 해산에도 소해부대들은 존속하게 되었다. 이들은 6.25 전쟁에 동원되기도 했으며 소해부대가 훗날 해상자위대의 모태가 되었다.

그런데 우키시마마루는 마이즈루항으로 들어가라는 상부의 지시를 받기는 했으나 갑작스런 명령 전달 과정에서 혼동이 있어 길을 안내해야 하는 소해정들이 제때 마중을 나오지 않았는데 우키시마마루는 소해정들이 나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마이즈루만으로 그냥 들어갔다가 기뢰가 있는 수역으로 진입하여 음향 기뢰가 엔진음에 반응하여 폭발하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이 기뢰에 대해 일본에서는 "음향기뢰가 아닌 수압식 기뢰일 가능성도 크다"고 말한다.

또한 일본 측에서는 "마이즈루에 입항한 것은 배의 연료가 떨어졌기 때문이며,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승조원과 탑승자들 대부분을 함선의 데크(갑판)로 유도했기 때문에 오히려 피해가 적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일본이 기뢰 폭발에 의한 사고라고 주장하는 직접적 근거로는 침몰한 우키시마마루의 상태가 상부 구조물이 파괴된 것이 아닌 배 밑바닥 등의 하부 구조물에만 폭발한 흔적이 있다는 점, 선체 부품이 흩어져 날아가거나 선체에 큰 폭발로 생긴 구멍이 없다는 점, 폭발 이후 해저의 흙이 부상해 해면이 탁해진 점, 사망자들의 사체가 화상을 입었거나 신체가 산산히 흩어지지 않은 점 등을 들고 있다.

또한 일본은 "미군이 이 사건을 수중에 부설한 기뢰에 의한 전과로 기록하고 있는 점도 증거"라고 주장한다.

일본어 위키백과에는 해당 사건에 대해서 GHQ 측에서 8월 25일 0시 이후로 100톤 이상의 배의 출항을 금지시켜 해당되는 항해 중인 선박을 가장 가까운 항구로 입항할 것을 명령하였고 8월 24일 오후 6시까지 목적지에 도착할 수 없을 것 같은 배는 전부 가까운 항구로 회항하라는 명령을 듣고 위치, 승선자의 수, 기뢰의 소해에 의한 안전성, 잠수함의 활동 등을 고려하여 마이즈루 항으로 입항하기로 결정했다고 서술되어 있다.

 


우키시마마루는 일본 북부의 아오모리현의 오미나토 항을 출발해 부산으로 향했다. 상식적으로 일본 북부에서 부산으로 가는 가장 빠른 항로는 동해를 횡단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우키시마마루는 일본 열도의 연안을 따라 내려갔다. 우키시마마루가 갑자기 마이즈루항으로 방향을 바꾼 것도 의혹으로 제기된다. 무엇보다 부산을 향하던 우키시마마루는 8월 24일에 갑자기 마이즈루항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이런 의혹에 대해 반박하는 여론은 아직도 당시에 전시 상황이라 일본 근해에 미 해군의 기뢰가 많은 것은 물론 미 해군과 소련 해군의 잠수함들이 해역을 배회하던 상황이었고 때문에 "기뢰와 잠수함 활동 등을 피해 그런 항로를 택했다"고 주장한다. 삼선 조난 사건이라고 우키시마마루가 출발한 다음날에 소련 국적으로 보이는 잠수함이 세 척을 침몰시킨 사건도 있었다고 한다. 다만 러시아 정부는 본 사건을 부정하고 있다. 이러한 위험성 때문에 우키시마마루는 기뢰와 잠수함을 피해 마이즈루로 향했다는 반론이다.

일본 측은 해군운수본부에서 오미나토 경비부와 우키시마마루의 함장에게 "8월 24일 오후 6시까지 부산에 들어가는 것은 무리인 듯 하니 근처 항구에 입항하라"라는 명령을 내렸고, 우키시마마루는 이 명령에 따라 마이즈루로 방향을 돌렸다고 주장한다. 또한 기뢰 및 잠수함의 위협 등 여러 요소를 감안해 일정을 짰다고 한다.

그러나 "마이즈루로 방향을 바꾼 이유가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지적이 많다. 특히 기뢰를 피하려고 했다면 상식적으로 기뢰가 많이 깔린 일본 근해가 아닌 동해를 횡단하는 항로를 택하는 것이 가장 빠르고 안전했을 것이다. 때문에 일본군이 의도를 가지고 마이즈루 쪽으로 방향을 돌린 게 아닌가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실제 어떤 생존자는 "배가 부산항으로 가는 게 아니라 원산항으로 간다고 듣기도 했다"고 한다.

일본은 "우키시마마루에 타고 있던 조선인 송환자는 3,725명, 해군 장병은 255명이었으며 이 가운데 조선인 524명과 승조원 25명이 사망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하지만 승선명부를 일본이 작성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정확히 몇 명이 승선하고 사망했는지도 모른다. 간단히 말해 일본이 공식 발표한 승선자 수와 사망자 수는 많이 다르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생존자들은 "일본이 공식 발표한 숫자보다 더 많은 조선인들이 우키시마마루에 타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라 확실치는 않지만 대략 7,000명에서 7,500여명의 조선인들이 우키시마마루에 타고 있었다고 한다. 채길영 씨는 무려 12,000여명이 탑승하고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사망자들의 숫자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생존자들과 당시 현지 주민들의 증언을 취합하면 최소한 1,000여명 이상이며 3,000~4,000여명, 심지어는 5,000여명이 사망했다는 주장도 나왔다.

일본 정부는 사건이 일어난 뒤 연합군 사령부에 이 사건을 보고하면서 사망자 숫자가 256명이라고 축소보고했다. 공식 발표에서 언급한 524명보다도 더 줄어든 숫자다.

게다가 일본은 1954년에 우키시마마루의 선체를 민간기업에게 인양하게 하면서 재일 조선인들의 사건 진상조사 요구를 묵살했다. 그리고 인양된 선체는 아무런 조사도 없이 민간기업에 고철로 팔아 넘겼다.

후에 우키시마마루 사망자의 유골이라면서 300여 구의 유골을 반환했지만, 조사 결과 여러 사람의 유골이 뒤섞인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1977년에 일본의 공영방송 NHK에서 다큐멘터리 <폭침>이 방영되면서 본 사건이 다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1992년 생존자와 유족들은 일본 법원에 일본 정부에 이 사건에 대해서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2001년 8월 23일, 교토지방재판소에서는 일본 정부의 안전 배려 의무 위반을 이유로 생존자 15명에게 1인당 300만 엔의 위로금 지급 판결을 내렸으나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 요청은 기각했다. 그러나 이 판결마저 2003년에 오사카 고등재판소에서 번복되어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일본 법원은 설령 일본 정부의 책임이 있다 하더라도 한일기본조약에 의해 보상은 끝났다고 주장하며 기각 사유 중 하나를 밝혔다.

하지만 설령 일본이 주장하는 대로 사고가 맞다 하더라도 일본 정부가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일제강점기의 관계 청산 논란을 떠나서 단순히 선박과 승선객의 관계에서 봐도 본 사건은 아직 전시 상태이고 당시 일본 해군 병사들도 반대했을 정도로 위험했던 상황을 무시한 채 항해를 강행하여 수많은 승객들의 생명을 앗아간 안전사고로서 피해자 및 유족들이 충분히 배상받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대한민국에서는 1993년 천안에 설립된 우키시마호 진상 위원회와 2011년 부산에서 설립된 우키시마호 폭침 한국 희생자 추모 협회가 진상 규명을 촉구하여 왔으나 일본 정부는 물론 한국 정부 역시 2015년 이후로 조사를 하고 있지 않는 상황이다.

한편 번역가 이윤기 씨가 이 사건으로 희생된 사람들의 위령비를 탐사한 적이 있다. 당일 밤 희생자들을 생각하며 소주를 많이 마시고 많이 울었다고 한다.

현재 한국과 일본 양국에 사건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조형물이 있다. 한국에는 부산 중앙동 수미르공원에 희생자 위령비(2005)가 있고 일본에는 우키시마마루가 침몰한 해안 근처의 섬에 '순난의 비'가 있다.

2023년에 마이즈루시 주민들로 구성된 단체인 '추도회'에서 희생자들의 집단 매장지로 추정되는 장소 3곳을 찾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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