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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人物) 열전

오다 노부나가는 누구인가?

by 청풍명월7 2023. 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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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 노부나가는 누구인가?

오다 노부나가

 

[서론]

오다 노부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덕천가강) 그리고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 일본에서는 이 셋 중 노부나가를 최고의 인물로 꼽고 있다.

18세(1551년)때 오와리(尾張)의 반정도를 상속받은 그는

혼노지(本能寺)에서 죽었을 무렵(49세 1582년) 무렵

혼슈(本州)의 중앙부분을 대부분 장악했다. 천하통일을 눈앞에 둔 셈이다.

 

그는 4시에 일어나 가장 빠른 말을 타고 달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그는 항상 똑같은 곳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왕복 40리(16km)를 말을 타고 달리면서,

가는 길에는 전략을 짜고 돌아오는 길에는 결단을 내렸다.


 

일본 전국시대 어지러운 전란속에서도

늘 날카로운 예지와 결단을 보이면서 결국 패권을 쥘 수 있었던 것은 이 아침 말위에서의 사색 덕분이었다.

 

 그의 사후 전국을 통일한 기노시타 오우기치로(후일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오전 3시쯤 일어나 말이 달릴 수 있도록 준비했고,

 

노부나가의 신발을 자기 품속에 넣어 따뜻하게 데운 시종이었다.

 

[노부나가의 일생]

 노부나가는 오와리의 호랑이로 불리던 오다 노부히데의 아들이다.

어려서 부터 정상적인 사고방식과 생활을 거부한 그였기에, 오와리의 바보, 멍청이, 또는 개망나니로 불렸다.

그무렵 인접국인 미까와에서는 오까사끼성주의 아들 다케치요(후의 -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순뿌로 인질로 보내게 되는데, 중도에 오다와 내통하고 있던 도다 일족에게 붙잡혀, 오와리로 오게된다.

다 죽게된 다케치요를 자신에게 달라고 한 노부나가는 다케치요에게 자신의 생활방식(후의 군전략이 됨)을 접하게 한다.

이것이 바로 1467년이후 지속되어온 전국시대를 종결짓게 되는 두 영웅의 만남이었고, 히데요시 또한 평생을 견제해야 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평생의 동맹자로 만들게 되는  계기가 된다.

여하튼 노부나가는 아버지 노부히데가 죽은후 가문의 적대세력을 모조리 숙청하고,  천하통일의 움직임을 시작한다.

그 첫걸음이 스루가 영주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1/8의 병력으로 승리한 텐가쿠 골짜기의 전투 이다.

또한, 자신의 장인인 사이토 도산을 죽인 그 아들 다쓰오키를 공략하여 영지인 미노를 빼앗고,  에치고의 강자 우에스기 겐신과 대적하고, 매제의 가문인 아사이 가와 아사쿠라 연합과 싸워 승리한다. 

그리고, 교토입성 직전에 가이의 야심가 다께다 신겐과 대치하게 된다.

 

이때, 미카타의 들판에서 이에야스의 학익진과 신겐의 어린진이 대결하게 되는데, 이 싸움에서는 이에야스가 대패한다.

 

그리고 노다성에서 농성하게 되는데, 바로 이곳에서 신겐은 총에 맞아 사망하게 된다.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다께다 신겐이 사라진 것이다.

신겐의 사후에는 아들인 다께다 가쓰요리가 그 아버지의 유언도 지키지 않고 영지를 넘어 노부나가군과  싸우게 되는데, 바로 이 전투에서 역사에 길이남을 총포부대의 사용으로 최강의 다께다 가문의  기마부대(풍림화산)을 전멸시킨다.

이 전투가 바로 나가시노 전투 이다.

 

이리하여 "천하포무" 를 내세워 전국을 종결 짓고자 했던 난세의 풍운아 오다 노부나가는 천하인의 제일선에 서게 된다.

그러나 얼마후 고전하는 히데요시에게 중신인 아케치 미쓰히데의 원병을 파견하였는데,  돌연 회군하여 혼노사에서 주군인 노부나가를 치고 13일간 천하를 차지한 아케치 미쓰히데로 인해,  천하 통일을 향한 49년의 도전에 종지부를 찍게된다. (혼노사의 변)

 

오다노부나가의 전략론

 

1)철포3천정의 신병기를 구사했던 독창력

강인한 의지 

노부나가는 천문20년(1551)아버지 노부히데(信秀)의 급사로 織田가를 상속했다. 18세의 「大うつけ」에게 남겨진 영토는 오와리 중남부의 30∼40만석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이 그의 출발점이었다. 그리고 천정10년(1582)6월 노부나가가 49세의 나이로 짧은 생애를 마감할 당시 그의 지배지역은 近畿, 北陸, 東海, 中部와 中國지방의 동쪽의 반정도해서 30개국이상이었다. 약 800만석으로 일본전국의 거의 반을 지배하고 천하통일을 목전에 둔 압도적인 세력이었다. 그 시대 최강이라 하던 다케다 신켄(武田信玄)과 우에스기 켄신(上杉謙信)이 일생에 걸쳐 얻은 나라가 기껏해야 3∼4개국 100만석 정도다.

 난세의 풍운아. 노부나가를 그렇게 불리는 것이 걸맞은 남자였다. 이 노부나가의 천하평정의 전투는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다른 전국 다이묘보다 앞서 상경에 성공한 것이 노부나가의 생애를 통해서 여러곳에 강적, 난적을 가지게 되었다.  

카이(甲斐)의 다케다, 에치고(越後)의 우에스기, 츄고쿠(中國)의 패자 모리, 이시야마혼간지(石山本原寺)를 정점으로 한 잇코(一向) 잇키(一癸)의 대세력등의 일본전국의 강호가 타도 노부나가의 집념을 불태웠다. 특히 힘들었던 것은 원구(元龜)원년(1570)부터의 수년간이다. 노부나가를 포위한 상황은 절망적 이었다. 직접적인 계기는 노부나가의 도움으로 15대 장군이 된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는 자신이 노부나가의 꼭두각시가 되버렸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15대 장군의 전통적인 권위를 자랑하는 구시대의 대표자인 요시아키는 각지에 밀서를 보내 노부나가에 대한 일대 포위작전을 전개한 것이다. 하지만 노부나가는 용맹과감하게 각개격파의 작전으로 질풍과 같이 전장을 누볐다. 노부나가에게는 악전고투의 상황이었고 사투가 이어졌다. 평범한 무정이라면 망하였겠지만 노부나가는 사방팔방으로 강적을 꾀어내 무찌르고 아수라와 같이 싸워 나갔다

 

연속사격 

 노부나가에게 이런 큰 위업을 이루게 했던 최대의 요인은 군사력이다. 하지만 노부나가가 18세에 이끌었던 군사는 결코 강한 군사는 아니었다. 당시 막강을 자랑했던 신켄의 기마단에 비해 오와리의 병사는 1당5정도였다. 오와리의 풍부한 풍토가 강한 병사를 길러 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부나가는 이 약병을 이끌고 신시대를 열어 갔다. 이 비밀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수수께끼의 열쇠는 이렇다. 노부나가의 개성에 그 해답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노부나가의 군단은 그의 강렬한 의지, 시대를 앞서간 독창성의 표현이다. 하지만 노부나가 군단은 당시 어느 무장도 뛰어난 사람은 없었다.

 

 우선 첫째로 철포라는 장비가 있다. 나가시노 전투에서 다케다 기마단을 압도했던 3천정의 총포에 상징되는 것처럼 노부나가군단은 각종의 신병기를 구사했다. 총포에 관해서는 유명한 에피소드가 있다. 천문22년(1553)네 노부나가가 20세의 봄에 장인인 미노의 사이토 도산과 대면했던 때의 일이다. 도산은 「大うつけ」라는 소리를 듣고 있엇던 사위를 놀려 주려고 대면을 기획했다. 노부나가는 수행원을 7∼800명 정도 데리고 병사들에게는 장창 5백개와 최신병기인 철포5백정을 가지고 위풍당당하게 행진해 갔다. 살모사라고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도산도 간담이 서늘해 큰소리 한번 못 쳤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에 철포는 이미 각지의 무장에게 잘 알려져 있었다. 천문12년(1543)에 타네가시마(種子島-철포를 지칭하기도 함)에 전해진 후 순식간에 전국에 퍼져 천문18년(1549)에는 시마즈 타카히사(島津貴久)가 카지키(加治木)성 공략에 일본에서 처음으로 실전에 사용하고 있다.  

 

홍치(弘治)원년(1555)에는 신켄이 시나노(信濃)의 아사히야마(旭山)성 전투에서 사용하고 오케하자마(桶狹間)전투에서도 이마가와 군은 철포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노부나가는 다른 다이묘와는 철포에 대한 생각이 달랐다. 그는 서양에서 건너온 신병기의 성능과 유효성, 약점을 숙지하고 있었다. 노부나가가 소년시절부터 하시모토 이쯔바(橋本一巴)을 사범으로 해서 철포를 연습했던 것에서 잘 알 듯이 이는 노부나가의 아버지 노부히데도 비범한 인물이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왜냐하면 당시 철포는 아시가루(足經)가 사용하는 것으로 이름있는 무장이 사용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비겁한 무기라는 생각에 일 것이다. 하지만 노부히데도 신켄도 이런 생각은 하지 않았다. 특히 노부나가는 이 신병기의 탁월한 성능에 반해 버렸다. 예를 들어 천문23년(1554)노부나가가 이마가와가 점령하던 知多반도의 村木성채 공격했다. 이때 노부나가는 몇 명의 아시가루에게 철포에 탄약을 장전하고 발사를 해보고 있다. 나중에 나가시노전투에서 위력을 발휘하는 연속사격을 20여년전에 이미 실험해 본 것이었다.

 

집단전법 

 모든 것을 자신이 시험해 본다. 전통과 풍습에 얽매이지 않는다. 이런 유연한 정신으로 노부나가 군단의 철포부대를 창설했다. 그의 독창적인 조직과 전법은 위력이 대단할 수 밖에 없었다. 노부나가 철포부대의 특징중 하나는 신병기의 대량채용이다. 수천정 단위의 철포를 갖추고 게다가 집중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다른 무장이 위협용이나 저격용으로 사용했던 철포를 1선에 집중배치한 것이다. 게다가 이 조직을 집중사격이 가능하도록 편성했다. 노부나가의 총포대는 적에게 틈을 주지 않고 일제사격을 가할 수 있었다. 

 이로써 이런 전법은 당시 오합지졸의 노부나가군을 무적의 군사로 변모시켰다. 집단전이 되면 이미 개인적인 능력과 용기는 요구하지 않고 평균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고 훈련이 잘된 병사가 중요할 뿐이다. 이 훈련에 있어서도 노부나가는 항시 염두에 두고 있었다. 「信長公記」는 여러 차례 노부나가의 「お遊び」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것이 실은 노부나가의 군사훈련이었다. 노부나가의 전법, 전술에 대해 생각하면 선경지명이 있었던 것이다. 노부나가는 이런 놀이를 소년시절시대부터 해오고 있다. 아시가루의 창의 길이를 3間半으로 했던 것도 16∼17세 경이고 河原에서의 죽창을 가지고 놀던 때의 경험에서 생겨났다. 

 이 3間半의 장창에 대해 이야기하면 당시 아시가루(足經)의 창은 3間(5.4m)가 보통이었다. 신켄도 도산도 3間의 창을 사용했다. 왜 노부나가만이 3間半의 창을 사용한 것일까. 이것도 철포부대와 관련이 있다. 노부나가의 전법은 우선 제1선의 철포부대의 일제사격으로 적군의 기를 걱은 다음에 제2선의 장창부대가 돌격해 적을 제압하는 것이다. 이것도 집단전법으로 이 때문에 장창의 길이가 긴 편이 유리했다. 개개인은 약하지만 집단으로서의 힘을 발휘하면 뛰어나다는 것을 안 노부나가의 발상이 놀랍다.

 

천재의 독창력

 노부나가가 구사했던 신병기는 총포만이 아니었다. 노부나가가 세쯔쯔(攝津)의 野田, 福島의 공격시 미요시(三好)와의 전투때 대포를 사용했다고 「信長公記」는 전한다. 당시 大坂의 잇코잇키(一向一癸)세력에게는 그 유명한 철포무리가 있어 철포3000정을 장비하고 있었다. 양군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총격전을 벌여 총포의 소리가 천지에 진동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유명한 사이가(雜加)군단을 노부나가군단도 총포로는 이들을 압도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노부나가가 생각해 낸 것이 대포이다.  

물론 당시 대포의 존재는 알려져 있었다. 포루투칼의 배가 가지고 들여 왔었다. 하지만 이것은 청동제의 대포로 발사시에 가끔 파열하는 위험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노부나가는 달랐다. 화승총과 동시에 철제로 대포를 만들었던 것이다. 노부나가는 이 대포를 공성용으로 사용했지만 그의 독창성을 볼 수 있는 것은 대포를 수군에 이용했던 것이다. 木津川沖해전에서 거대철선에 의해 포격으로 쓰고 있지만 그 이전에도 쓰였다고 한다. 원구(元龜)2년(1571)의 아사이 공격에는 비와호수에 둘러싼 배를 이용해 대포를 싣고 竹生島을 공격하고 있다.  천문(天文)2년(1574)늬 나가시마(長島)의 잇코잇키(一向一癸)의 섬멸전에서도 함선에 대포를 싣고 포격을 하고 있다.

 

 당시 다른 무장은 이 위력을 알면서도 거의 대포를 준비하지는 않았다. 이동이 어려운 것, 대량의 화약의 준비가 번거로워 실용성을 인식하지 못했다. 하지만 배에 싣으면 약점은 단숨에 사라진다. 발상의 전환만으로 대포는 행군의 짐에서 최강의 병기로 변한 것이다. 또 하나 노부나가의 무서운 점은 이 새로운 아이템을 시의적절하게 쓰고 있다는 것이다. 모리(毛利)수군을 격파했던 함재포에서도 최고의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2)樂市樂座를 통한 정보망의 완비

 

연금술사 노부나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삶의 방식은 명쾌했다. 자신에게 부여된 운명으로 오직 천하평정을 목표로 한 삶을 살았다. 한편 그의 생애는 수많은 수수께끼들이 숨겨져 있다. 그 한 예로 자금에 관한 것이 있다. 노부나가가 20세에 장인 사이토 도산(齋藤道三)과의 대면시 5백정의 총포를 갖추었다는 것은 알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노부나가가 18세인 천문(天文)18년(1549) 오미(近江)의 國村의 철포鍛冶(대장간)에게 玉筒5백정을 주문하고 있다. 약관 18세의 젊은이가 쟁쟁한 다이묘가 군침을 흘리던 최신병기를 조달했다는 것도 놀랍지만 자금은 어떻게 조달했는가가 의문이다.

 

 철포는 고가엿다. 그 대량생산의 기술과 시스템이 완성된 토요토미(豊臣)의 시대조차 玉筒이 쌀 9石의 가치였다. 아직 생산량이 적은 천문시대에는 생산량이 적은 만큼 그 가치는 더욱 귀했을 것이다. 쌀 15石의 가치라면 500정도에 7500石, 당시의 아시가루(足經)의 급료는 일년간 1石8斗정도다. 어떻게 약 4200명정도의 군단을 1년간 유지할 수 있고 월급으로 약 5만명정도의 막대한 자금을 노부나가는 철포를 구입하는데 써버린 것이다. 이 당시 노부나가의 힘은 오와리의 반 정도를 통치할 정도의 상태였다. 영지로부터 올라오는 것만으로 자금의 운용이 가능했을 리 없다. 노부나가는 같은 시대의 다이묘에 비해 풍부하나 자굼력을 가지고 있었다. 천정2년(1574) 타케다 가쯔요리(武田勝賴)가 토토미(遠江)의 이에야스를 공격할 당시 구원군의 도착이 늦음의 보상으로 말 두필분의 황금을 이에야스에게 보냈다. 이에야스의 가신들은 “본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는 양이다”라고 놀랐다고 한다. 사카이(界, 오사카 남동쪽의 항구)의 호상 津田宗及는 천정7년(1579)정월 아즈치(安土)의 천수각에서 황금 일만 매(枚)를 보고 細川幽齋·忠興부자도 같은 장소에서 다량의 황금을 보고 감탄했다고 한다. 기후성에도 일만오천관이상을 비축해두고 있었다. 이런 노부나가의 후반생에 걸친 황금의 출처는 대략 추측을 하면, 영록11년(1568)에 35세의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데리고 상경한 노부나가는 부장군이나 관령(管領)에 임명하겠다는 요시아키의 권고를 물리치고 그 대신에 이즈미(和泉)의 사카이(界), 오미의 草津, 이쿠노(生野)의 은산(銀山)을 자신이 갖고 싶다고 했다. 여기에서 노부나가의 시대를 꿰뚫어 보는 경제감각이 보여지고 있다.

 

상업도시를 점령한다.

 우선 사카이(界), 草津, 오쓰(大津)의 도시는 당시의 상업유통의 중심지였다. 자금과 정보가 집중된 곳이었다. 노부나가는 副將軍이라는 구시대의 권위보다 이런 상업도시의 지배권과 가세권을 확보해려 했던 것이다. 가까이에 관리를 두고 곧 이어 사카이 상인들에게 만양의 군자금을 요구했다. 사카이의 상인들이 거부하자 10인의 대표를 투옥했다. 이 도시를 지배했던 구세력을 일소하고 신흥 호상(豪商)들을 노부나가의 편으로 만들었다.

 

 당시의 사카이는 일본최대의 총포생산지(토요토미 시대 생산력은 1일 15정, 년간 5000정이상의 총포를 생산)였고 화약의 연료인 초석(硝石)의 수입항구였다. 초석은 일본에서 생산이 안되고 중국이나 인도에서의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노부나가의 생각으로는 사카이는 무엇보다도 먼저 장악해야 할 곳이었다. 草津과 大津에서의 상납금도 막대했다. 이것은 토요토미 시대가 되면 大津으로부터는 년간 銀 700枚의 관세를 징수하고 있다. 비와호를 왕래하는 배의 關錢, 고슈(江州)舟役料도 은 1000枚정도의 막대한 자금이다.

 

 은광산 경영이외에 노부나가는 더욱이 전대미문의 경제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樂市樂座다. 일본의 중세도 노부나가의 시대가 되어 상품의 유통이 많아지고 넓은 범위에 걸쳐 물자의 흐름이 생겨났다. 하지만 이것을 담당하고 있는 것은 사원과 공가등의 구세력에게 독점적인 판매권을 부여받은 상인조합인 「座」에 속하는 상인이 한정되어 있었다. 이 座席를 갖지 못하면 「市」에서 상업행위가 불가능했다. 그러나 전국시대의 상품경제는 이 한계를 어느새 넘어서 발달하고 있었다. 「座」의 상인만으로는 공급이 어려워서 여러 가지 형태의 상인이 등장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유랑하는 もぐり商人이 그들이다. 그들의 활동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전란과 도적도 두려워하지 않고 넓은 지역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노부나가에게 오기 전의 히데요시(秀吉)도 부랑자 행산단에 있었다. 노부나가는 이런 신흥상인에게 착안을 했던 것이다. 그이 생각은 정해진 틀이 없었다. 다른 다이묘가  もぐり商人를 단속했던 것과는 반대로 중세적인 고정관념을 버리고 이 활동성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樂市樂座」인 것이다.

 「座」에 얽매이지 않고 「市」의 座席에 관계없이 누구라도 일정의 자릿세만 내면 자유롭게 영업을 할 수 있는 시장이다. 노부나가의  樂市에 거주하는 사람은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자유를 부여받은 것이다.

 

 영록10년(1567) 이나바(稻葉)산성을 공략해서 미노를 수중에 넣은 직후 노부나가는 카노(加納)에 樂市령을 내렸다. 이것에 의하면 樂市場에 오는 사람은 각종의 세를 면제하고 영국내의 교통의 안전을 보장했다. 게다가 여기에 왕래하는 사람은 부담스런 빚도 탕감하는 것도 보장했다. 즉, 이 장소에 들어오면 영주의 세금을 체납한 농민이라도 土豪의 노예적인 농민이라도 일체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돼 지나이마치(寺內町)라는 한정된 공간이 자유의 세계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었다. 여기서는 구시대의 권위가 부정되엇다. 봉사해야하는 것은 노부나가 한 사람이었다. 대단한 결단이 아닐 수 없다.

 

정보가 돈이 된다.

 이후 노부나가는 최후의 거성 아즈치(安土)의 성아래를 시작으로 오미(近江). 미노(美濃), 이세(伊勢), 호오료쿠(北陸)등에 차례로 樂市場을 열었다. 이런 장소에서 상업이 번영하고 노부나가에게 막대한 수입을 가져다 준 것이다.

 

 사카이(界)와 오쓰(大津)의 상업도시를 제압하고 게다가 새로운 상업정책을 실시해 막대한 자금원을 창출해낸 것이다. 하지만 노부나가의 「樂市樂座」정책은 단순히 자금을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樂市樂座에는 수많은 사람이 모였다. 그것도 토지에 얽매인 농민과 그들을 지배해서 권위를 유지하고 있는 권력이 있는 사람이 아니다. 기성사회로 보면 무뢰한들이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진취적이고 자유의 기풍을 가진 종래의 사회에 얽매이지 않은 새로운 유형의 인간이 모인 것이다. 노부나가의 주위에는 혼돈스럽지만 시대를 넘어서 넘쳐 나는 에너지로 활동력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러한 그들은 또 엄청난 정보원(情報原)이었다.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여러 다이묘의 영지를 돌아 다닌 그들은 다양한 정보와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사람들이 노부나가의 주위에 집중해 있던 것이다. 한 예로 기후(岐阜)시대의 히데요시에게는 연중 정체를 모르는 방문객과 손님이 있었다. 여행중이 승려, 행상인, 기술자, 낭인, 예술가 등이 온 것은 히데요시와의 면담때문이었을 것이다. 유랑하는 사람들을 조직해 최고로 우수한 정보망을 히데요시는 구축하고 있던 것이다. 그것도 노부나가의 지시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럼 노부나가는 최고의 정보망을 가진 주인인 것이다. 노부나가는 정보가 戰國亂世를 평정하는 데 중요한 무기라는 것을 숙지하고 있던 것이다.  

 

天下布武를 향한 대전략

 

 외교가 노부나가

 일찍이 “천하포무의”의 의지를 가진 노부나가는 다른 다이묘와가가 상상도 못할 정도의 구상을 했다. 군사만이 아닌 여러 가지 정치적, 외교적 수단도 종횡으로 구사하고 있다. 특히 외교전략에서는 능숙한 솜씨를 발휘하고 있다, 노부나가는 오케하자마(桶狹間)전투후 동족의 이마가와(今川)의 영지가 아닌 미노(美濃)로 향했다. 미노공략에 앞선 영록(永綠)5년(1562) 노부나가는 인접국 미카와(三河)의 도쿠가와 이에야쓰(德川家康)와 공수동맹을 맺는다. 하지만 전국의 외교전략의 상식은 이해관계의 충돌이 없는 멀리 떨어진 나라와 동맹을 맺고 배후를 견제하고 가까운 곳을 공략하는 “遠交近功”이었다. 하지만 노부나가는 이 상식을 깼다. 이에야스라는 인물은 의리가 두터운 사람이라고 신임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 동맹은 노부나가가 혼노지(本能寺)에서 쓰러지기까지 20년도 넘는 긴 세월에 걸쳐 유지되고 있다. 이에야스는 신켄(信玄)의 대군을 맞아 자국의 멸망의 위기에 빠졌을 때 조차 노부나가와의 약속을 깨지 않았다. 노부나가는 물론 遠交近功도 했다. 미노공략에서 그 배후인 북오미(近江)의 아사이 나가마사(淺井長政)에게 동생 お市을 시집보내 동맹을 맺었다. 이 공수동맹은 원구(元龜)원년(1570)아사이에 의해 파기되었지만 이는 노부나가가 나가마사와의 약속을 어기고 에치젠(越前)의 아사쿠라(朝倉)를 공격했기 때문이다.

 

 아사이와 동맹을 맺은 다음해 영록8년(1565) 노부나가는 양녀를 다케다 신켄(武田信玄)의 아들 가쯔요리(勝賴)에게 시집을 보냈다. 이 동맹은 강호 신켄에 대해 노부나가가 저자세를 보이고 있다고 해도 좋다. 강자와는 싸우지 않는다는 노부나가의 철저한 현실주의 가 보인다. 나중에 에치고(越後)의 우에스기 켄신(上杉謙信)과의 동맹을 맺는데 이 또한 같은 경우라 할 수 있다.

 

 誘降전략(적의 포섭)도 구사했다. 적을 설득시켜 내응하게 하는 모략을 노부나가가 처음으로 사용한 것은 미노 공격때였다. 수년간에 걸쳐 미노의 무사들을 회유해 아군으로 만들었고 미노 3인방이라 불리는 사이토 도산(齋藤道三)의 부장을 설득시켰다. 후에 히데요시(秀吉)의 참모가 되는 타케나카 간베에(竹中半兵衛)도 이때 노부나가편에 가담했다. 이 때문에 노부나가가 이나바(稻葉)산성을 급습했던 때는 도산도 수습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난공불락이라 불리던 명성(名城)이 순식간에 함락된 것이다. 

 

 천정원년(1573)의 아사이, 아사쿠라 공격에서는 아사이의 가신 阿閉貞征와 오미의 토호들을 배반시켜 고다니(小谷)성을 고립시키고 있다. 에치젠의 아사쿠라의 부장들도 많은 수가 노부나가의 계략에 의해 내응해  아사쿠라 요시카케(朝倉義景)는 일족에게 공격당해 자멸했다. 다케다씨를 섬멸할 때도 木曾義昌과 일족인 穴山梅雪들의 중신들을 이반시켜 가쯔요리를 파멸에 이르게 하고 있다. 오케하자마(桶狹間)전투 이외에는 항상 상대를 상외하는 대병으로 적을 분쇄했던 노부나가이지만 그전에 이렇듯 전략을 구사해 그 기세를 꺼고 마지막에 결전에 들어간 것이다.   

 

 

권위는 활용한다

 노부나가의 계략이 한층 돋보이는 것은 강화전략에 있다. 즉, 화평공작에 조정의 권위를 이용하고 있다. 노부나가와 조정의 관계는 깊다. 노부나가의 아버지 노부히데는 천문9년(1540) 外官御展의 조영비용을 바치고 그 공으로 미카와노카미(三河守)를 임명받았다. 게다가 천문12년(1543)에는 천황이 거처하는 內裏의 수리비용으로 4000량을 헌납했다. 노부나가도 영록11년(1568)에 상경해 다음해부터 村井貞勝에게 명해 3년에 걸쳐 內裏를 수리하고 있다. 노부나가는 수리와 동시에 도성안의 사람들에게 쌀을 빌려주고 이 이자로 조정의 수리비용을 충당하라고 지도하고 있다. 중앙권력의 상징으로의 조정권위와 유효성을 꿰뚫어 보고 있는 것이다.

 

 이어 노부나가가 처음으로 조정을 이용했다고 보는 강화전략은 아네가와(姉川)에서 아사이·아사쿠라 연합군을 격파한 원구(元龜)원년(1570)년 말경이다. 아네가와(姉川)에서의 대승에도 불구하고 노부나가는 그 후도 연합군과 대치해 교착상태에 있었다. 이것을 본 미요시(三好), 록가쿠(六角), 혼간지(本願寺)의 반(反)노부나가 세력이 공격해와 적의 포위망에 빠져 버릴 위험이 생긴 것이다. 이것을 피하기 위해 이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 일련의 사태가 장군 요시아키에게 원인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잇는 노부나가는 요시아키에게 알선을 도모했다. 노부나가의 요구를 거절하면 자신의 음모가 밝혀지는 요시아키는 하는 수 없이 조정에 주청을 해 강화권고의 칙령을 내렸다. 노부나가는 기분좋게, 아사이·아사쿠라는 마지못해 권고를 받아들여 양군은 철수했다. 이런 감각의 고도의 전략으로 노부나가는 최대의 위기를 벗어난 것이다. 노부나가타도의 절호의 기회를 자신의 손으로 망쳐버린 요시아키는 그의 권위가 추락하는 것을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노부나가의 고등전략을 최대의 난적 이시야마혼간지(石山本原寺)와의 전투에서도 사용하고 있다. 노부나가가 가장 위험하게 궁지에 빠져버린 것이 천정6년(1578) 가을이었다. 하리마( 播摩)의 別所長治, 세쯔쯔(攝津)의 荒木村重, 高山右近등이 모리(毛利), 혼노지(本原寺)와 결탁해 모반을 했다. 노부나가는 이 불리한 전황을 타개하기 위해 재차 조정에 화의알선을 요청한다. 조정은 혼간지(本願寺)에 칙사를 보내고 그 결과 혼간지(本願寺)는 모리와의 거리를 두어야 했다. 한숨을 돌린 노부나가이지만 칙사가 모리에게 출발하기 직전에 돌연 강화의 알선을 일방적으로 철회했다. 사실 그 짧은 기간에 노부나가 수군의 거대 철선이 木津川沖에서 모리수군을 격파하고 또 게략에 의해 高山右近과 中川淸秀가 투항한 것이다. 이어 천장8년(1580)의 혼간지(本願寺)를 양도받고도 병력의 보급로를 차단시켜 차츰 피로를 보이기 시작한 농성중인 잇키(一癸)무리들 사이에 화의파와 전투파의 대립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 노부나가가 조정에 강화의 알선을 요청한 것이 성공했던 것이다. 난공불락의 요새를 무혈입성한 것이다.

 

 

전격군단의 비밀

 그러나 아무리 계략을 쓰더라도 실제 병력이 따라주지 않으면 실효가 없었다. 이 때문에 노부나가는 부국강병에 전력을 기울였다. 노부나가는 도로망을 완벽하게 정비했다. 도로는 전략상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군대와 군수품의 수송로이기 때문이다. 특이 노부나가 군단은 신속한 기동력으로 알려져 있지만 적의 의표를 찌르는 그 기민한 군사행동은 정비가 잘된 도로망이 있어서 가능했던 것이다. 노부나가의 주위에는 모두가 적이기 때문에 이러한 도로망의 활용은 중요했다. 노부나가의 교통전략은 스케일이 컸다. 영국내의 도로의 폭은 3間半(6.4m)으로 강이나 하천에는 다리를 만들고 도로는 정비해 직선화 시켰다. 그 양측에는 가로수로 소나무와 버드나무를 심었다. 노부나가의 전략사상이 여실히 나타나고 있는 것이 나카센도 스리바도우케(中山道 磨針峠)의 개수공사다. 인부 2만명을 동원해 폭 5.4m, 깊이 1m의 땅을 파고 암석은 화약으로 파괴했다. 그 결과 기후(岐阜)와 교토(京都)의 거리가 3㎞나 단축되었다. 노부나가 군단의 행동력은 말로 달려 5시간에 50㎞로 시속10㎞/hr, 도보부대는 5시간에 20㎞로 시속 4㎞/hr인데 3㎞거리의 단축은 기병으로 1시간, 보병부대로는 반나절 정도가 된다. 磨針峠의 개수로 인한 거리 단축이 실제에는 보병부대의 교토입성의 도달거리를 거의 하루를 앞당겼다.

 

 이 교통망을 이용한 전격작전으로 천정원년(1573) 7,8월의 행동이 있다. 7월3일에 장군 요시아키가 宇治에서 거병을 한 소식을 듣고 6일 노부나가는 새로 만든 쾌속정으로 비와호를 長浜에서 坂本까지 60㎞로 하루만에 건너 하루 밤을 잔 후에 7일에 입경, 순식간에 전島성에 잇는 요시아키를 추방했다. 또 8월8일 밤에 기후(岐阜)에서 출진해 북오미(近江)에서 아사아·아사쿠라와 대치하고 13일 밤에는 퇴각하는 아사쿠라군을 추격해 쯔루가(敦賀)에 이르러 16일까지 머물고 17일에는 에치젠을 공략하고 20일에는 아사쿠라 요시카케(朝倉義景)를 자결하게 한다. 26일에는 노부나가가 북오미(近江)에 돌아와 다음날 밤에는 히데요시의 군세가 고다니(小谷)성을 공략해 그 결과 아사이 나가마사(淺井長政)도 자결하게 된다. 강적, 난적과의 전투는 작은 공격과 계략을 게속해 상대를 약하게 만들고 기회가 보이면 전격적으로 격파하는 노부나가의 작전은 이러한 도로의 전략에 유지되었던 기동력이 있었기 때문에 실현이 가능한 것이다.

 

 

미완성의 마지막장

 마지막으로 노부나가의 전략은 철저하게 구시대의 타파가 필요했을 것이다. 노부나가는 일체의 우상을 경시하고 구시대의 귄위를 집요하게 공격하고 있다. 히에이잔(比叡山)을 공격하고 곳곳에 불을 질러 승려 1600여명을 살육했던 사람이다. 천정9년(1571)에는 眞言宗의 명사찰 이즈미(和泉)의 마키오지를 공격 한 때도 堂塔伽藍에서 經典까지 일체를 불태웠다. 노부나가의 검지실시에 따르지 않았다는 구실로 무엇보다 승려들이 무력을 축적하고 사찰릐 영지를 늘려 부를 탐내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또 노부나가는 필요가 없는 성곽은 파괴하고 있다. 영국 오와리(尾張)도 오케하자마(桶狹間)전투이전에 후루와타리(古波)성과 이와쿠라(岩倉)성을 모조리 부수고 있다. 야마토(大和)에서 마쯔나가 히사히데(松長久秀)가 있었던 다몬(多聞)성을 부수고 고리야마(郡山)성을 모조리 파괴해 버렸다. 이렇게 크고 작은 성채는 각지의 무사들의 근거지엿지만 이 또한 구시대 권위의 상징중 하나였고 천하통일을 지향한 노부나가에게는 구시대의 유물에 불과했다.

 

 이렇듯 노부나가의 갖가지 파괴전략은 난세를 통일하고 새로운 천하를 만들기 위한 큰 목표로부터 생겨난 것이다. 건설을 위한 대파괴였던 것이다. 하지만 노부나가는 천문10년(1582) 6월2일 혼노지(本能寺)에서 쓰러져 그의 천하인의 꿈은 사라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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