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Nostradamus_주요 예언

006_Nostradamus(노스트라다무스)_젊은 사자가 늙은 사자를 이기도다.

by 청풍명월7 2023. 9. 11.
반응형

젊은사자가 늙은사자를 이기도다.

앙리2세 사망에 대한 예언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노스트라다무스를 믿었던 프랑스 왕비 까뜨리느는
남편에게 경고했지만 결국 앙리2세는
마상 창시합 도중 상처를 입고 사망하게 됩니다.
그전에 앙리2세는 그의 예언에 대해 추궁했습니다.

까뜨리느 왕비

젊은사자가 늙은사자를 이기도다.
싸움터에서 단 한 번의 싸움으로
황금새장 속의 눈을 찌르리라
두 상처가 하나로 변하고, 처참하게 죽으리라.(백시선 1권 35편)

아무도 예언을 믿지 않았습니다.
2년후 앙리2세는 창시합에 참가했습니다.
앙리의 상대도 황금투구를 섰으며 두사람의 방패에는 사자문양이 있었습니다.
서로 몇차례 공격을 가했습니다.

<풀이>
젊은사자는 바로 사자문양의 방패를 든 몽고메리를 말하는 것이며
늙은사자는 바로 사자문양의 방패를 든 나이가 연장자인 앙리2세를 말한다.
싸움터는 바로 마상 창시합을 말한다.
한번의 싸움으로는 창과 방패가 충돌한 것을 말한다.
황금새장은 황금으로 만든 투구를 말한다.
그 황금새장속의 눈을 찌르리라는 말 그대로 이다.
눈에 난 상처가 감염으로 번저 결국 10일만에 죽는다
그것도 고통스럽게 죽는다.
이렇게 예언시는 사전에 풀이가 어려운 방식으로 소개하고 있다. 또한 사고가 난 다음에야 그 이야기구나
라고 알 수 있도록 해 두었다. 그래서 다양한 해석이 필요하고 긴가 민가 한다.

*** 앙리2세 ***
프랑스 왕국의 국왕, 발루아-앙굴렘 왕조의 제2대 왕
출생1519년 3월 31일, 생제르맹앙레 궁전
사망1559년 7월 10일(향년 40세), 보주 광장
1559년 6월 30일, 이 결혼을 축하하는 잔치에서 토너먼트 마상창시합이 있었는데 스코틀랜드 근위군 대장이었던 콩테 드 가브리엘 몽고메리와의 창 시합에 직접 참가했다가, 몽고메리 경의 창날이 부러져 투구 틈새로 파고 드는 사고가 일어나는 바람에 오른쪽 눈 바로 위에 창의 파편이 박히고 말았다. 앙리 2세를 치료하기 위해 당대의 명의인 앙브루아즈 파레를 불러 사형수 6명으로 사전 시험을 벌이며 수술을 하기도 했고, 해부학의 선구자인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까지 불러서 베살리우스가 파편을 제거하는데는 성공했지만, 7월 10일 앙리 2세는 부상에 일어난 감염으로 두통에 시달리다 결국 고통스럽게 사망하고 말았다. 이때 그의 나이 향년 40세였다. 여담으로 여동생 마르그리트와 사보이아 공작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는 앙리 2세가 죽기 전날 결혼했다. 앙리 2세는 만약 여동생의 결혼 전에 자신이 죽어버리면 사보이아 공국이 조약을 위반할지도 모른다고 여겨 죽어가는 와중에도 결혼식을 재촉했고, 결국 마르그리트와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는 성대한 결혼식 대신 눈물바다가 된 생폴 대성당에서 결혼식을 치러야만 했다.

H.Grobet 作(1902), 1559년 앙리 2세의 죽음_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 그대로 늙은 사자가 죽는다.


이렇게 앙리 2세가 사고사한다는 것을 예언해 유명해진 사람이 바로 노스트라다무스였다. 
참고로 몽고메리 백작은 왕을 죽였지만 고의가 아니었기에, 앙리 2세가 특별히 사면령을 내리고 죽어 마창시합 자체로는 추궁을 당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든 왕을 죽였다는 전적으로 인해 전통적인 귀족 생활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당연히 프랑스 왕실로부터 푸대접을 받았으며 그래서 불만은 품은 몽고메리는 개신교로 개종한 이후, 플랑드르로 도망갔다가 위그노 전쟁 중에 잉글랜드군을 이끌고 고향인 노르망디의 개신교 반란을 획책하기 위해 돌아왔다가 프랑스군에게 붙잡혀 처형당했다. 이후, 다시 프랑스에 돌아오게 되는 그의 먼 후손이 버나드 로 몽고메리였다.

프랑스왕 앙리2세

마지막 일격을 가하는 순간 상대의 창이 너무 높았고
부딪히는 순간 창이 둘로 쪼개져 하나는 앙리2세의
목에 다른 하나는 황금투구를 뚫고 그의 눈에 정확히
박혔습니다.

마상창시합

앙리2세는 정확히 열흘 후에 죽었습니다.
예언이 적중하자. 그는 예언가로서
유명했졌습니다.

중세유럽의 마상창시합

앙리 2세의 죽음은 프랑스 왕실의 엄청난 충격이었다.
또한 자녀들에게도 불행이 지속되었다.

앙리2세의 가계도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