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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phecy(예언)

[예언]허운 대사 (1840-1960) 중국. 러시아. 한국 미래 예언

by 청풍명월7 2023. 9.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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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운 대사 (1840-1960)의 중국. 러시아. 한국 미래 예언

허운노화상 일백십팔세 법상 정유추어 운재산


  2025년 을사년(乙巳年), 중국(中國)은 통일을 이루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대규모 전쟁은 피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중국 남쪽 섬 대만(臺灣)은 초토화된다. 중국 본토 또한 바다 건너 큰 군대 미군(美軍) 공격으로 인해 중국 여러 곳에 불기둥이 솟고, 중국은 멸망한다. 불구덩이 속에 빠져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며, 오로지 큰 덕을 쌓은 사람만 겨우 재앙을 모면한다.
 2025년 을사년(乙巳年), 
러시아(Rusia) 기운은 크게 쇠락할 것이다.
 2046년 병인년(丙寅年) 
한국(韓國) 완전한 통일을 이루고, 세계에서 가장 강성한 나라가 된다. 한국에 세계 각국 인민들이 모두 몰려온다.

 허운 대사(1840-1959)는 중국 서태후를 만나서 한여름에 눈을 내리게 하고, 허운 대사 자신의 1959년 10월 13일 임종 입적 날짜와 서태후(1835-1908) 및 마지막 황제 푸이(1906-1967)의 죽는 날짜를 모두 정확하게 예언했다. 1959년 마지막 열반을 앞두고, 2권의 예언서를 제자들에게 남겼다. 그러나, 1권은 문화 대혁명 시기에 불타 없어지고, 남은 1권은 복건성(福建省) 백마사(白馬寺) 깊은 곳에 감춰져 있다가 2016년 마침내 세상에 드러났다. 그 예언서에 따른 가장 큰 관심사는 중국 통일과 한국 통일 및 러시아 미래에 관한 언급이다. 허운 대사는 중국 문화 혁명의 미래를 내다보았고, 중국 멸망 시기를 예언하였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모두 중국을 떠나도록 명령했다. 그래서, 허운 대사의 제자들은 홍콩. 대만. 싱가포르. 미국 등으로 모두 망명하였다.

 허운 대사(1840-1959)는 1840년 중국 호남성(湖南省)에서 태어나서 19세에 출가했다. 중국 불교사에서 매우 위대한 고승 가운데 한 분이다. 그는 순례 고행에서 큰 깨달음을 얻었다. 120세 나이로 1959년 10월 13일 입적했다. 허운 대사는 수행을 통해 앞날을 정확하게 내다보고 예언하셨다. 선사(禪師) 일생은 중국 100년 재난과 함께 하였다. 출생할 때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서모 슬하에서 자랐다. 현대 불교 100년 동안 고행을 하고, 15개 도량을 행각하며, 6대 조정(祖庭)을 중창하였다. 선종(禪宗) 오종을 계승하였으니, 제자와 신도들이 수백만 명에 달하는 고승이며, ‘선종(禪宗)의 태두’라고 칭송된다. 허운 선사는 어렸을 때, 스승에게 유가(儒家)의 글을 배우고, 불법을 신봉하는 할머니 영향을 받아서 한마음으로 부처님을 섬겼다. 17세 때 남악에 출가하러 갔는데, 길이 익숙하지 않아서 도중에 가족들에 의해 집으로 돌아왔다. 19세에 복건성(福建省) 고산 용천사에서 출가하여 상개 선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다음해 계를 받았다. 가족들이 찾아오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사원 뒤에 있는 동굴에 살면서 3년 동안 고행을 하다, 부친이 나이가 들어서 고향으로 이사한다는 소리를 듣고서야 동굴에서 나왔다. 나중에 다시 산에 가서 3년 동안 고행하였으니, 모두 합하면, 6년이나 동굴 수행을 한 것이다.

27세에 고산을 떠나 절강의 명산과 큰 사찰에 가서 명망 높은 선사들을 참방하여 경전의 가르침을 배우고, 선종을 탐구하였다. 이후, 부모님 은혜에 보은하기 위하여 일찍이 23개월 동안 보타산에서 오대산까지 3보 1배를 하는 도중에 생사를 경험하였다. 서장에서 인도, 스리랑카, 미얀마로 부처님 자취를 따라 순례하였다. 미얀마에서 본국으로 돌아오면서 운남 계족산을 참배하고, 귀주, 호남, 호북 등지를 경유하여 안휘성(安徽省) 구화산을 참배하였다. 다시 양주 고민사에 가서 깨달음을 얻었다.

1900년 8국 연합군이 중국 북경을 침공해 들어오자, 허운 선사 신도들은 선사의 안위를 걱정하여 서안(西安)으로 피신할 것을 권하였다. 허운 선사는 서안 와룡 선사에 머물며, 법을 널리 펼치고, 큰 가뭄과 전염병의 재난을 해결하고, 와룡 선사를 조용히 떠났다. 허운 선사가 비록 머문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와룡선사의 중흥을 이룰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여 최근의 복구도 가능하게 되었다. 1901년 허운 선사는 종남산에 초가집을 짓고 2년 동안 깊이 수행하였다. 그 뒤, 계족산에 가서 발우암(鉢盂庵) 주지를 하며, 남양 등지에 사찰을 세우기 위해 보시(普施)를 구하였다.

1912년 청나라가 멸망하고, 중화민국 중국(中國)이 건립되었다. 그리고, 승려를 환속시키고, 절을 훼손하는 풍조가 나타났다. 운남성(雲南省) 군대 사단장이 친히 허운 선사를 붙잡으러 왔는데, 설법으로 설복시켜 허운 선사에게 귀의하였다. 1918년 허운 선사는 남양에서 옥불(玉佛)을 청하여 축성사로 돌아와 사원을 중건하였다. 이후, 고산에서 주지를 하며, 조계 육조의 도량 남화사를 중창하였다. 1959년 10월 13일, 허운 선사는 중국 강서성(江西省) 운거산 진여사에서 세수 120세로 입적하였다. 허운 선사는 머무는 곳마다 쇠락한 사찰을 복원하였지만, 스스로는 항상 하나의 삿갓, 하나의 불자(拂子), 한 벌의 납의, 걸망 하나만 몸에 지녔을 뿐, 입적할 때까지 낡은 초가집에 머물렀다.

허운 선사는 100년 생애 가운데 항상 선(禪) 수행에 몰두하면서 한편으로 10여 종의 불교 서적을 저술하였다. 평생 대중과 제자들에게 강경하고 설법한 것을 셀 수가 없다. 허운선사는 한 시대 선학의 대가로 평범하면서 자연스러운 선풍을 주장하며, 수행의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한 능엄경(楞嚴經)을 중시하여 여러 차례 강설하였다. 참선의 목적과 임무는 바로 심견성(識心見性)하여 스스로 불도를 이루어, 우리들 마음 속에 있는 분별과 망령된 욕구를 없애는 것이며, 우리들 마음의 본원을 체득해 깨닫는 것이며, 안에서 찾아 구하는 것이며, 자성의 빛을 드러내어 본래 면목을 철저히 아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중국 운남성 축성사 조당에 모셔진 허운 스님의 좌상


중국 운남성 축성사 조당에 모셔진 허운 스님의 좌상.

청나라는 명대의 선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당시 불교 모든 종파가 그러했지만, 더 이상 불교는 발전되지 못했다. 거의 쇠락의 길을 걸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선종의 쇠락은 외부적 요인만은 아니다. 선의 활발발한 생명력은 사라졌고, 새로운 선이 창출되지 못했다. 청말의 선은 교종의 여러 종파와 융합하는 속에서 본연의 선을 잃어버렸다. 바로 이런 시점에서 허운 선사가 활동하였다. 

허운(虛雲, 1840~1959)의 선은 우리나라 선객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으며, 후대 중국 선객들은 그의 법력은 흠모하고 있다. 한국에도 <방편개시> <참선요지> 등 허운의 선사상이 번역되어 있으며, 필자는 수년전 평전을 저술한 바 있다. 그는 당신 스스로나 중생을 제도할 때, 참선뿐만 아니라 참회·발원·염불을 겸하였고 계율을 엄격히 지키도록 하였다.  

허운의 생애- 출가
허운은 1840년 복건성 천주(泉州)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소옥당은 당시 현의 관리였고, 불심이 돈독했던 양무제의 후손으로서 본래 고향은 호남성 상향이다. 어머니는 허운을 낳자마자 사망했고, 양모에게 양육되었다. 허운이 17세 무렵, 사촌동생과 함께 호남성 남악산 상봉사로 몰래 출가했으나 허운의 아버지의 권유로 집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허운의 출가를 막고자 도교 서적을 권하고, 도인을 불러다 도교 수행법을 배우도록 하였다.   

19세에 허운은 복건성 고산 용천사(湧泉寺)에 출가해 묘련(1824∼1907)화상으로부터 구족계를 받고 고암(古巖)이라고 하였다. 20대에 용천사에서 여러 소임을 보고 있는 와중에 부친이 출가한 아들을 찾아 수백 곳을 다니다 용천사로 들어오자, 허운은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고행하였다.  

허운은 30대 초반부터 40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여러 지역의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공부하였고, 경론을 두루 보았다. 이 시기에 행각하던 중, 관음도량 절강성 보타산으로 들어갔다. 2년여 간 보타산에서 경을 읽다가 43세에 발심해 보타산을 출발해 산서성 오대산까지 3보1배 배행(拜行)을 결심했다.

허운의 생애- 오도          
허운은 3년간의 배행을 마치고, 49세에 아미산에서 티베트·부탄을 거쳐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인도·스리랑카·미얀마 성지를 순례했다. 미얀마를 통해 운남성으로 들어와 계족산을 찾았다. 스님은 계족산이 불교 명산이라고 하여 순례를 왔는데, 계족산 승려들의 모습은 청정하지 못했다. 각 사찰의 승려들이 첩을 거느리고 술과 고기를 먹으며 계족산 승려가 아닌 사람은 사찰 내에 하루도 머물 수 없었다. 

이때 스님께서는 이런 서원을 세웠다. “불연(佛緣)이 사라지는 계족산에 불법을 일으키고 운남성을 불국토로 만들어야겠다.” 

이후 허운은 천태산을 거쳐 지장도량 구화산에 머물렀다. 허운이 구화산에 3년간 머물렀는데, 이곳에서 고민사(高旻寺) 주지 월랑을 만났다. 월랑은 허운에게 이렇게 간곡히 청했다.  

“고민사에서 곧 법사가 있을 예정인데, 옛날 사칠(四七)에 이어 십이칠(十二七)을 합니다. 적산(赤山) 노스님은 먼저 절로 되돌아갔습니다. 허운 스님께서도 법을 호지(護持)해 강소성 고민사에 오셔서 함께 동참해주기 바랍니다.” 

이 인연으로 허운은 고민사에 머물렀다. 선사가 56세 동짓달, 팔칠(八七, 56일) 셋째 날 밤에 6번째 향이 타오를 때, 사미가 다관으로 따라 주는 차를 받다가 뜨거운 찻물이 손에 튀어 찻잔을 떨어뜨렸다. 이때 잔이 깨지는 소리에 깨닫고, 다음 오도송을 읊었다.

잔이 바닥에 탁 떨어져/ 깨지는 소리 분명하고 뚜렷하니/ 허공은 산산이 부서지고/ 허황된 마음 그 자리에서 고요히 쉬었네.// 끓는 물이 손에 튀어 잔을 깨뜨리니/ 집이 부서지고 사람은 죽은 듯 입이 있어도 할 말을 잊었네/봄이라 꽃향기 곳곳마다 가득하니/ 산하대지가 그대로 부처로세.

허운의 생애-교화 및 열반  
63세의 허운은 10여년 전 ‘계족산을 청정 도량으로 만들겠다’는 서원을 지키기 위해 제자 계진과 함께 계족산으로 들어가 석문(石門) 앞에 초막을 지었다. 초막을 짓기 시작한지 며칠 후, 계족산 승려들이 몰려와 ‘계족산은 대대로 승려 자손들 땅인데, 이곳 자손이 아니면 절을 지을 수도 없고, 생활할 수 없다’며 초막을 불태웠다.  

허운은 그들과 대립하는 것보다 때를 기다리기로 하고, 곤명 서산 복흥사(福興寺)로 옮겨갔다. 이곳에서 63세부터 65세까지 3년간 폐관(閉關, 무문관) 수행하였다. 이후 스님은 운남성 일대 여러 곳에서 설법을 청하면, 거절하지 않고 법을 설했다. 

66세의 허운이 계족산 서쪽, 잡초만 무성한 후미진 곳에 움막을 지었는데, 이곳이 훗날 축성사이다. 서산 화정사(華停寺)는 허운이 81세에서 89세까지 머물며 불사했던 곳인데, 스님이 이곳에 머물게 된 연유가 있다. 80여세의 스님이 계족산 축성사(祝聖寺)와 곤명(昆明)을 오가면서 법을 설하던 무렵, ‘서산의 화정사가 프랑스인에게 팔려 외국인의 별장과 오락장으로 사용된다’는 소문을 들었다. 스님은 운남성 도독 당계요에게 화정사에 승려가 상주할 수 있도록 부탁했다. 이런 인연으로 스님은 퇴락해가는 화정사를 중건하게 되었다. 

허운은 95세∼103세까지 육조 혜능 사찰인 광동성 남화사(南華寺)·대감사(大鑑寺)를 수행도량으로 만들었으며 1943년 운문종 근본도량인 대각사(大覺寺)를 복원 불사하였다.  

중국 공산당의 감시하에 있던 허운은 1954년 115세에 강서성 영수현 진여사(眞如寺)에 주석하면서 허물어진 당우를 불사하고 도량을 정비했다. 허운은 이곳에서 1959년 120세로 입적하였다.

허운의 삼매  
허운은 율사요, 강사이기도 하지만 선사로서 법맥을 받은 분으로, 수행에도 철저했던 선지식이다. 스님께서 삼매에 들었던 두 가지를 보자. 

허운 스님이 계족산 축성사를 불사하던 무렵, 태국을 방문해 화교 사찰 용천사에서 한달간 <지장경>과 <보문품>을 강독했다. 어느 날 허운은 가부좌한 채 경전을 독송하다가 입정에 들었다. 얼굴에는 자비로운 미소를 머금은 채 눈을 살짝 감고 두 손을 포갠 채 움직이지 않았다. 스님께서 열반했는지 세심히 살피다가 허운이 삼매에 든 것을 알고 한 승려가 주위에 고요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 무더운 여름, 스님이 삼매에 들어있는 동안 태국의 황제와 황후가 다녀갔고, 수많은 이들이 귀의했다. 스님이 삼매에 들어 있는 동안 절 주변에는 사람들의 물결로 가득 찼고, 경찰까지 대동해 질서를 유지시켰다. 8일째 되는 날에는 외신 기자들이 사진을 찍어가 영국·프랑스·일본 등 해외에서도 스님의 사진과 기사가 실리는 일이 있었다. 결국 9일째 되는 날, 허운의 건강이 염려되어 선사를 흔들어 출정(出定)토록 하였다. 

허운이 장시간 삼매에 들었던 일은 광동성 대각사에 머물 때이다. 1951년 112세에 공산당 병사들이 스님을 구타했을 때, 가부좌한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병사는 퍽퍽 소리가 날 정도로 때리고, 땅에 내던졌다. 병사들이 떠나고, 제자들에 의해 허운은 가부좌한 채 입정에 들었다. 6일째 되는 날, 몸은 점차 길상와(吉祥臥)의 모습이 되었고, 9일째 되는 날에 허운은 선정에서 일어났다. 제자들이 9일이 지났다고 하자, 허운은 ‘몇분 밖에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꿈을 꾼 것 같다. 도솔천에서 미륵보살의 유심식정(唯心識定) 법문을 들었다’고 말했다.  

허운의 선사상 
그의 저서를 살펴보면 화두참선과 정토에 대한 사상을 살펴볼 수 있다. 그 내용은 이와 같다. 

허운이 남긴 것들
허운은 20세기 초, 쇠잔해 가던 중국의 선풍을 중흥시킨 거목이다. 허운이 없었다면 현 중국(대만·홍콩 등)의 선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나라로 치면, 구한말 꺼져가는 불교를 살려낸 경허 선사에 해당한다.

허운은 묘련(임제종 42세)화상으로부터 임제종, 요성(조동종 46세) 화상으로부터 조동종 법맥을 받았다.

한편 당나라 말기에 끊겼던 위앙종·법안종·운문종의 종지를 드러내고, 법맥을 되살렸다. 현재까지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에 선이 면면히 흐르는데, 대체로 허운의 법맥이다. 2대손인 정혜·일성·본환·불원·도륜·관정 등이며, 손상좌에 해당하는 선사들이 대만과 홍콩에서 활동하였다.  

허운선사 이야기

허운선사 이야기
허운선사(虛雲禪師 1840-1959)는 근세 중국의 고승 가운데 최고의 스님으로 칭송받는 분이다 무려 120세를 건강하게 살다가 열반에 드셨다. 허운선사는 중국 원음으로 쉬윈선사이다.
허운선사는 중국의 보타산에서 오대산까지 삼보일배를 하였다. 스님이 그렇게 하고자 한 목적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출가한지 20여년이 넘도록 도업(道業)을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불보살님께 참회하는 것이요, 둘째는 태어나자마자 돌아가신 어머니와 출가로 인해 화병으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은혜를 갚기 위해서였다. 영파(寧波) 아육왕사에서 부모에 대한 효를 갚기 위해 3000배 절을 하고, 연지공양(손가락을 태움)을 올렸다. 허운선사는 도반 4명과 함께 삼보일배의 발원을 세웠다. 절강성 보타산에서 산서성 오대산까지의 긴 여정이다. 절강성 보타산→강소성→안휘성→하남성→산서성(오대산)의 여정이다. 광서 8년(1882)음력 7월 1일 허운스님 나이 43세때 남해의 보타산 법화암에서 부처님전에 향을하나 사르고 삼보일배를 시작했다. 보살의 명호를 부르면서 조금씩 앞으로 전진했다. 그러나 함께 배행(拜行)을 결행한 도반 4명은 중도 포기하고, 허운선사는 혼자서 멀고 험한 길을 가게 되었다.
삼보일배는 티벳트 사람들의 전유물이다. 그들은 절을 할 때 오체투지라기보다 전신투지를 한다. 몸 전체를 땅바닥에 착지하는 것이다. 오체투지를 하는 우리와는 다른 것이다. 먼저 양손을 머리위에 올려 합장 하면서 나를 이곳까지 인도해 주신 스님들께 예배합니다. 두 번째는 가슴에 손을 모으고 부처님께 예배합니다 세 번째는 배 아래로 합장하면서 나를 태어나게 해주신 부모님께 예배합니다라고 하면서 전신투지를 하는 것이다. 티벳트의 전신투지는 우리의 오체투지보다 휠씬 힘이 들고 어렵다. 108배만 해도 몸에 땀에 젖는다.  
오체투지 삼보일배는 차마고도(KBS)에 잘 나온다. 다섯명의 순례자는 스님이 아닌 티벳트 사람들이 자신들이 살고 있는 사천성 더거현 마을에서 2300키로를 삼보일배하면서 5개월을 배행하여 티벳트 라싸까지 가는 과정이다. 20대30대는 오체투지하고 60대 노인 두분은 마차를 끌고 따라간다. 마차에는 먹을 식량과 텐트를 실은 것이다. 각자 소망과 소원이 있는데 불자라면 꼭 해야하는 마음에 빚이 삼보일배인데 마음에 빚을 갚은 것 같다. 나의 죽음을 미리준비하는 것이다. 부처님이 나에게 부자로 만들어 줄 것 같다라는 소망이 있는 것이다. 이들은 2개월동안 라싸의 조강사원에 머물면서 다시 10만배 절을 하고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나중에 청년 두명은 스님이 되었고, 또 한사람은 동충하초를 캐러 산으로 갔고 노인 두명은 고향으로 돌아갔다.
또 영화 <영혼의 순례자>라는 영화도 있었다. 이 영화는 티베트 사람 11명이 각자 자신의 이야기와 희망을 가지고 순례의 길을 떠난다. 1년 동안 2,500km에 달하는 거리를 향해 삼보일배를 배행한다. 이들은 몸 앞에 야크가죽 앞치마와 손바닥 나무판에 의존하여 삼보일배(오보일배, 칠보일배)를 한다. 티베트 성지 라싸와 성산 카일라스산으로 죽기전에 순례를 하는 것이 그들이 원하는 평생의 꿈이었다.
허운선사는 독자고혼서라 홀로 외롭게 삼보일배를 올리며 앞으로 나아간다. 이듬해 하남성(河南省) 어느 지역을 지나면서 큰 눈을 만났다. 바람도 제대로 막지 못하는 허름한 농막에서 밤을 보냈는데 눈은 계속 내리고 사방은 분간하기 어려웠다. 왕래하는 사람은 없고 방향조차 찾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쭈그리고 앉아서 염불을 하였으나,  추위와 굶주림은 점점 심해졌다. 배는 더욱 고파서 실낱같은 목숨을 겨우 부지하면서 이렇게 삼일을 지나니,  굶주리고 얼어서 꼼짝할 수가 없었다. 눈은 그쳐 온 세상이 유리세계였으나 몸은 차갑고 정신은 혼미해져서 돌멩이처럼 굳어져 일어날 수도 없었다. 그때 어떤 걸인이 홀연히 나타나 선사가 누워있는 것을 보고, 불을 피우고 죽을 끓여 먹여 살렸다. 스님은 정신을 차리고 그에게 누구냐고 물었다. 걸인은 성은 문(文), 이름은 길(吉)인데, 오대산에서 장안으로 가는 중이라고 하면서, 허운선사에게 ‘무엇을 얻고자 이렇게 삼보일배하느냐?’고 물었다. 신구의 삼업으로 지은 업장참회와 어버이 은혜를 갚기 위함이라고 하자, 문길이 말했다. “이렇게 날씨도 춥고 건강도 좋지 않은데 삼보일배를 하면서 오대산에 가시려고 합니까?”라고 물었다. “삼보일배의 원을 세웠으니 반드시 나의 뜻을 이루고자 합니다”라고 했다. “눈이 아직 녹지 않았으니 일부러 길을 찾을 필요 없이 내가 온 발자취를 따라 가도록 하시오.”
다음날 문길과 헤어져 스님은 몸을 회복해 다시 삼보일배를 하기 시작했다. 보름정도 지나 정월 초하루를 지내고 다시 절을 하는 와중에 복통이 시작됐다. 냉병까지 겹치고 이질(혈변설사)에 걸렸지만 절을 계속했다. 심각한 병중에도 열흘정도 절을 하다가 황사령(黃沙嶺)에 도착해 작은 사찰을 발견하고 쉬었다. 인적은 드물고 음식도 먹지 못한 채 계속 설사를 했다. 며칠을 홀로 앓으면서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마침 문길이 찾아왔다. 이번에는 장안에서 오대산으로 가는 길이라고 하였다. 며칠 동안 문길은 불을 피우고 음식도 끓여주며, 스님의 옷을 빨아주었다. 문길은 “스님의 건강이 별로 좋지 않고 이렇게 효심이 간절하니, 스님의 짐을 오대산까지 들어주고 옆에서 보필해주겠소. 스님은 홀가분하게 절만 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스님은 문길이 짐을 들어주고, 음식까지 시중 받게 되어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절을 할 수 있었다. 어느 곳에서 한 스님이 “어지러운 세상에 시자까지 두고 삼보일배하느냐?”는 꾸지람을 하였다. 문길은 먼저 스님의 짐을 들고 오대산으로 향해갔다. 문길과 헤어진 지 두어 달이 지나서 5월 말쯤 오대산 현통사에 도착해 문길이 맡겨놓은 짐을 찾을 수 있었다. 오대산에서 문길을 찾았으나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스님이 삼보일배한 보타산에서 오대산까지는 4000km이고, 3년이 소요되었다. 어떤 노승이 합장하며 하는 말이 "아마 문수보살의 화현일 것이라"했다.  선사는 그 말을 듣고 수없이 절하였고,  두 번이나 죽게 되었을 적에 보살의 화현을 만나 살아나서 오대산 참배의 서원을 성취한 일을 생각하고 감격하기 이를 데 없었다. (문수성행록)
허운선사는 3년간 삼보일배 배행을 마치고 49세때에 아미산에서 티벳트와 부탄을 거쳐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인도 스리랑카 미얀마성지를 순례했다. 미얀마에서 운남성으로 걸어와서 미륵도량 계족산을 참배하였다. 이어서 천태산 국청사와 구화산 화성사에서 3년간 수행정진 하였다. 95세쯤 육조혜능선사가 수행한 남화사와 대감사에 주석 하셨고, 나중에 강서성 영수현 진여사에서 120세로 열반 하셨다. 허운선사는 이렇게 말씀 하셨다.  
“선이든 정토를 향한 염불이든 본래 모두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이다. 도에는 본래 둘이란 없다. 중생의 근기에 따라 방편으로 중생을 교화한 것에 불과하다. 중국에서 8종의 종파로 나누어진 것도 당시 세상의 추세에 따라 대기설법한 것일 뿐이다. 만약 자기 본성을 체달한 사람이라면 어느 문門이든 모두 도에 들어가는 오묘한 문이요, 높고 낮음이란 있을 수 없다. 게다가 모든 법이 본래 서로 통하여 원융 무애한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망상 없이 오롯한 마음으로 아미타불을 염한다면 그것이 어찌 선을 참구하는 것과 같지 않다고 하겠는가. … 선은 정토 속에 있는 선이고, 또한 정토는 선 안에 있는 정토이다. 본래 선과 정토는 상호 보완하는 작용을 한다.” - <허운화상법휘(虛雲和尙法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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