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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세계대전

[베트남 전쟁]인도차이나 반도의 전쟁

by 청풍명월7 2023. 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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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세계대전이 미국러시아가 승리하였다.
그런데 승리한 두 나라는 동맹으로 결성하여 독일과 일본을 항복받고 승리하였다.
독일도 서독과 동독으로 나누었는데 일본은 두쪽으로 나누어지지 않고 오히려 대한민국이 갈라지게 되었다.
독일은 전쟁이 없이 통일되었으나, 대한민국은 2차대전이후 승리국끼리 싸우는 3차대전의 시작이 되었다.
1950년에서 1953년까지 싸우다 휴전하였으나, 지금도 대치중이다.
이어서 두 진영에서의 싸움이 인도차이나 반도에는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베트남에서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사이에 벌어졌던 전쟁(1955~1975). 베트남은 제네바협정에 따라 북위 17°를 경계로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으로 분할되었다.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이 협정에 따른 공동 선거를 시행하지 않자 베트남 전쟁을 일으켰다. 미국 등 여러 나라가 개입한 이 전쟁은 엄청난 파괴와 인명손실을 남기고 1973년 휴전협정으로 종전되었으나 전투는 계속되었고, 1975년 북베트남의 전면 공세 속에 4월 30일 남베트남 정부가 항복하면서 종결되었다1976년 7월 2일 베트남은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통일되었다.(요약)

전쟁의 참혹한 모습이다.

베트남에서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및 남베트남을 지원한 미국 사이에서 벌어졌던 국제전. 1955년부터 시작된 이 전쟁은 초기에는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의 내전의 성격으로 출발했으나, 한국전 이후 또다시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대립하는 대리전의 양상으로 발전했다. 이후 1960년대 초 미국이 개입하고 미국과의 동맹국인 서방의 여러 나라가 지원하면서 국제전으로 발전했다. 이 전쟁은 1975년까지 무려 20년에 걸쳐 계속되었는데 결국 남베트남과 미국의 패배로 끝났다.

일반적으로 베트민(Viet Minh)으로 알려진 베트남 독립동맹은 프랑스로부터 베트남의 독립을 추구하는 민족주의 정당으로 1941년에 조직되었다. 이 정당이 공개적으로 공산주의 정당임을 표방한 것은 1950년대 중엽에 와서였다. 1945년 9월 2일,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항복한 지 채 2개월도 되지 않아서 베트남 독립동맹의 지도자 호치민은 베트남이 프랑스로부터 독립했음을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베트남 독립동맹은 베트남 북부지방에서는 인민들로부터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인도차이나에서 자신들의 지배권을 다시 주장하고 싶어했고, 베트남을 단지 프랑스 연합 내의 독립주로 여기려 했다. 1946년 프랑스군과 베트남 독립동맹군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는데, 이 전쟁은 1954년 프랑스군이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치명적인 패배를 당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베트남에 대한민국은 참전하였다.

제네바 합의와 베트남의 분단
1954년 제네바에서 국제회의가 열려 프랑스와 베트남 독립동맹 사이의 정전문제를 논의했다(제네바 협정). 무력충돌을 막기 위해 회의참석자들은 프랑스군과 프랑스군의 지휘를 받는 베트남인들은 북위 17°선 남쪽으로 이동시키고, 베트남 독립동맹군은 북위 17°선 북쪽으로 이동시킨 다음, 북위 17°선을 비무장지역(DMZ)으로 둘러싸인 군사분계선으로 정한다고 결정했다. 이 결정에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고향을 떠나 남으로 혹은 북으로 떠났고, 프랑스군은 베트남으로부터의 마지막 철수를 시작했다.

제네바 회의의 합의에 따라 공산주의자가 주도하는 베트남 독립동맹은 베트남 북반부를 장악하게 되었는데 이는 북베트남이라고 불리게 되었고, 비공산주의자가 이끄는 베트남 남반부는 남베트남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고 딘 디엠은 휴전협상을 하는 동안에 남베트남의 총리가 되었다. 제네바 협정은 남·북 베트남을 인민에 의해 선출된 하나의 정부 아래 통합할 목적으로 국제감시위원회의 감독 아래 1956년 베트남 전역에 걸쳐 자유선거를 실시하도록 규정했다. 북베트남은 남북 양쪽에 이미 만들어놓은 광범위한 정치 조직에 힘입어 이 선거에서 자신들이 승리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남베트남에 자신의 지배체제를 강화해놓은 디엠은 1956년 예정된 선거를 치르기를 거부했다.

1968년 2월1일 남베트남의 경찰서장이 베트콩 청년을 즉결 처형하고 있다. ⓒAP Photo

내전의 발발
미국은 디엠의 입장을 지지했고, 그에 대한 대응으로 북베트남은 그때부터 정치적인 수단에 의해서보다는 군사적인 힘에 의해 남·북 베트남을 통일하기로 결정했다. 디엠은 전통적인 방식으로 선출된 마을회의를 폐지시키고 사이공 정부에서 임명한 행정관들을 통해 통치하는 등 전횡을 시작하면서 국민들의 반감을 샀다. 북베트남에서 훈련받고 무장한 베트남 독립동맹 병사들, 즉 베트콩들은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가 암살·매복공격·태업·전항공작 등의 활동을 벌이면서 게릴라전을 확대시켜나갔다. 디엠 정권은 베트남 공화국 군대와 경찰을 건설하기 위한 미군 고문단과, 물자를 더 많이 보내줄 것을 요청해 원조를 받았으나 점점 커져가는 남베트남 공산주의자들과 베트콩의 세력을 저지할 수가 없었다.

미국의 개입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는 북베트남이 1960년 12월 '베트남 민족해방전선'(National Front for the Liberation of Vietnam/NLF)이라는 조직으로 남베트남의 공산주의 반란자들을 통합하자, 이에 많은 비전투 군사요원들을 파견했다. 1962년말, 남베트남 주둔 미군 고문단의 수는 900명(1960)에서 1만 1,000명으로 늘어났고, 케네디는 만약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으면 전투를 해도 좋다는 명령을 내렸다. 디엠에 대한 민중의 불만은 그의 군대 안에서도 커져서 디엠은 1963년 11월 1일에 일어난 군사 쿠데타에서 마침내 암살되었다. 디엠이 죽은 뒤 여러 내각이 계속 바뀌었고, 남베트남이 이처럼 정치적 수렁에 빠져 있는 동안 베트콩의 활동은 더욱 거세져갔다.

8월 북베트남의 초계정 수척통킹 만에서 미군 구축함 매독스호에 사격을 가하자 존슨 대통령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미해군 비행기들에게 북베트남을 폭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미국 의회는 거의 만장일치로 대통령에게 공격을 승인하는 통킹 만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1965년 이후로 미국의 베트남 전쟁에 대한 개입은 베트콩의 세력강화와 남베트남 정부군의 무능 때문에 급속하게 규모가 커졌다. 미국은 남베트남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서뿐 아니라, 공산주의자들의 공격 혹은 전복에 맞서 싸우는 데 미국의 도움에 의존하거나 의존할지 모르는 다른 맹방 국가들의 미국에 대한 신뢰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점점 더 전쟁에 깊이 개입해 들어갔다.

1965년말에 이르자 18만 명의 미군이 윌리엄 C. 웨스트멀랜드 장군의 지휘 아래 남베트남에 주둔하고 있었다. 미군은 주로 우세한 화력과 헬리콥터를 통한 공격 목표지역으로의 신속한 병력이동에 의존한 반면, 베트콩은 은폐·잠복·기습공격·매복공격에 의존했다. 남베트남 주둔 미군병력은 1967년에 38만 9,000명에 달했다. 그러나 우세한 무기와 장비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교묘하고 결연한 자세로 싸우는 베트콩을 뿌리뽑을 수 없었다. 9월 남베트남에서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는데, NLF와의 협상을 지지하는 모든 후보는 출마가 금지된 상태에서 치러진 이 선거에서 구엔 반 티우 장군이 대통령으로, 키가 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1968년 1월 30일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베트남인들의 테트(음력설) 축제일을 기해 대규모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NLF가 자신들을 후원하기 위해 일어날 것이라고 예상했던 총봉기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들의 공세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효과를 거두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미국인들에게 미국 정부의 주장과는 반대로 미군은 결코 남베트남의 반군세력을 진압할 수 없으며 전쟁은 앞으로도 계속되리라는 것을 확인시켜주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1967년부터 갈수록 많은 수의 정치인들과 시민들이 미국의 전쟁노력이 성공할 수 있는가, 그리고 혹자는 베트남 내전이라고 해석하는 전쟁에 미국이 개입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정당한 것인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평화회담 시작
웨스트멀랜드 장군은 테트 공세 이후 전쟁을 확대하기 위해 군대의 증파를 요청했지만, 미국의 여론 동향은 전쟁의 '축소' 쪽으로 움직였다. 미국과 하노이는 파리에서 예비 평화회담을 시작하기로 동의했다. 1969년 남베트남에서의 전투는 산발적이고 제한적으로 전개되었고, 북베트남군의 침투도 가을이 끝날 무렵까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6월 들어 닉슨 대통령과 티우 대통령은 남베트남에서 일차로 2만 5,000명의 미군을 철수시키겠다고 발표했다. 그 당시 베트남에는 54만 명의 미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협상이 소강상태에 있던 1970년 봄, 미군과 남베트남 정부군이 북베트남의 요충지와 부대 집결지역을 파괴하기 위해 캄보디아의 접경지구에 침입하면서 베트남 전쟁이 재개되었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새로운 반전시위와 저항운동이 거세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1970년말 남베트남 주둔 미군 병력은 33만 5,000명으로 줄어들었다. 베트남으로부터의 미군의 점진적 철수는 이전에 공표한 대로 진행되었으나, 평화회담은 여전히 교착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1971년말 남베트남군은 여전히 미국 공군의 지원에 의존했지만, 지상에서의 모든 전투의 작전 지휘권을 갖게 되었다. 1972년 3월 북베트남군은 비무장지대로 쳐들어오면서 미국의 보복성 폭격이 있었으나 파리에서는 다시 회담이 시작되었고, 1973년 1월 27일 마침내 남베트남 공산주의 세력, 북베트남, 남베트남, 미국 사이에 협정이 이루어졌다(파리 평화협정).

남베트남의 함락과 베트남의 통일
8월 들어 미국 의회는 인도차이나에서 더이상의 미군의 전투를 금지했다. 1973년말 남베트남 주둔 미군 병력은 거의 철수했다. 그러나 정전 협정에도 불구하고 전투는 계속되었고,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은 각각 상대방이 정전협정을 수없이 위반했다고 비난했다. 1974년 남베트남은 더이상 방어할 수 없는 변경 지역을 포기하기 시작했고, 베트콩은 여러 지방 도시들을 점령했다. 1975년 1월 북베트남이 다시 공세를 시작, 푸오클롱 성을 공격하자 남베트남 정부군은 후퇴했다. 북베트남군은 중부 고원지대에서 대규모 공세를 시작했고, 남베트남 정부군은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4월 21일 티우 대통령은 사임하고 타이완으로 도망쳤다. 4월 30일 티우 대통령의 뒤를 이은 두옹반민의 남베트남 정부는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고, 사이공은 아무런 저항 없이 점령되었다. 남베트남에는 군사정부가 세워졌고, 1976년 7월 2일 베트남은 공식적으로 하노이를 수도로 하는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으로 통일되었다. 사이공은 호치민 시로 개칭되었다.

결과

베트남의 오랜 전쟁은 관련된 모든 사람들에게 참혹한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베트남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부상당하고 집을 잃었다. 농촌은 폭격과 고엽(枯葉) 작전에 의해 황폐화되었으며, 도시는 심하게 파괴되었다. 농업·상업·공업은 정지되었다. 미국의 경우 존슨 대통령의  '위대한 사회'를 위한 경제 프로그램은 그 인기 없는 전쟁에 들어간 경제적·군사적 비용 때문에 대부분 중단되었다. 전쟁에 들어간 총비용은 약 2,000억 달러에 달한 것으로 집계된다. 남베트남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승리하고 이웃 나라인 캄보디아라오스가 공산화됨으로써 새 베트남은 동남아시아의 중요한 강국으로 부상했다.

관련 국가

베트남전은 시작부터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의 대리전과 같은 양상을 띠고 있었다. 중화인민공화국프랑스와 독립전쟁 중인 베트남을 지원하기 시작하여 베트남 전쟁 중에는 북베트남에 군사고문단과 무기, 식량, 공병단을 지원했다. 소련은 북베트남에 헬기, 곡사포, 지대공 미사일 등 다양한 전술 무기를 지원하고 지원단을 파견했다. 북한에서도 방공포 부대와 탄약, 군복 등의 군수물자를 지원했다.

이에 맞선 미국은 1964년 한국에 의료진의 지원을 요청했다. 한국은 1개 이동 외과병원을 파병한 후, 1965년 3월에는 공병부대인 비둘기부대를 창설, 파병했다. 1965년에는 전투병력의 파병을 요청받고 주월한국군사령부를 창설한 후 청룡부대와 맹호부대 백마부대를 베트남에 파병했다. 종전에 이를 때까지 미군 다음으로 큰 규모인 연인원 32만 명이 파병되었으며, 한국군 전사자는 약 5천 명이었다. 그외에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가 미국의 동맹국으로서 군사고문단과 전투부대를 파병했고, 태국이 전투부대를 파견했으며, 필리핀과 중화민국 등은 남베트남에 의료와 물자를 지원했다.

후유증

베트남전은 결과적으로 인도차이나 반도의 정세 변화를 낳기도 했지만, 많은 후유증을 남겼다. 그중 대표적인 문제는 고엽제였다. 1960년대 초부터 메콩강 삼각주 지역을 포함한 베트남 일대와 라오스, 캄보디아 등에서 북베트남군의 은신을 억제하고 식량 공급을 방해하기 위해 살포한 에이전트 오렌지 등의 고엽제에는 다이옥신을 비롯한 독성이 강한 화학물질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 물질은 생태계를 파괴하고 이 물질을 접한 주민과 참전군인에게 회복하기 어려운 질환과 장애, 기형을 유발했다. 전쟁중에 있었던 민간인 학살도 후일 국제적 문제로 떠올랐다. 미라이 학살, 빈호아 학살, 퐁니 퐁넛 학살, 하미 마을 학살 등 여성과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양민학살 사건의 진상이 속속 밝혀지면서 미국과 한국 등 관계 국가들과의 사이에서 사회문제가 되었다.

[미라이 학살]
베트남 전쟁 중이던 1968년 3월 16일에 베트남 공화국 꽝응아이성 미라이에서 미군이 저지른 학살 사건.

이 학살로 비무장 상태의 민간인들이 347명(미국 측 집계)에서 504명(베트남 측 집계)가량 희생되었으며 희생자의 상당수는 여성, 어린이, 그리고 아기 등 비전투원이었다.
이 사건으로 22명의 미군이 해당 전쟁범죄에 가담한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윌리엄 캘리 중위만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1971년 가택연금으로 감형되었으며 그마저도 3년 뒤에 해제되었다.

[빈호아 학살]
빈호아 학살(베트남어: thảm sát Bình Hoà)은 일부 진영에서 베트남 전쟁 기간이던 1966년 12월 3일부터 6일까지 대한민국 해병대인 청룡부대430명의 마을 주민을 학살하였다고 추정하는 사건이다.
남베트남 꽝응아이성 빈선현 빈호아에서 일어난 이 학살의 희생자는 대부분 여성과 노인, 어린이였으며, 21명의 임산부도 있었다고 추정된다.

[퐁니.퐁넛 학살 사건]
퐁니・퐁넛 학살 사건(베트남어: Thảm sát Phong Nhất và Phong Nhị, 영어: Phong Nhi and Phong Nhat massacre)은 베트남 전쟁 중인 1968년 2월 12일 대한민국 해병대 해병제2여단(청룡 부대)가 베트남 꽝남성 디엔반현 퐁니, 퐁넛 마을에서 주민 70여 명(69 ~ 79명 추정)을 학살한 사건이다.

[하미 마을 학살 사건]
하미 마을 학살 사건은 1968년 2월 22일 대한민국 해병대 소속의 청룡부대가 베트남 꽝남성 디엔반현에 위치한 하미 마을에 비무장 민간인 135명을 학살하고 가매장했다고 추정되는 사건이다.

 

베트남 4대 학살 사건의 3대 주범이 한국군 이었다는 사실이 마음이 아픕니다. 책임있는 당국에서 진상을 밝히고 사과를 하고 보상도 해서 원과 한을 풀어 드려야 한다고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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