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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_우크라이나 전쟁

[러우전쟁]하리코프 점령계획 없다.-푸틴-

by 청풍명월7 2024. 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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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리코프가 연일 격전지가 되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하얼빈 기자회견에서 러시아는 하리코프를 점령할 계획이 없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그는 우크라이나군의 벨로고드 포격을 막기위한 완충지역 확보가 목표일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언뜻 듣기에 아주 아리송합니다. 우크라이나 제2의 도시 하리코프가 러시아의 통제하에 들어갈 것 같은데 왜 점령이 목표가 아니라고 푸틴 대통령이 말했는지 궁금증을 불러 일으키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의 민족분열 지도

현재 러시아군은 하리코프를 모든 면에서 차단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러시아의 군사전문가인 퇴역 대령 아나톨리 마트비추크는 우크라이나군이 더 이상 하리코프를 방어할 수 없으며 어쩔수 없이 철수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러시아군이 하리코프가 스스로 붕괴되는 조건을 만들고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마트비추크는 이를 위해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군의 탄약, 무기 조달 인력투입을 차단해 도시를 완전히 통제해야 하는데 지금 그대로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리코프 방향의 볼찬스크립치 마을은 큰 가마솥, 즉 포위망에 들어가고 있다고도 말했습니다. 이 두마을은 하리코프에서 20Km떨어져 있습니다. 러시아 국방부는 토요일 하리코프 부근 스타니차를 점령했다고 발표했습니다. 러시아군은 5월 11일부터 17일까지 보리솝카 부그로밧카가찌셰, 글루보코예크라스노예루캰치모로호베츠오구르초보올레이니코보,, 플레테넵카, 필라냐, 스트렐렛차 등 12개 마을을 해방시켰습니다. 

러시아군은 또 도네츠크의 케라미크마을, 자포로제에서는 라보찌노을 해방시켰습니다. 군사전문가들은 러시아가 여러방면에서 동시 다발적인 공세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하리코프에만 매달릴 여유가 없다고 분석합니다. 러시아 언론인 안드레이 우글라노프에 따르면 전선 전체에 걸쳐 적에게 압력을 가하는 이러한 확장 전략은 프로이센 군사 과학자 칼 폰 클라우제비츠의 가르침과 일치합니다. 

현재 러시아군은 배후지와 전선에 가까운 지역의 물류허브와 에너지 기반 시설을 지속적으로 공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크라이나 군대는 전투 능력과 탄력성을 박탈당하고 있습니다. 이 전략을 사용하면 가능한 한 많은 영토를 정복할 수 있으면서도 잘 보호된 도시를 습격할 필요가 없습니다. 현재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고 있는 군사 충돌에서 러시아는 클라우제비츠 교리에 따라 우크라이나 군대에 자국의 의지를 강요하고 있습니다.


클라우제비츠

카를 필리프 고틀리프 폰 클라우제비츠
Carl Phillip Gottlieb von Clausewitz
1780년 6월 1일 ~ 1831년 11월 16일 (향년 51세)

프로이센 왕국의 군인이자 군사학자.《전쟁론》의 저자이며 나폴레옹 시대의 탁월한 전략가 중 한 명이자 서양 최초의 군사 사상가이자 철학자라 불리는 인물.

프로이센 중류층 집안에서 태어났다. 고조부와 증조부 모두 목사였고, 할아버지 역시 목사였으며 유명한 신학 교수였다고 한다. 삼촌들 중에 한 명도 목사였다고 한다. 훗날《전쟁론》집필 때 철학적 사유와 서술 방식엔 신학 교수였던 할아버지의 학문적 영향도 있었다고 한다. 목사 집안이었지만 클라우제비츠의 아버지는 프리드리히 대왕 밑에서 하급장교 중위를 지냈는데 전쟁이 끝나고 프리드리히 대왕의 엄명에 따라 군대에서 쫓겨난다. 원래 프리드리히 대왕은 부르주아들을 경멸해서 장교단에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전쟁 시엔 귀족수가 크게 모자라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가 전쟁이 끝나자 귀족 출신이 아닌 자들을 모두 쫓아낸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전역 하고 나서도 장교 출신임을 들어 von을 쓰고 다녔다고 한다. 그런고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 신분상승 욕구와 군복무를 갈망했고 그의 형제 중 3명이 같이 입대 했다.

당시 12세에 참전하여 15세에 사관학교에 들어갔으며, 게르하르트 폰 샤른호르스트에게 군사학을 배웠다. 그의 능력이 출중하여, 프로이센 왕실의 아우구스트 왕자 직속 부관이 되어 왕자에게 전쟁에 관한 것을 가르쳤다. 훗날 아우구스트 왕자와의 연줄 덕으로 국왕이 되는 왕세자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와 둘째 왕자 빌헬름도 가르쳤다고 한다.

그런 그가 살았던 시기가 프랑스 혁명 시기인지라, 인생의 상당부분을 나폴레옹 전쟁에 종군하게 된다. 1806년 예나 전투에서 후위대를 맡아 나폴레옹군을 저지하다가 사로잡혀, 파리에서 포로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후 귀국하여 샤른호르스트를 도와 군 개혁에 몸담았으나 1812년 패전한 프로이센이 프랑스의 요구에 의해 동맹을 맺고 러시아 원정에 꼬붕으로 끌려가 참전하자, 탈영을 감행 프로이센 출신 탈영병 2만 명을 모아 러시아군에 종군한다. 클라우제비츠는 "나폴레옹 군대와 대적하여 이긴 세력이 없으니, 나폴레옹의 군대보단 나폴레옹의 군대를 유지하는 것을 상대해야 한다."는 게릴라전이나 물자 보급을 약화시키는 지연전을 주장하고, 이것이 먹혀들어 1812년 보로디노 전투 이후 나폴레옹의 몰락에 한 축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1813년 프로이센군과 접촉하여 프로이센이 대불동맹에 가담하는 계기가 된 프로이센 - 러시아 협력을 구축하였다. 러시아군 신분으로!

이후 해방전쟁의 결과 나폴레옹이 패배하고 귀양을 떠난 1815년에서야, 지난 군영 무단이탈과 적군에 대한 종군혐의로 찍혀있던 그는 프로이센 왕이 귀국을 허락해 사관학교 교장이 되었다. 이후 육군대학 교장과 포병감 등을 지내고, 이 시기부터 《전쟁론》에 손을 대, 6~7장을 제외한 장의 초고를 사망하기 전까지 완성한다.

아우구스트 나이트하르트 폰 그나이제나우 장군 휘하의 참모장을 역임하다가 유럽 콜레라에 걸려 51세의 비교적 젋은 나이에 사망하고 만다. 사후에 그의 부인이 전쟁론을 출판하였다.

그의 저서 《전쟁론》은 아시아의 《손자병법》과 더불어 시대를 초월한 군사전략서로 꼽힌다. "전쟁은 정치의 연장선상에 있다."라는 내용은 전쟁의 본질을 꿰뚫는 핵심적인 언급으로, 전쟁론을 읽지 않은 사람들도 많이 아는 말 중 하나다.

사실 꽤 많은 이들이 이 문장 하나만 보고 전쟁론을 접어버린다. 전쟁론은 유명세에 비해 제대로 읽은 사람은 전문가들 중에서도 흔치 않은 책이다. 민간인들은 군사 부문에 대한 배경 지식의 부족으로, 군인들은 클라우제비츠의 철학적 사유 방식에 대한 이해가 없어서 제대로 읽기 쉽지 않다. 거기다 책 자체도 난해하게 쓰였는데, 직접적인 서술보다는 문학적, 철학적 표현들을 많이 사용했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클라우제비츠 본인이 책을 미처 완성하지 못하고 사망했기 때문에 내용 정리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 관계로 전쟁론을 끝까지 읽은 사람도 드물뿐더러, 그중에는 오독하고 주화입마한 사람도 흔하다.

일생과 업적만 보자면 호전광 같다고 볼 수 있으나, 실제로는 '전쟁은 위대한 서사시와 위대한 영웅을 낳지 않으며, 전쟁은 욕심과 자만에서 비롯한 것으로 그 이후 남는 건 눈물과 고통, 피뿐인 비참한 것임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라는 반전(反戰) 문구를 남기며 전쟁을 부정적으로 여겼다.
간혹 군대에서 정신교육 관련 문제가 나올 때 정훈 장교들이 이 사람 이름을 묻는 경우도 있다. 장병들의 정신교육 교재들 대부분의 첫 페이지에는 이 사람 명언이 적혀있기 때문.


하리코프 전쟁의 전략이 바로

"나폴레옹 군대와 대적하여 이긴 세력이 없으니, 나폴레옹의 군대보단 나폴레옹의 군대를 유지하는 것을 상대해야 한다."

이 철학을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시가전은 너무 많은 피를 흘린다. 포위와 보급을 차단하여 스스로 물러서게 하려는 전략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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