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 질문 1)
신(神, 하느님)의 존재(存在)를 어떻게 증명(證明) 할 수 있나?
신(神)은 왜 자신의 존재(存在)룰 똑똑히 들어 내 보이지 않는가?
답변자들(정의채신부, 차동엽신부, 이만희저자, 허정 스님, 이어령교수, 이우각저자, 이원용저자 등등)
1)_정의채 신부( 질문서를 요청했던 신부)
“몇 시간을 말해도 (설명하기) 부족한 질문입니다. 신이 존재한다…. 믿는다는 게 뭔가요? 사람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고, 오감(五感)으로 느끼는 감각적 존재죠.
그러면 인간이 감각세계에 만족할까요. 동물은 감각세계에 만족하고 말아요. 주인이 주는 음식을 받아 먹고, 주인이 모르는 이가 오면 경계하고요. 인간은 감각에 만족하지 않아요. 저게 무엇인지, 왜 그런지 생각하고 배후가 무엇인지 따집니다. 말 한 마디를 하더라도 배경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배후를 항상 묻는 존재가 인간이고, 그 물음을 통해 인간은 발전합니다. 결국은 보이는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로 향하는 거예요.
사람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삽니다. 시공 속에서 사람은 시간을 초월해요. 시간 속에 살면서도 시간 속에 묶이지 않아요. 또 인간은 자기만 생각하지 않아요. 선조(先祖)도 생각하고 후손(後孫)도 생각하지요. 혼자 살지 않고 공동체 속에서 사니까요. 가족과 이웃, 직장, 마을, 사회활동이 종합돼 일생을 삽니다. 그 삶에 사람의 일관된 무엇이 있어요. 시공간에서만 살면 동물과 다름없지요. 그러나 인간은 시공간을 완전히 넘어서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하느님의 존재를 두고 사람에 따라 긍정·부정할 수 있어요. 부정하는 이도, 긍정하는 이도 많은데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마음이 불안하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뭔가 있을 것도 같고 없을 것도 같아 혼란을 겪습니다. 이것이 현재 인간의 한계예요. 그러나 달리 보면 (한계가) 좋은 기회죠.
한계가 없으면 발전이 없거든요. 인간성이 어떻게 됐든 시공간 속에서 한계 속에 있는 존재입니다. 그 한계를 미래로 열어가야 합니다.
‘창조주 하느님이 실재하느냐’고 묻습니다. 있다면 인간은 창조 목적에 따라 살아야 하고, 없다면 내 마음대로 살아가겠죠. 그런데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사는 존재예요. 그러니 나도 누군가를 도우며 살아야 해요. 받기만 하면 도둑놈 심보니까요. 인류 문화 속에서 해결의 길을 찾을 수밖에 없어요.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느끼며 신을 찾을 수밖에 없어요. 한계를 가두려고 하지 말고 나 자신부터 어디를 향하는지 봐야 합니다. 나를 넘는 데서 무엇을 만납니까. 허공을 만나는 게 아닙니다. 거기서 신의 존재라는 게 나와요.”
― 그럼, 신의 존재는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신의 존재는 시작과 끝의 문제입니다. 무(無)에서 시작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존재가 없던 곳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에 근원이 있습니다.
그러니 인간은, 생각하지 못할 어떤 존재에서 나왔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물질은 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 것이니까요. 그럼, 물질적인 것을 넘는 게 무엇이냐. 그 세계를 ‘신의 세계’라고 말하죠. 그 세계는 막연한 허공을 의미하지 않아요. 논리정연하고 놀라운 질서가 운행되는, 놀라운 지혜가 작용할 수밖에 없는 세계지요. 시공간 이전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존재를 뭐라고 하느냐, 저는 ‘신’이라고 이름 붙입니다. 동양에서는 그 존재를 하늘과 땅에서 찾으니까 하늘의 임자, 천주(天主)라고 하지요. 이 말은 중국에서 만들었는데 서양에는 그런 단어가 없어요.”
― 고 이병철 회장은 ‘왜 신은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이병철 회장의 말을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만약 신이 자기 존재를 똑똑히 드러낸다면 인간은 할 일이 없어요. 자기 나름의 능력을 스스로 발현할 여지가 전혀 없다고요.”
2)_차동엽 신부
우리 눈에는 공기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공기는 있다. 소리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감지할 수 있는,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의 영역이 정해져 있다. 가청영역 밖의 소리는 인간이 못 듣는다. 그러나 가청영역 밖의 소리에도 음파가 있다. 소리를 못 듣는 것은 인간의 한계이고 인간의 문제다. 신의 한계나 신의 문제가 아니다.
가령 개미와 코끼리를 보라. 개미는 이차원적인 존재다. 작고, 바닥을 기어 다니는 개미에겐 평면만 존재한다. 입체도 개미에겐 평면이 된다. 그런 개미가 코끼리 몸을 기어 다닌다. 개미는 코끼리 몸을 느낀다. 그러나 코끼리의 실체를 파악하진 못한다. 왜 그런가. 개미의 인식능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게 코끼리가 없기 때문이 아니다.
아니다. 개미는 코끼리를 느낀다. 코끼리의 부위에 따라 다른 질감을 느낀다. 신과 인간의 관계도 비슷하다. 인간도 그렇게 신을 느낀다. 우리가 큰 그림을 그리지 못할 뿐이다. 신은 자신의 존재를 우리가 아는 방식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신은 이미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현대물리학에선 우주의 차원을 11차원이라고 한다. 신이 존재한다면 그 너머의 차원까지 관통할 것이다. 3차원적 존재가 11차원적 존재를 어떻게 인식할 수 있겠나. 흑백TV로 3D 컬러 영상물을 수신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
3) _이만희 저자
신을 증명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보는 것이다. 신이 자기를 드러내 보이지 않는 것은신과 사람이 서로가 원수(적)가 되었기 때문이다.신(영)은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생명체인 창조주하나님의 신이고, 하나는 피조물인 사악의 신이다.신은 영(靈)이며, 혼(魂)은 생명이다. 신이 떠나도 혼이 있으면 살아 숨 쉬게 된다. 영과 혼, 이 두 가지가 다 떠나면 죽는다. 그러나 육체가 죽어도 영은 살아 있게 된다. 사람이 종교를 알지 못하면 신을 알 수 없다.
창조 받은 피조물 곧 창조주의 분신인(행 17:29 참고) 사람(아담)은 생기로 생령이 되었다(창 2장). 여기에 피조물인 용의 악신을 더함으로 생령과 악령이 하나 되어 혼돈이 시작되고 불안과 고통이 있게 되어, 영혼이 떠나고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 흙이 된다(창 3장).인간의 시조인 이 ‘사람(아담)’의 유전자로 태어난 사람이 지금까지의 지구촌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분신인 사람이 다른 신을 받아들임으로 생명을 이어 주는 분모의 신이 떠나게 되고, 있는 생명으로 살다가 죽는다.
이 원죄에 유전죄와 자범죄가 가중됨으로 죄가 커져 수명이 짧아지게 되었다(창 6:1-3, 시 90:10 참고). 생명에 사악이 들어옴으로 고통이 있고 죽음이 있다. 다른 신을 받아들임으로 죄가 되었고, 이 죄로 인해 거룩하신 생명의 신이 사람에게서 떠나가셨다. 이 분모의 신은 죄로 인해 사람에게 올 수가 없고, 사람도 죄 때문에 분모인 신에게 갈 수 없다. 이와 같이 하여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진 것이다.하늘의 종교는 분모의 것이요, 분자에게 알리는 교육이다. 이 교육은 분자가 분모를 만나 생기를 받는 방법이기도 하다. 생기로 생령이 된 영이 사악을 받아서 죽는 영혼이 된 것이다. 어떻게 죽이는가? 갖은 병마를 보내어 신체(집) 내의 조직을 파괴시킨다. 집이 파괴됨으로 영이 떠난다. 종교를 깨달아 사악한 데서 벗어나 생령이 되게 하는 분모를 믿음으로, 몸은 원죄, 유전죄, 자범죄의 값으로 심판을 받아 죽겠으나 영은 믿는 그것을 위로삼아 살게 된다. 이는 분신에게 붙은 사악의 신과 분리되었기 때문이다.이 같은 인류를 사악한 신에게서 구원하려면 먼저 죄 값을 치러야 하고(의인의 피로), 사악한 신(마귀)을 이겨야 하고, 자신을 이겨야 한다. 이 때 자기를 되찾게 되고, 사악에서 벗어나 생명체이신 창조주 분모와 하나가 된다. 이것이 도(종교)의 길이다. 이는 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며, 도와 생명을 주는(religion) 분으로 말미암아 된다. 이는 고아 된 자가 다시 어머니 품에 안겨젖을 빨게되는'상봉'이다.필자는 천신(天神)도 봤고, 그 음성도 들었고, 꿈도 꾸어 봤으며, 영혼이 떠나는 과정을 겪어 봤고, 영혼이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육체의 집인 몸으로) 적도 두 번이나 있었다.
두 번 다 죽지 않으려고 애썼다. 영과 혼이 떠난 후에 집인 몸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나는 생시와 같은 몸과 차림으로 이 세상 어디론가 구경하면서 가고 있었다. 이는 어느 길가에 혼자 있을 때였다. 육을 떠난 시간은 알지 못했다. 멀리멀리 가다가 생각이 남과 동시에 나는 내 몸에서 다시 살아났다.
4) _허정 스님
불교는, 창조신이라는 단어는 유한한 인간이 영원한 것을 추구하여 창조해 낸 개념이라고 본다. 지금도 그렇지만 부처님이 사셨던 2,600년 전에도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시대였다. 내 안의 영원한 것을 아트만(atman)이라 불렀고 밖의 것을 브라흐만(Brahman)이라고 불렀다. 부처님은 이것들이 사실이 아닌 개념일 뿐이라고 보고 아트만과 브라흐만을 부정하셨다.이것을 무아(無我)사상, 연기의 법칙이라고 한다.
5)_이어령교수
하나님이라는 말을 부모님이라고 바꿔봅시다.우리가 부모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요. 또 하나님이라는 말을 그 흔한 여친이라는 말로 바꿔보세요. 여친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요. 우리는 지금까지 부모님을 믿고 살아왔지 정말로 나를 낳아주셨는지 나를 사랑하시는지 의심해온 경우는 거의 없어요. 여친도 만나는 동안 한 번도 그 사랑을 의심하거나 거짓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믿었기 때문에 관계가 이어진 거예요.
그런데 부자지간이나 연인 사이에 증명이라는 말이 나오면 이미 그건 끝난이야기예요. 어느날 아들이 '어머니 아버지가 정말 저를 낳으셨는지, 저를 사랑하고 계시는지 증명해 보십시오."라고 한다면 'DNA 감정을 해주십시오.:라는 말이다..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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