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시선(centuries) 1권(券) 9편(篇) 사행시(四行詩)
[프랑스어]
De l'Orient viendra le cœur Punique,
Facher Hadrie & les hoirs Romulides,
Accompagné de la classe Libique
Trembler Mellites, & proches Isles vuides.
▶ Orient 동양
▶ viendra 오다
▶ cœur 심장
▶ Punique 카르타고의
▶ Romulides 로물루스
▶ Facher 괴롭히다.
▶ Hadrie 하드리
▶ Accompagné 동반하다
[영어]
From the Orient will come the African heart
to trouble Hadrie and the heirs of Romulus.
Accompanied by the Libyan fleet
the temples of Malta and nearby islands shall be deserted.
[한국어]
동양으로부터 아프리카 카르타고 중요 지역으로 사람(Punique)들이 쳐들어 오리라.
하드리(Hadrie)와 로물루스(Romulus)의 후손들을 괴롭히기 위함이니라.
리비아 지역에 함대를 동반하고 쳐들어 오리라
몰타의 사원들과 근처의 섬들까지 황폐케 되리라.(백시선 1권 9편)
백시선(百詩選, 제세기, Centuries)은 Nostradamus의 조국인 프랑스 역사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또한 프랑스의 카톨릭이 수난을 당하는 사건에 대해서도 예언 시를 통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이 詩에서 카르타고 사람, 이탈리아 후손, 리비아, 몰타등이 단서이다. 어떤 내용인지 잘 파악해서 이 시의 의미를 찾아보도록 하자.
카르타고 (Cartago)_튀니지의 도시
튀니지의 수도 튀니스에서 상당히 가까운 위치에 있다(대략 20km 내외). 튀니스 광역권에 포함되어 있고, 인구는 2013년 기준 2만 1276명이다. 작은 도시지만 대통령 관저인 카르타고궁이 있으며, 부유층들이 많이 사는 부촌으로 유명하다.
아래 단락에 나오는 고대 국가 카르타고가 워낙 유명하다보니 튀니지에서도 이름난 관광지이다. 카르타고의 이름값을 활용하기 위해 노력한 티가 역력하다. 이를테면 철도역 이름도 카르타고-한니발 역이고, 심지어 튀니지 제1의 관문공항 이름도 튀니스 카르타고 국제공항이다. 그러나 페니키아인들이 만든 카르타고 유적은 로마가 철저히 파괴한 탓에 일부만 남았고, 남은 유적 대부분은 로마 시대 것들이다.
하드리(Hadrie)는 누구인가?
푸블리우스 아이리우스 하드리아누스 (Publius Aelius Hadrianus , 재위 : 117년 8월 11일~138년 7월 10일) 는 안토니누스 왕조의 로마 황제이다.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황제이자 시인이자 철학자인 그는 전임자의 팽창주의 정책을 깨고 로마 제국을 진정시키고 행정적으로 구조화하는 동시에 때로는 구멍이 많은 국경을 통합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122년에 그는 영국 북부의 한계를 표시하기 위해 자신의 이름으로 성벽을 세웠습니다.
하드리아누스는 제국의 이상과 개인적 이익을 추구하는 데 전념했습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그는 제국의 거의 모든 지방을 방문하여 문화 발전을 장려하고 개인적으로 여러 프로젝트에 보조금을 지급했습니다. 로마에서 그는 판테온을 완전히 재건하고 비너스와 로마의 신전을 지었습니다. 그리스의 열렬한 추종자이자 아테네를 제국의 문화 수도로 만들기 위해 그는 많은 호화로운 사원의 건축을 명령했습니다. 젊은 안티누스와의 관계와 그의 때 이른 죽음으로 인해 하드리아누스는 나일강 유역에 그를 기리는 도시인 안티누폴리스를 설립했습니다.
하드리아누스의 말년은 질병으로 점철되었습니다. 그는 바르 코크바 반란을 그의 범그리스 이상의 실패로 보았고, 그들의 음모 혐의로 여러 상원의원을 처형했고, 이로 인해 그의 인기는 떨어졌습니다. 아내 사비나와 아이를 가질 수 없었던 그는 138년 안토니누스 피우스를 입양하고 그를 제국의 후계자로 지명했습니다. 하드리아누스는 같은 해 바이아스에서 사망했고, 안토니누스는 원로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를 신격화했습니다.
고대 소식통은 그를 수수께끼 같고 모순적이며, 만족할 줄 모르는 호기심과 무한한 야망에 의해 주도되는 엄청난 개인적 관대함과 극도의 잔인함을 모두 가질 수 있다고 묘사합니다. 에드워드 기븐 (Edward Gibbon)은 그를 "자비로운 독재자"라고 부르며 "다섯 명의 좋은 황제"에 포함 시켰습니다.
로물루스(라틴어: Romulus)
로물루스(라틴어: Romulus: 기원전 772년? ~ 기원전 716년?)는 로마의 건국자이자 초대 왕이라고 전해지는 전설적 인물이다.
알바 롱가의 왕 누미토르의 딸 레아 실비아의 아들들인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 중 형으로서, 팔라티노 언덕에 세력을 구축했다. 아벤티노 언덕에 자리를 잡은 레무스와 경쟁한 끝에 기원전 753년 4월 21일 레무스를 죽이고 다른 5개 언덕의 동맹체로서 로마를 건국한다. 로물루스는 조세와 징병을 위해 시민들을 세 개의 부족들로 나누고, 상비군 친위대인 켈레레스를 창설하고, 여성 인구 부족 해결을 위해 사비니 여인들을 약탈하는 등 로마라는 국가의 기틀을 세웠다. 재위 37년째 되던 해 로물루스는 실종되었다. 왕권강화에 의해 이권이 침해받던 귀족들에게 암살당했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공식적으로는 퀴리누스라는 신이 되어 승천했다고 발표되었고 퀴리누스를 숭배하는 종교도 생겼다.
이런 이야기들이 어디까지 역사적 사실이고 어디까지 신화에 불과한지, 로물루스라는 인물 자체가 실존인물이기는 한지 여부는 모두 불확실하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로마의 법제, 정치, 종교, 사회적 제도 일체는 로물루스 시대에 확립되었다고 말해져 왔다.
로물루스와 레무스(Romulus and Remus)는 로마의 전설에 등장하는 쌍둥이 형제인데, 형제 가운데 로물루스는 전설적 로마의 건국자이자 초대 왕이다. 로마 건국 신화에 따르면 로물로스와 레무스는 팔라티노 언덕에서 늑대가 길렀다고 한다. 아우구스투스를 시작으로 로마의 황제들이 여기에서 살기를 좋아했으며 그 궁전의 흔적이 아직까지 남아있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게 로마의 고역사가 파비우스 픽토르(Fabius Pictor)의 설에 의한 것이다.
리비아지역에 함대를 동원하여(the Libyan fleet) 침공하는 것은 어떤 사건인지 살펴봐야 한다. 튀니지의 카르타고 지역과 바로 옆나라인 리비아에 함대라는 규모의 배를 타고 침략하는 사람들이니 같은 장소이니 같은 사건으로 추정해도 될 것이다.
리비아의 역사
그리스인들은 BC 2000년대에 동부 키레나이카에 살던 부족의 이름을 따서 북아프리카의 나일 강 서쪽지역 대부분을 리비아라고 불렀다. BC 7세기에 페니키아인들이 트리폴리타니아에 정착했고 이들은 나중에 고대 도시국가인 카르타고(현대 튀니스를 중심으로 함)의 동부지방이 되었다. 같은 시기에 그리스인들은 키레나이카에 몇몇 도시를 세우고 정착했다.
로마인들이 이 지역을 정복하여(BC 1세기) 트리폴리타니아는 아프리카 노바 주의 일부가 되었고 키레나이카는 크레타와 합쳐 하나의 주가 되었다. 고대 파자니아(페잔) 지역은 BC 19년 로마에 정복되기 전까지 가르만테스족이 살았으며, 로마가 멸망하자 비잔틴 제국이 이 지역을 통치하게 되었고 7세기에는 이슬람교도 아랍인들이 들어와 오랫동안 지배했다.
그후 약 350년 동안 모로코에서 온 베르베르인(人) 알모아데가 트리폴리타니아를 통치했으며 키레나이카는 이집트의 지배를 받았다. 16세기초 오스만 제국은 리비아의 세 지역, 즉 페잔·키레나이카·트리폴리타니아를 정복하여 트리폴리 주재 섭정의 관할구로 삼았다. 18세기초 트리폴리에 카라만리 왕조가 들어서 약 120년간 통치했으며, 이때 세 지역은 서서히 하나로 통합되었다.
1835년에도 오스만 제국이 이 지역을 되찾았다. 1837년에 이슬람교의 일파인 사누시파(派) 교단이 설립되어 1800년대말과 1900년대초의 리비아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11년 이탈리아가 당시 오스만 제국이 통치하던 리비아를 침략하여 통치권을 주장했으나 투르크는 좀처럼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리비아도 끈질기게 저항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15만 명이나 되는 이탈리아인이 리비아에 정착했는데, 그들의 세력은 전쟁중에 대부분 분쇄되었다.
결국 동양에서 사람들이 오는데 그들은 오스만제국의 사람들이다. 함대를 몰고 올 정도의 침략을 예언할 것이다. 그리고 카톨릭과 십자군 전쟁이 주적이었던 이슬람의 용사들이었다.
몰타 Malta
지중해 한가운데 있는 작은 군도. 수도는 발레타이며, 화폐는 유로이다. 국민 대부분은 몰타인으로 언어는 몰타어,영어가 주로 쓰이며, 종교로 로마카톨릭을 믿으며 기후는 지중해성기후이다. 대체로 관광업·경공업·해운업·농업에 기반을 둔 시장경제체제로 1인당 국민총생산은 세계 개발도상국 가운데서도 가장 높은 수준에 속한다.
16~18세기에 투르크(오스만)의 무역을 집요하게 방해한 이들 기사단은 몰타 섬 원주민과는 관계가 소원하여 별다른 사회적·경제적인 접촉이 없었다. 이들에 의한 통치는 1798년 6월 나폴레옹이 몰타 군도를 점령했을 때 끝났다. 1802년 아미앵 조약으로 몰타 군도는 구호기사단에게 반환되었으나 몰타인들은 이에 저항하여 로마 카톨릭 교회가 유지되고 '몰타인의 권리선언'이 존중된다는 조건으로 대영제국의 국왕을 몰타의 통치자로 인정했다. 이 조건들은 1814년 파리 조약에서 영국에 의해 수용·승인되었다. 영국 지배 밑에서 몰타의 정치적 지위는 계속 헌법이 허용·정지·폐지되는 일련의 변천을 겪었다. 경제는 이곳 군사시설에 대한 영국의 필요성에 따라 좌우되었고 유명한 조선소가 발달해서 경제적 대들보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몰타는 지역 수비대를 구성했고 많은 해군을 차출했다. 영국이 몰타의 장관들과 함께 권한과 책임을 공유하는 것이긴 했지만 몰타는 1921년에 자치정부를 이루었다가, 1936년에 다시 식민지 정부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이탈리아가 참전한 뒤로 독일과 이탈리아의 폭격기들로부터 심한 공중 폭격을 받았다.
1522년에 오스만 제국의 쉴레이만 1세(1520~1566)가 로도스 섬을 정복하자 그 섬에 자리잡고 있던 구호기사단은 새로운 터전을 찾아야 했다. 이때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스페인의 왕인 카를 5세(카를로스 1세, 1516~1556)가 1530년에 기사단에게 매년 매(hawk) 1마리를 공물로 바치는 것을 조건으로 몰타를 사실상 무상 증여했다. 이 때부터 몰타는 성 요한 기사단의 영토가 되었다.
몰타 기사단은 이 곳을 거점으로 과거 로도스 시절을 잊지 않고 사라센 선박과 해적선 모두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공격했다. 이들이 자리잡은 몰타 섬은 북아프리카의 항만과 항로들을 기습하기 최적화된 곳이라서 오스만 제국을 곤란하게 했다. 결국 술레이만 1세는 1565년 몰타를 공격하기로 결심하고 2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을 파병하지만 세 달에 걸친 공방전 끝에 함락에 실패한다. 당시 방어 병력은 기사단원 500~600 명에 현지 징집병과 전투 직전에 고용한 용병 등을 포함한 6~8천 명 정도였다. 이 승리로 기사단은 명성이 유럽에 퍼져, 몰타의 지명도도 올라갔다. 몰타 공방전 이후 기사단에 입단하는 지망자도 늘어나고, 스페인의 지원을 받는 교황령을 위시로 한 가톨릭 국가들의 기금 원조도 늘어나 기사단은 사라센 해적과 상선들을 막아낼 수 있었다. 몰타 기사단의 활동은 17~18세기에도 계속되었다.
술레이만 1세는 즉위하자마자 중부 유럽과 지중해 지방에서 그리스도교 세력에 대항해 전쟁을 시작했다. 1526년 8월 헝가리 군대를 격파했으며, 페르시아에 대해 3번의 대규모 전쟁을 일으켰다. 제1차 전쟁(1534~35)을 통해 오스만은 이라크를 정복했고, 제2차 전쟁(1548~49)에서는 반 호수 부근의 영토를 획득했다. 1538년 베니스와 스페인의 연합함대를 격파함으로써 오스만은 1571년 레판토 해전에서 패배할 때까지 지중해의 제해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제3차 전쟁(1554~55)에서 페르시아의 사파위 왕조의 정복이 어려워지자 사파위 왕조와 평화조약을 맺었다. 술레이만의 말년은 아들들의 왕위 다툼으로 어지러웠으며, 무스타파 왕자와 바예지드 왕자가 처형되었다. 술레이만 1세는 1566년 헝가리를 공격하던 도중에 죽었다.
위 예언의 내용은
동양의 오스만제국 사람들이 지중해 제해권을 장악하고 리비아 지역을 장악하였으며 카르타고 지역을 장악하고 몰타 지역까지 쳐들어 오게 되는 사건을 예언한 것이다.
예언서가 나온 이후 10여년 만에 이루어 지는 사건들이다. 술레이만 1세는 1565년 몰타를 공격하였다. 노스트라다무스는 1566년 사망하게 된다. 그러므로 살아있던 당시의 예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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