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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stradamus_백시선

[Nostradamus]백시선 1권 11편_합의를 성사시키리라.

by 청풍명월7 2023. 1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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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시선(centuries) 1권(券) 11편(篇) 사행시(四行詩)


[프랑스어]
Le mouuement de sens, cœur, pieds & mains
Seront d'accord, Naples, Leon, Secile.
Glaiues, feux, eaux, puis aux nobles Romains
Plongez, tuez, morts par cerueau debile.


[영어]
The motion of senses, heart, feet and hands
will be in agreement between Naples, Lyon and Sicily.
Swords fire, floods, then the noble Romans drowned,
killed or dead because of a weak brain.


[한국어]
감각들과 마음과 의 움직임으로
나폴리리옹시실리는 합의를 성사시키리라.
칼(전쟁), 홍수 그런 다음 높은(고상한) 로마인들이 빠져죽고
혹은 살해당하고, 약한 두뇌(머리) 때문에 죽으리라.(백시선 1권 11편)


노스트라다무스의 백시선은 인문학을 알아야 해석할 수 있는 공부다. 그래서 지나간 역사를 살펴보고 사건들을 찾아봐야만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우선 지명으로 이탈리아의 나폴리와 시실리(시칠리아) 그리고 프랑스의 리옹을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 나폴리 Naples 

감각들과 마음과 의 움직임으로 나폴리리옹시실리는 합의를 성사시키리라.(백시선 1권 11편 2행)

나폴리는 이탈리아의 도시. 이탈리아 캄파니아의 주도(州都)이자 남이탈리아의 중심 도시로, 로마와 밀라노에 이은 이탈리아 제3의 도시이다.
 

나폴리 Naples


이탈리아 통일 전까지 천년 가까이 북이탈리아와는 판이한 역사를 이어온 남이탈리아의 정치적 중심지였다. 지금도 지중해에 닿아 있는 항구도시로 영어로는 네이플스(혹은 네이플)라고 한다. 참고로 위 사진에 보이는 봉우리 두개의 높은 산폼페이를 멸망시킨 베수비오 화산이다. 서기 79년 8월 24일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한 날, 북풍이 아닌 동풍이 불었다면 폼페이 대신 나폴리가 멸망했을 것이다.

나폴리 Naples의 위치


논란은 있지만 옛 나폴리 땅에 그리스인들이 식민지 도시국가인 네아폴리스를 세웠다는 것은 아직까지는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네아폴리스라는 단어는 네아가 new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며, 폴리스는 도시의 의미이다. 즉, 신도시. 신도시가 있다는 건 구 도시도 있다는 의미고, 그 구도시가 다름 아닌 후에 파르테노피아 공화국의 어원이 되는 파르테노페(Parthenope)이다. 원래 그리스 정착지는 기원전 20세기쯤부터 세워졌지만 기원전 9세기쯤에 지금의 나폴리 시의 남서쪽(지금의 카스텔 산 엘모 (Castel Sant' Elmo)가 있는 곳 근처)에 파르테노페가 새워져서 번성하다가 기원전 6세기쯤에는 쇠퇴하고서는 약간 북동쪽 내륙(지금의 나폴리 중심가)으로 들어가서 재건한 게 네아폴리스가 되었다고 하며 현대에는 둘 다 나폴리시에 속한다.

그리스인들이 세웠다지만 쿰마인들이 주민이었으며, 후에 에트루리아의 연맹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이후 라티움족의 반란에 의해 에트루리아가 엎어지고 그 자리에 로마 왕국이 들어서면서 나폴리도 로마의 일원이 된다. 폼페이가 대지진과 화산 폭발로 큰 타격을 입고 그저 그런 농촌이 되기 전까지는 번창하는 폼페이-헤르쿨라네움 도시권에 속해 있었다. 길었던 로마 제국의 황금기에도 끝이 찾아와 훈족과 게르만족의 발흥에 의해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나폴리 지역에는 동고트인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동고트 왕국(493~540)이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게 멸망당했고, 나폴리는 동로마 제국의 영역이 된다. 이때부터 나폴리는 1300여 년간 북부, 중부 이탈리아(랑고바르드 왕국, 교황령)과 다른 역사를 걷게 된다.

11세기 중반, 프랑스 왕국 노르망디 지역에서 온 기사인 루제루 1세가 동로마 제국령이었던 남이탈리아를 점령했다. 11세기 후반에 아랍 사라센 왕국령 시칠리아 섬까지 점령한 이들은 2대째인 루제루 2세가 대립교황 아나크레투스 2세로부터 왕위를 인정받아 왕국으로 성립되었다. 노르망디는 그 기원이 바이킹이니, 바이킹이 지중해까지 진출해 세운 왕국이 바로 이 시칠리아 왕국이다.

시칠리아 왕국의 지도

시칠리아 왕국의 왕통이 혼인을 통해 신성 로마 제국의 호엔슈타우펜 왕조에게로 넘어가자, 황제와 사이가 나쁜 교황의 요청으로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의 아우며 앙주·멘·프로방스의 영주인 샤를이 와서 호엔슈타우펜 왕조를 절멸시키고 새로운 시칠리아 국왕으로 등극해 앙주 왕조를 세웠다.


 샤를은 나폴리의 영주로서는 괜찮았으나 시칠리아에서는 동로마 제국 정복을 위한 중과세로 인해 민심을 잃었고, 결국 1282년 3월 30일에 시칠리아의 만종이라는 학살사건이 일어났다. 샤를과 로마 교황에게 불만을 품은 시칠리아 주민들이 프랑스계 주민 4,000여 명을 학살하고 혁명을 일으킨 이 사건으로 인해 샤를 왕은 시칠리아의 지배권을 잃었고, 시칠리아 왕국은 분열되어 시칠리아에는 바르셀로나 가문의 아라곤 왕국 국왕 페드로 3세가 왕위에 등극한 반면 남이탈리아는 앙주 왕조의 통치하에 놓였다. 당분간은 서로가 시칠리아 왕국이라고 주장했지만, 수도가 나폴리인 반도측이 편의상 구분하기 위해 나폴리 왕국이라고 불리기 시작하면서 이 명칭이 보급되었다.

앙주 왕가의 직속 적통이 끊기면서 지파인 앙주-두라초 가문과 앙주 왕가를 모계로 계승한 발루아-앙주 가문이 내분을 벌려 발루아-앙주 가문의 르네(레나토) 1세가 나폴리 왕위를 획득했으나, 1442년 아라곤 국왕 알폰소 5세가 르네 1세를 무찌르면서 한동안 중단되었던 아라곤과 나폴리의 싸움은 아라곤의 승리로 끝났다. 프랑스 국왕 샤를 8세가 모계로 앙주 왕가의 계승을 주장하며 1494년에 나폴리를 침공하였으며 샤를 8세 사후 루이 12세가 1501년 드디어 나폴리 왕위를 차지하였으나 1504년 아라곤 국왕 페르난도 2세에 의해 앙주 왕가의 권리는 소멸되었고 나폴리 왕국은 당분간 아라곤 연합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이후 2세기 동안 나폴리 지역은 왕국의 지위를 잃고 스페인 국왕이 보낸 나폴리 총독 관할지역이 되는 신세로 전락했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일어나 잠시 오스트리아령이 되었다가, 최종적으로 1734년에 이르러서야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의 결과카를로 7세가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독립 왕국의 지위가 회복되었다.

허나 카를로 7세는 자녀 없이 사망한 이복형 페르난도 6세의 사망으로 스페인 국왕이 되면서 3남 페르디난도 4세에게 양위한 지 불과 40년 만에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아 파르테노피아 공화국(1799~1806)이 세워지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 점령당했다가(1806~1815), 나폴레옹 실각 후 빈 회의의 결과에 따라 부르봉 왕조가 복귀하고 시칠리아 왕국과 병합되어 양시칠리아 왕국(1816~1861)이 세워졌다. 이 왕국은 이탈리아 통일전쟁이 일어나 주세페 가리발디에게 점령당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양 시칠리아 왕국시대


노스트라다무스(1503~1566년)이후의 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왕국의 역사다. 백시선(百詩選)이 1555년에 초간본이 발간되게 된다. 그 이후의 역사를 예언하였다.


▶ 나폴리 왕국

 스페인 아라곤 왕국 (1282 ~ 1516)
 스페인 압스부르고 왕조 (1516 ~ 1713)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사보이아 공국(1713 ~ 1720), 오스트리아(1720 ~1734)
 카를로 7세(1734~1759)
 페르디난도 4세(1759~1799)
 파르테노피아 공화국(1799~1806)
 나폴레옹 보나파르트(1806~1815)
 양시칠리아 왕국(1816~1861)
 이탈리아 왕국(1861 ~ 1946)
 이탈리아 공화국 (1946 ~ )

여기에서 합의와 관련된 사건은 바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다. 그 전쟁으로 나폴리와 시칠리아가 왕국이 변화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노스트라다무스는 이 사건을 미리 예언한 것이다. 나폴리와 시칠리아 영토가 프랑스 영토가 되기 때문이다.


▶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 War of the Spanish Succession

감각들과 마음과 의 움직임으로 나폴리리옹시실리는 합의를 성사시키리라.(백시선 1권 11편 1~2행)

여기에서 합의에 이르는 과정이  감각, 마음 그리고 손과 발의 움직임으로 이루어진다는 이야기처럼  제1차 분할조약제2차 분할조약 체결하고도 해결이 안되어 14년간 전쟁을 통하여 해결하게 되는 합의를 성사시키는 과정을 노래한 것이다.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은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의 마지막 스페인 왕 카를로스 2세가 후사 없이 죽은 뒤 스페인 왕위계승문제를 둘러싸고 일어난 전쟁(1701~14)이다. 

당면한 왕위계승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으로 왕위계승권을 주장하던 영국·네덜란드·프랑스 등 주요 3국은 1698년 10월 제1차 분할조약에서 카를로스 2세가 죽으면 바이에른 선제후(選帝侯)의 아들 요제프 페르디난트 대공이 스페인과 스페인령 네덜란드 및 스페인령 식민지를 상속하는 데 동의했다.

스페인이 이탈리아에 보유한 영토는 분리시켜 오스트리아(밀라노 공작령을 할당받음)와 프랑스(나폴리와 시칠리아를 차지함) 양국이 분할해 차지했다. 그러나 1699년 2월 페르디난트 대공이 먼저 죽자 같은 해 6월 11일 영국과 프랑스에 의해 제2차 분할조약이 체결되었다(네덜란드는 이듬해 3월 조약에 서명). 스페인과 스페인령 네덜란드 및 스페인령 식민지를 신성 로마 황제 레오폴트 1세의 둘째아들 카를 대공이 상속하고 나폴리, 시칠리아, 그밖에 이탈리아 내에 있는 스페인 영토는 프랑스가 차지했다.

그러나 레오폴트 황제는 카를 대공이 모든 스페인 영토를 고스란히 물려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조약에 서명하기를 거부했다. 스페인의 귀족들도 레오폴트와 마찬가지로 영토분할에 분명하게 반대하면서 이 조약을 인정하지 않았다. 한편 카를로스 2세는 오직 부르봉 왕가만이 스페인의 영토를 원형 그대로 상속할 권리가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1700년 가을에 프랑스 왕 루이 14세의 손자인 앙주 공작 필리프에게 영토를 넘겨준다는 유언장을 작성했다.(이 왕조가 현재 스페인 왕조로 이어지고 있으며 현재도 그 후손들이 재위중이며 스페인 왕은 펠리페 6세 이다)

스페인 왕 펠리페 6세의 장녀인 레오노르 공주가 17세가 되자 3년간 군사훈련을 위하여 입대하는 모습(2023.07.17일 입대)


그해 11월 1일 카를로스 2세가 죽자 루이 14세는 11월 24일 자신의 손자를 스페인 왕 펠리페 5세(부르봉 왕가 최초의 스페인 왕)로 선포하고 이어서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침공했다. 그러자 영국과 네덜란드 및 레오폴트 황제는 반(反)프랑스 동맹을 결성(1701. 9. 7)했으며 나중에는 프로이센, 하노버, 기타 독일의 공국들 및 포르투갈이 이 동맹에 가담했다.

바이에른 선제후와 쾰른 선제후 및 만토바 공작, 사보이 공작은 프랑스편에 가담했으며 이중 사보이 공작은 1703년 진영을 바꾸었다. 루이 14세의 호적수였던 영국 왕 윌리엄 3세가 1702년 죽고 그 뒤를 이은 앤 여왕이 적극적으로 전쟁을 수행했다.

말버러 공작 존 처칠은 1711년 관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앤 여왕의 밑에서, 또한 전장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전장에서 수완을 발휘해 신성 로마 제국의 장군 사보이의 외젠 공(公)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말버러 공작과 외젠 공의 탁월한 지도력에 힘입어 반프랑스 동맹은 1704~09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잇따라 승리를 거두었다.

독일에서 벌어진 프랑스-바이에른의 합동공격은 1704년 블렌하임에서 분쇄되었으며(블렌하임 전투), 그후 프랑스군은 1706년 라미예 전투와 1708년의 오우데나르데 전투에서 패해 저지대 지역(지금의 베넬룩스 3국, 즉,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에서 퇴각했다. 프랑스군은 1706년 9월 7일 토리노 포위공격을 시도했으나 외젠 공의 눈부신 활약으로 실패하고 이탈리아에서도 밀려났다.

1706년 라미예 전투(Battle of Ramillies) 말버러 공작이 이끄는 영국-네덜란드 동맹군이 프랑스군과 싸워 승리한 전투




1708년의 오우데나르데 전투



반프랑스 동맹군이 지상전투에서 실질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한 유일한 곳은 스페인이었는데 당시 펠리페 5세스페인에서 자신의 입지를 확고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루이 14세는 1708년부터 전쟁종결을 모색하고 스페인 왕위계승권을 포기해 합스부르크 왕가에 양보할 의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은 루이 14세가 군대를 동원해서 손자를 스페인에서 추방해야 한다는 비현실적인 주장을 고집했다.

루이 14세가 이를 거부하고 협상을 파기하자 다시 전쟁이 일어났다. 1711년 2가지 사태 진전이 프랑스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4월 17일 카를 대공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영토 전체를 상속했다. 영국과 네덜란드는 카를에게 스페인 왕위계승권을 보장해주고 이후 전쟁을 계속할 의도를 버렸다. 영국에서는 말버러 공작의 정적들이 앤 여왕의 신임을 얻어 1711년 12월 31일 말버러 공작의 지휘관직을 박탈했다. 동맹이 와해되고 1712년 평화협정 협상이 시작되었다. 옛 동맹국 사이에 이해 관계가 부딪치는 바람에 각국은 프랑스와 개별적인 협상을 진행시켰다.

최초의 강화조약은 1713년 4월 위트레흐트에서 조인되었는데 이 조약과 그 후에 체결된 라슈타트 조약과 바덴 조약은 카를로스 2세의 유언장을 무시했고 그의 상속지는 열강들이 분할·점거했다. 루이 14세의 손자는 스페인 왕위를 계속 유지했지만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프랑스와 스페인은 식민지 영토를 잃고 세력이 위축된 데 비해 영국은 식민지 제국을 건설해 세력을 확장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위트레흐트 조약(treaties of Utrecht)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을 마무리지으면서 체결된 일련의 조약.




▶ 시칠리아 왕국

감각들과 마음과 의 움직임으로 나폴리리옹시실리는 합의를 성사시키리라.(백시선 1권 11편 1~2행)

시칠리아의 에트나 화산

시칠리아는 이탈리아의 섬이자 레조네로 지중해 최대의 섬이다.

이탈리아 반도를 장화라고 생각하면, 발 끝 부분에 위치한 섬이다. 지중해 최대의 섬이다. 인구는 5,030,000명, 면적은 25,711km²로 남한의 약 4분의 1이며 중심 도시는 팔레르모다. 이탈리아 본토로부터 불과 3.2 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다리를 건설할 법 하지만 추진은 지지부진하다. 건설 비용도 만만치 않을 뿐더러, 무엇보다 해당 지역에 지진활동이 빈번해 어려움이 많다.

시칠리아는 지중해의 중앙부에 위치한데다 이탈리아 반도와 북아프리카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 예로부터 전략적 요충지로 꼽혀 역사적으로 지배세력이 숱하게 바뀌어온 지역이다. 덕분에 다양한 문화가 혼합되어 시칠리아만의 특색이 매우 강하게 드러난다.

시칠리아에는 유럽에서 가장 높고 세계적으로 가장 활발한 화산 중 하나인 에트나 화산이 있다. 에트나 화산은 그리스 로마 신화의 이야기를 품은 곳이기도 하다. 한때 엄청난 유황을 생산하며 이를 노린 영국이 전쟁을 일으킨 적도 있다.


 스페인 아라곤 왕국 (1282 ~ 1516)
 스페인 압스부르고 왕조 (1516 ~ 1713)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사보이아 공국(1713 ~ 1720), 오스트리아(1720 ~1734)
 스페인 보르본 왕조 (1713 ~ 1816)
 양 시칠리아 왕국 (1816 ~ 1860)
 이탈리아 왕국(1861 ~ 1946)
 이탈리아 공화국 (1946 ~ )

나폴리와 시칠리아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합의에 따라 프랑스로 양도되게 된다.
즉 합의에 따라서 프랑스 영토가 되었는데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 그대로 성사된 것이다.


▶사보이아 공국(1713 ~ 1720)

1700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일어나자 사보이아 공국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프랑스의 편을 들어 참전했으나 사부아 공자 외젠이 이끄는 오스트리아 군대가 밀라노에 도착하자 오스트리아의 편에 섰다. 이에 프랑스군이 니차를 함락시켰고 이어서 토리노를 포위하였지만, 오스트리아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군을 물리쳤다.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이 체결되어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은 끝났고, 사보이아 공국시칠리아 왕국을 보상으로 받았다.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시칠리아 왕을 자처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국 동맹 전쟁이 발발하여 스페인에게 시칠리아를 빼앗겼다오스트리아의 도움을 받아 시칠리아를 탈환하기는 했으나 카를 6세의 강요를 이기지 못해 시칠리아를 반강제적으로 내주고 대신 사르데냐를 얻었다. 이후 사보이아 왕가는 사르데냐 왕을 칭하였다.

이후 사보이아 공국은 1847년 사르데냐 국왕 카를로 알베르토가 사보이아와 사르데냐를 하나의 영토로 완전히 통합시킬 때까지 계속 유지되었다. 하지만 편의상 사르데냐 왕국으로 묶어 부르는 경우가 많다.



▶ 프랑스 리옹

감각들과 마음과 의 움직임으로 나폴리리옹시실리는 합의를 성사시키리라.(백시선 1권 11편 1~2행)


1601년 리옹 조약으로 사보이아 공국의 살루초(Saluzzo) 합병을 인정하는 대신 오늘날 앵 데파르트망에 해당하는 브레스(Bresse)와 뷔제(Bugey) 지역을 양도받았다.


▶ Bresse (브레스) 지역

프랑스 동쪽 론 알프스 인근에 위치한 브레스 지역은 해발 180m~240m 의 완만한 평원지대이다.
이 지역의 이름은 Gallo-Roman 이름 Bricius(Brice)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중세 시대에 브레스(Bresse)는 Bâgé의 영주에 속했으며 1272 년에 Savoy House로 넘어갔습니다. 15세기 전반이 되어서야 부르그를 수도로 하는 지방이 그렇게 설립되었습니다. 1601 년에 리옹 조약에 의해 프랑스에 양도되었으며, 그 후 (Bugey / Bugê 지방과 함께) 처음에는 별도의 정부를, 나중에는 부르고뉴 정부의 일부를 구성했습니다. 

처음에 Bâgé는 지방의 주요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국경에 가까운 위치는 수도가 된 부르캉브레스의 출현을 촉진했습니다. 이 지방은 자신의 영토를 늘리고 싶어했던 프랑스 왕이 탐냈습니다. Bresse의 평평한 성격은 방어하기 어려웠습니다. 마침내 사보이 (Savouè)의 군주들은 공국의 알파인 지역으로 이전하고 피에몬테의 Château-Dauphin과 교환하여 브레스(Bresse)와 뷔제(Bugey)를 포기하기로 동의했습니다.

프랑스 동쪽 론 알프스 인근에 위치한 브레스 Bresse 지역은 해발 180m~240m 의 완만한 평원지대이다.


역사적으로 브레스와 뷔제는 사보이아 백작 필리포 1세가 조카 아메데오 5세를 이 지역의 상속녀와 결혼시키면서 사보이아 백국-사보이아 공국에 속했으나 1601년 리옹 조약으로 사보이아 공작 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가 피에몬테의 살루초(Saluzzo)를 합병하는 조건으로 프랑스 국왕 앙리 4세에게 넘기면서 프랑스 왕국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그런데 그 사보이아 공국이 시칠리아를 통치하게 된다.
사보이아 공국(1713 ~ 1720)기간 동안이다. 즉 별 관련이 없어보이는 나폴리, 시칠리아, 리옹이 이렇게 역사적으로 관련이 있다는 것을 노스트라다무스는 미리 백시선을 통하여 예언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복잡 다단한 역사의 핵심 줄거리를 예언으로 핵심만 하였다는 것은 그 펼쳐질 일을 환하게 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 Vittorio Amedeo II

칼(전쟁), 홍수 그런 다음 높은(고상한) 로마인들이 빠져죽고 혹은 살해당하고, 약한 두뇌(머리) 때문에 죽으리라.(백시선 1권 11편 3~4행)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으로 이탈리아의 로마인들이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즉 사보이아 공국은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여 이탈리아를 통일하게 된다.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외교 수완을 발휘해 최초로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왕이 되었고 차후 이탈리아 국민국가 확립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는 당시 열강들의 세력 각축전에서 친(親) 프랑스 정책을 추구했던 어머니 마리 드 사부아 느무르(1724. 3. 15 죽음)가 이끄는 섭정통치의 보호 속에서 어린시절을 보냈으며 루이 14세의 조카인 안 도를레앙과 결혼했다. 그러나 1690년 전쟁이 재개되자 루이 14세에 대립해서 오스트리아와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가 편에 섰으나 스페인인들이 그가 밀라노를 획득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자, 그는 자신에게 유리한 단독강화조약을 맺었다.

그뒤에 일어난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에서 처음에는 프랑스 편에 섰다가 1703년에 합스부르크 왕가로 돌아섰고, 마침내 1713년 시칠리아 왕위에 앉았지만 그뒤 1720년 왕위를 내주고 대신 사르데냐 왕으로 자리를 옮겼다. 1730년 그는 아들 카를로 에마누엘레 3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퇴위했는데 마음을 바꿔 다시 왕위를 찾으려 하자, 카를로 에마누엘레 3세는 그를 체포해(1731) 죽을 때까지 구금시켰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은 역사와 인문학을 공부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비유와  애메모호함으로 예언하지 않았다면 인류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루어진 다음에야 추정할 수 있기에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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