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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_우크라이나 전쟁

[러시아]러시아에 대한 유럽의 시각

by 청풍명월7 2024. 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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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서방 유럽과 미국의 주도로 러시아를 무너트리기 위해서 유도한 우크라이나 전쟁이 진행중이다. 그 내면에 흐르는 유럽의  러시아를 바라보는 시각을 살펴보자.

우크라이나를 내세운 집단 서방의 대리전에서 결국 러시아가 승리할 것이고,  러시아를 향한 집단서방의 이유없는 증오가 얼마나 뿌리깊은지를 설명하는 문장하나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러시아 매체 브즈글랴드드미트리 오레호프란 작가가 기고한 글입니다. 


서방(유럽)은 다시 러시아의 갈퀴에 걸렸다가 제목입니다. 그는 오늘날 러시아의 반대자는 기사, 식민주의자, 노예상인, 나치등 폴란드, 스웨덴, 프랑스, 앵글로색슨, 독일 정복자의 후손이라고 말했습니다.그리고 러시아의 임박한 붕괴를 믿는 것은 마이단시대 우크라이나 여성이 냄비를 들고 거리로 나가는 것 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2023년이 서방의 허황된 성명으로 시작됐다고 했습니다. 나토에서 무장하고 훈련받은 젤렌스키의 군대가 승리하고 있다. 우크라이나군은 키예프와 하르코프에서 러시아군을 몰아내고 헤르손을 점령했다. 분석가들은 우크라이나인의 동기, 러시아인의 약점과 임박한 모스크바 혼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패배한 러시아와 핵무기를 분할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볼 것을 제안했다는 등의 선전입니다. 

서구열강의 본질을 보여주는 삽화-영국-독일-미국-일본-러시아등의 중국침략



서방은 승리의 돌을 '우크라이나 다윗'의 물매에 넣고 러시아 골리앗의 재산을 분할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서방의 마음 속에 러시아는 진흙 발을 가진 거인으로 묘사됐고 남은 것은 더 세게 치는 것뿐이었습니다. 

▶오레호프는 4세기 전 러시아를 침공한 폴란드인들이 비슷한 방식으로 추론했다는 것은 흥미 롭다고 서술했습니다. 

폴란드 귀족들은 기사 작위가 낮고 무례하며 싸울 수없는 러시아인들은 저항하지 못할 것으로 여겼습니다. 폴란드인들은 러시아인들이 요새도, 용기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 술을 마시며 노략질을 하고 처들어갔지만 결국 크렘린에서 러시아민병대에 패배했습니다. 



[폴란드의 러시아 침공 요약]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1569년 루블린 조약을 통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으로 통일되었으며, 우크라이나 흑토지대 상당부분은 폴란드 왕국 측으로 양도되었다.

지그문트 3세 바사 제위 시기 폴란드-리투아니아 대공국은 혼란 시대 가짜 드미트리를 내세워 루스 차르국의 모스크바를 점령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 모스크바로 파견한 병력들은 소수의 리소프치치이 주가 되었고 모스크바를 확고하게 장악하지 못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세임(Sejm)에서 증원 병력을 보내는데 소극적인 태도를 보내면서 결국 격퇴되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17세기 보흐단 흐멜니츠키의 봉기로 키예프를 비롯한 우크라이나 흑토지대 영토 상당수를 상실한 것을 계기로 쇠퇴하였으며 18세기 말에는 폴란드 분할로 인해 멸망하기에 이른다. 폴란드 영토의 동부 일부 그리고 리투아니아와 벨라루스 영토는 러시아 제국 영토로 합병되었다.


▶ 스웨덴의 카를 12세도 같은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나르바에서 러시아군이 패배하자 스웨덴은 러시아를 약한 상대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표트르 대제의 잘 무장된 러시아군에 의해 폴타바에서 대패했습니다. 

나르바 전투
표트르 대제




▶ 이후 프랑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폴레옹의 사위이자 나폴리의 왕무라트기사도 정신을 발휘해 코사크 대열 앞으로 달려가 칼을 들고 오만한 표정으로 물러가라고 외쳤더니 코사크가 도망갔다고 허풍을 떨었습니다. 러시아의 야만인이 서유럽의 위용에 눌렸다는 일종의 거짓말이었습니다. 비유럽의 야만인이 문명의 보유자인 유럽인을 두려워했다는 믿음은 이처럼 오래전부터 서구에 퍼졌습니다. 

80만 대군이 러시아 원정에 거의 다 죽었다.





이런 환상은 나중에 영국의 역사, 수필가, 하원의원이었던 Hilaire Belloc의 The Modern Traveler에도 나옵니다. 영국인이 반란을 일으킨 흑인을 공포에 얼어붙도록 무용을 과시했다는 식의 글을 썼습니다. 무력으로 짓밟아 놓으면 야만인들이 고분고분해진다는 내러티브입니다. 유럽인들은 정신의 강인함, 고귀함, 대담함은 서양인들에게만 있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들은 아프리카, 아시아인뿐만 아니라 러시아인도 고귀함이라고는 없는 용기없는 야만인으로 간주했습니다. 

유럽은 줄곧 러시아를 약체로 봤습니다. 카프카즈, 발트해 연안국가, 핀란드, 몰도바, 캄차카를 짜르로부터 쉽게 빼앗을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크림전쟁도 그런 차원에서 발생했습니다. 서유럽은 러시아 정복에 계속 실패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를 망각합니다. 러시아는 선택된 백인 문명계급도 없다고 봤습니다. 그리고 러시아 사회는 이반뇌제 같은 폭군이나 예카쩨리나 여제로마노프왕조처럼 유럽에서 온 외계인의 힘으로 유지됐다고 여겼습니다. 

크림전쟁


[크림전쟁]
2시간 전만 해도 고결하거나, 비열하거나, 가지가지의 꿈과 욕망에 차 있던 사람들이, 몇 백의 사람들이, 이제는 피범벅이 된 굳은 손발을 팽개친 시체가 되어, 능보에, 참호에, 이슬이 촉촉이 내린 꽃이 만발한 골짜기에, 세바스토폴의 장례 교회의 마룻바닥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어제와 그대로였다. 샛별은 사푼 산의 산마루 위에서 반짝이기 시작했다. 깜박이던 별들은 서서히 하얘져 갔다. 불타오르는 듯한 진홍빛 아침 노을이 동쪽 하늘 한쪽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자줏빛의 긴 구름이 엷은 야청빛 지평선을 따라 흩어져 달려갔다. 모든 것은 어제와 그대로였다. 장대하고 아름다운 태양이, 생기에 찬 온누리에 사랑과 행복을 약속하며, 또다시 둥실 떠올랐다.
레프 톨스토이, 《세바스토폴 이야기》

거점 삼아 흑해에서 세력 확대에 나섰다(남하정책). 16세기 이래 흑해는 크림 칸국과 상전국인 오스만 제국의 바다였는데, 크림 반도를 확보한 러시아가 이 지역에 요새와 항구를 건설하고 해군을 양성하며 본격적인 남하를 시작한 것이다.

동유럽과 캅카스를 놓고 수백 년 간 충돌해온 앙숙인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은 나폴레옹 전쟁 동안 잠시 對프랑스 동맹의 일원으로 손을 잡았지만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다시 적대 관계로 변했다. 러시아는 동방정교회의 보호자로서 오스만 제국 치하 정교도들에 대한 보호 등을 구실로 오스만과 사사건건 충돌하며 보스포루스 해협, 다르다넬스 양 해협의 통행권 확보에 나섰다.

그러나 부유한 나라였던 대영제국은 나폴레옹 몰락 이후 급부상한 러시아의 해양 진출을 호락호락 지켜보지 않았다. 영국은 1838년 메흐메트 알리의 반란을 진압해주는 대가로 통상 협정을 맺어 정치적·경제적 영향력을 확보한 뒤,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고 군사·경제·정치·외교 등 모든 분야에서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했다. 결국 1841년, 이집트 문제의 사후 처리를 위해 주요 당사국인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여기에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까지 끌어들인 영국이 런던 해협 조약을 체결하면서, 오스만 제국의 보스포루스, 다르다넬스 해협 통제권을 국제적으로 공인시켰다.

한편 1851년 쿠데타를 통해 제정을 부활시킨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가톨릭 세력의 지지를 얻어 정치적 기반을 다지기 위해 오스만 제국에 성지관할권, 요컨대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에 대한 지배적 권리를 요구하였다. 오스만 제국이 이를 받아들이자 이전부터 동방정교회의 보호자로서 성지의 관할권을 주장하고 있었던 러시아와 충돌은 더욱 불가피해졌다.

영국의 압력으로 일단 해협의 통제는 포기했지만 러시아는 결코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오스만 제국과 국경을 접한 캅카스 및 발칸 반도 지역에서 계속적으로 국경분쟁을 유도하며 국지적 분쟁을 전면전으로 확대시킬 기회를 엿봤다. 결국 1853년 7월, 러시아가 오스만에 예속된 도나우 강 연안의 공국들을 공격, 점령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일촉즉발의 위기가 터졌다.

오스만 제국은 전 유럽을 공포에 떨게 했던 전성기의 국력을 오래 전에 잃어버리고 유럽의 환자로 전락했던 반면, 러시아는 나폴레옹을 꺾은 후 적어도 군사력에 있어서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열강으로 성장했기 때문에 누구도 오스만이 러시아의 위협에 정면으로 도전할 것이라고 예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가만히 지켜볼 생각이 없던 영국은, 전면적인 참전을 포함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을 약속하며 오스만 정부에 강경대응을 권유했다. 또한 오스만 정부도 도나우 강 유역의 속국(왈라키아 공국, 몰다비아 공국)들을 내주면 수도인 코스탄티니예가 코 앞인 터라, 군사적으로 이를 격퇴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전쟁을 결심했다. 여기에 팔레스타인 지역의 교회 및 성지 관할권을 놓고 러시아와 경쟁하던 프랑스 제국도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영국과 손을 잡았다.

결국 1853년 10월 4일,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 제국에 전쟁을 선포했다.



▶ 그리고 러일전쟁적백내전으로 짜르체제가 무너지자 영국은 쾌재를 불렀습니다. 특히 영국의 키플링은 러시아가 그렇게 빨리 먼지로 변했다면서 1918년에 노래를 불렀습니다. 키플링은 러시아가 파괴돼 유럽의 꿈이 현실화됐다고 말했습니다. 키플링은 1907년 노벨문학상도 받은 인사입니다. 그는 러시아의 몰락을 두고 3백년동안 피어있던 꽃이 300일만에 시들었다. 그녀는 죽었고 우리는 그녀를 위한 무덤을 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또 멀리던져 버려라 산채로 짓밟아라, 흙도 돌도 아닌 죽은 나라를 불쌍히 여기지도 말라면서 러시아를 저주했습니다.

블라디미르 오레호프는 서유럽민족에 대해 비슷한 글을 쓰는 러시아고전을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면서 영국의 러소포비아는 기가 막힐 지경이라고 말했습니다. 키플링은 그들이 야만국가로 여기는 러시아의 몰락이 영국의 미래에 길을 열어줬다고 믿었습니다. 

독소전쟁


▶오레호프는 광기로 새 세계를 건설하려 했던 히틀러에게서도 영국의 멘털리티를 발견할 수 있다고말합니다. 전차와 전투기를 소련에 던지며 진격한 히틀러는 유대 볼셰비키가 이끄는 느슨한 아시아 제국이 몇 달 지속되지 못할 것으로 확신했습니다. 

오레호프는 그러면서 지금 러시아를 적대시 하는 자들은 기사, 식민주의자, 노예상인, 나치, 폴란드, 스웨덴 프랑스, 앵글로 색슨, 독일 나치의 후손들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서구는 지금까지 고르바쵸프, 옐친, 코지레프, 넴초프, 나발니처럼 러시아에서 비현실적인 요소들을 끊임없이 찾고 있으며 러시아가 약하다는 말을 속삭이면 바로 달려들 태세라고 오레호프는 말했습니다. 

또 서방정치인들도 계속 러시아를 얕잡아 봤습니다. 오바마는 러시아가 강함이 아니라 약함 때문에 이웃을 위협하는 지역강대국이라고 했습니다. 맥케인은 러시아를 국가인 척 하는 주유소라고 했고 보렐은 러시아를 경제 난쟁이라고 했습니다. 마크롱은 러시아를 마지막 식민제국중 하나라고 했으며 리시 수낙은 불량국가라고 했습니다. 

오레호프는 2022년에 서방은 우크라이나에 더 많은 전차를 주면 러시아가 전장에서 패해 혼란에 빠져 분열되고 강탈당할 것으로 생각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꿈은 2023년이 끝나면서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는 대서양주의자들이 무기를 건네주고 개처럼 훈련시켰던 우크라이나의 다윗은 수로비킨라인에 이마를 부딛혀 깨졌다고 말했습니다. 오레호프는 오늘날의 서방이 여전히 으르렁대면서 노쇠한 미국대통령의 손으로 위협하고 처벌과 제재를 공언하고 있지만 러시아는 거기에 더 이상 겁내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한민족은 중립 입장에서 살펴봐야 한다. 서구와 러시아와의 싸움에 끼어서는 안된다. 언제가는 통일 한국에서 국경을 마주할 나라이다. 굳히 원한을 서로 살 필요가 없다. 이웃과 원수지면 좋을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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