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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의 대신 양문혜공(梁文惠公) 狄仁傑 | 적인걸
그는 누사덕의 추천으로 발탁되었고, 명경과를 거쳐 병주도독부법조를 지내다가 대리승으로 옮겼고
▶ 676년에 권선재와 범회의 등이 소릉의 측백나무를 찍어버리는 죄를 저질러 당고종이 그들을 죽이려고 하자 간언해서 영남에 유배를 보내는 것에 그치게 했다.
▶ 679년에는 시어사를 지내면서 위홍기가 숙우, 고산, 상양 등의 궁을 만들자 사치를 부린다는 죄를 들어 탄핵했으며, 왕본립이 총애를 믿고 권세를 휘두르자 간사하다고 상주했고 당고종이 그를 용서했지만 끝까지 간언해서 죄를 얻게 만들었다.
▶ 686년에는 영주자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어 주민들이 공덕비를 세울 정도였고 이 때문에 중앙으로 천거되어 동관시랑이 되었으며,
▶ 688년에 강남도순무대사를 겸임하면서 오, 초 지역의 사당 중 1,700여 곳을 불태우고 하우, 오태백, 계찰, 오자서의 사당만을 남겼다.
문창좌승을 지내다가 예주자사로 옮겼는데, 이때 이정의 모반이 진압되어 모반에 연루되고, 처형당할 자들이 2천 명에 이르렀다. 이때 적인걸은 저들은 잘못 인도된 것 뿐이니 용서하기를 요청해 측천무후는 그들을 풍주로 유배시키는 선에 그쳤고, 영주의 부로들이 유배된 자들에게 "적사군께서 당신들을 살렸다."고 말했다.
장굉보가 예주에서 뇌물을 요청했지만 이를 거절했다가 미움을 사서 복주자사로 좌천되었고,
▶ 691년에는 낙주사마로 있다가 지관시랑에 임명되었으며,
▶ 692년에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내준신으로부터 모반을 꾸몄다고 무고를 당해 팽택현령으로 강등되었다.
▶ 696년에 위주자사가 되었다. 당시 전임 자사는 거란족에게 맞서 백성들의 입성을 위해 수성기구를 정비했으나 적인걸은 부임 후 백성을 밭으로 돌려보내 농사를 짓게 하였다. 손만영은 그것을 듣고 싸우지 않고 물러났다. 나중에 위주 백성들이 비를 세워 이를 칭송하였다. 이듬해에 거란 세력들이 진압되자 무의종, 누사덕과 함께 하북으로 가서 백성들을 위로했으며, 거란족의 이해고와 낙무정이 당에 항복하자, 다른 사람들은 모두 죽이라고 할 때 적인걸은 그의 재능이 뛰어난 것을 이야기하면서 죽이지 말고 당나라의 신하를 삼을 것을 권했으며 유주도독을 지내다가 겨울 10월에 난태시랑이 되었다.
이후 난태시랑(蘭台侍郞)과 동봉각 난태평장사(同鳳閣蘭台平章事)를 거쳐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에 이르렀는데, 당시 조정에서는 백성들을 징발해 안서사진을 지키게 해 원성이 많았다. 이에 적인걸은 안동도호부를 폐지하고 고씨를 고구려의 군주로 복립하여 강남의 양초수송을 중지하고 하북의 백성들을 위로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의 건의는 비록 조정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의 지지를 얻었고, 얼마 후 납언직을 대행해 우숙정대 어사대부를 겸했다.
▶698년에 측천무후에게 간언해 무승사, 무삼사를 후사로 세울 뜻을 꺾고 폐위됐던 당중종을 황태자로 삼게 했다.
▶ 698년 6월 13일에 겹납언이 되었고 9월 21일에 하북도행군부원수가 되어 병사 10만을 거느리고 묵철가한을 추격했지만 따라잡지 못했다. 그 이후 하북도 무마대사로 임명되어 하북을 무마시켰는데, 당시 하북 백성들은 돌궐에 겁박당했고, 돌궐이 퇴각하자 이에 연루될까 두려워 피신했다. 이에 적인걸이 무측천으로 하여금 하북 여러 주의 백성들을 사면하고 귀향시켜 생업에 종사하게 하였다.
▶ 700년 여름 4월 29일에 측천무후가 더위를 피해 삼양궁으로 행차했는데, 이때 이국의 승려가 사리를 매장하는 것을 보여주겠다고 하자 적인걸이 부처는 이적의 신으로 저들은 가까운 사람을 미혹한다고 간언했다.
측천무후가 커다란 불상을 만드려고 하자 간언해서 이를 중지시켰다. 적인걸은 내사로 있으면서 측천무후가 그를 국로라 불러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았으며, 적인걸은 측천무후와 대면할 때마다 조정의 일을 끄집어내어 다투기를 좋아했지만 측천무후는 매번 뜻을 굽혀 그를 따랐다.
적인걸은 늙고 병이 들었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에 걸쳐 사직하기를 청했지만 측천무후가 허락하지 않았고, 같은 해 7월 26일에 사망했다. 적인걸이 죽자 측천무후가 조당이 텅 비었다고 탄식했으며, 조정에서 큰일이 있거나 많은 사람이 결정할 수 없는 일이 있으면 하늘이 나의 국로를 빼앗아간 것이 너무 이르다고 할 정도였다.
적인걸은 일찍이 장간지, 요숭, 환언범, 경휘, 두회정 등 수십 명을 천거했고, 이들은 모두 당(唐)을 중흥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한국사에도 간접적인 영향이 있는데 698년 안동도호부 도독을 지냈다. 그러나 그 해 적인걸의 동선으로 볼 때 실제 도호부에 부임하지는 않은 듯하고, 유주도독을 지내면서 잠시 겸임한 듯하다.
▶705년 중종에 의해 사공으로 추증되었고,
▶710년 예종에 의해 양국공으로 추증되었으며, 현종 시기인
▶747년에는 장간지, 위원충 등과 함께 태묘에 배향되어 중종 묘정에 부제되었다. 또한 후진 시기인
▶ 941년에는 태사로 추봉된다.
영화로도 많이 알려진 인물이다.
▷ 적인걸: 측천무후의 비밀 (2010년)
▷ 적인걸 2: 신도해왕의 비밀 (2013년)
▷ 적인걸 3: 사대천왕 (2018년)
▷ 적인걸 4: 신탐천하 (2018년)
▷ 적인걸 5: 측천무후 지유명도 (2018년)
▷ 적인걸: 윤회도의 비밀 (2018년)
▷ 적인걸: 천안의 비밀 (2018년)
▷ 적인걸 6: 집요술사 (2020년)
▷ 적인걸 7: 무두장군 (2020년)
▷ 적인걸 더 파이널 (2020년)
▷ 적인걸: 천살고란 (2020년)
▷ 적인걸: 백호의 저주 (202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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