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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人物) 열전

[조선시대인물] 북창北窓 정염鄭磏(1506~1549)

by 청풍명월7 2023. 12.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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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북창(鄭北窓)은 중종(中宗)·인종(仁宗)·명종(明宗) 시대의 사람으로, 이름은 렴(磏)이고 자(字)는 사결(士潔)이며, 북창(北窓)은 그의 별호이다. 그는 중종이 등극하던 해인 1506년에 온양 정씨(鄭氏) 집안에서 6남 5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부친 정순붕(鄭順鵬)이 우의정을 지냈고 조부는 사간원헌납을 지냈으며, 숙부가 형조판서를 역임하는 등 전형적인 사대부가였다.

 

북창은 태어나면서부터 신령(神靈)하여 온갖 재주를 배우지 않고도 스스로 터득하였다. 자질이 빼어났을 뿐만 아니라 욕심이 적어 티 없이 맑았으며총명함이 남달라 한두 번 글을 읽으면 모두 외울 수 있었다. 홍만종의 『해동이적』에 의하면, 북창은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말을 할 줄 알았고 해가 환하게 비치는 대낮에도 그림자가 없어서 생이지지(生而知之)한 천재요, 그림자가 없는 귀신이란 세평(世評)을 들었다. 이처럼 북창은 어려서부터 배우지 않고도 글을 잘하였고 자라서는 모든 학문에 달통(達通)하였다. 유불선 삼교뿐만 아니라 천문·지리·의약·복서(卜筮)·율려·산수 및 산수화에 능통했는데 스승도 없었고 제자도 없었다고 한다.



그는 또한 어릴 때부터 마음을 가다듬어 신(神)과 통할 줄 알았다. 가까이는 동네나 집안의 사소한 일부터 멀리는 사해(四海) 모든 나라의 풍속이 다른 것을 알았다. 또한 새와 짐승의 소리를 알아듣기로 유명했다. 어느 날 잔칫집에 갔다가 새소리를 듣고 그 집 술이 무덤가에서 거둔 밀로 빚은 것임을 간파했다. 산속에 거처할 때는 산 아랫마을 사람들이 하는 일을 알고 말하기를 “아무개 집에 잔치가 벌어졌다.”, “아무개 집에는 초상이 났다.”라고 해서 뒤에 알아보면 틀림이 없었다. 이것은 그가 새나 짐승이 지저귀거나 울부짖으면서 하는 소리를 환하게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경기도 양주시 산북동 산92 북창의 묘



그뿐만 아니라 개소리·새소리 같은 오랑캐의 말까지도 마치 귀신처럼 잘 알아맞혔고, 온갖 술법도 말은 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었다. 허목(許穆, 1595~1682)이 저술한 『기언(記言)』과 이능화(李能和, 1869~1943)의 『조선도교사』에는 그의 재주가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해볼 수 있는 흥미로운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미수 허목(許穆, 1595~1682)


북창이 14살 때 사신(使臣)으로 가는 부친을 따라 명(明)나라의 북경(北京)에 갔다가 봉천전(奉天殿)에서 한 도사(道士)를 만났다. 그가 북창에게 조선에도 도사가 있는지 묻자, “우리나라에는 삼신산(三神山)이 있어서 낮에도 신선(神仙)이 승천하고 장생불사(長生不死)하는 사람을 볼 수 있으니 도사가 귀할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며 신선이 되는 단계를 설명하니, 그 도사가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 버렸다. 한편, 유구국(琉球國: 현재의 오키나와) 사신은 중국에 들어가면 반드시 진인(眞人)을 만날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북창을 만나자 작은 책자를 꺼내 보이며 “이 책자에 ‘모년 모월 모일 중국에 들어가 진인을 만나 뵙는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하면서 『주역』에 대한 가르침을 청했다. 북창은 즉석에서 유구어로 답하며 그와 함께 사흘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역리(易理)에 대해 논했다. 이 소식을 듣고 찾아온 각국의 사신들이 그에게 질문하면 그 나라 말로 척척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북창은 천인(天人)임이 틀림없다며 감탄해 마지않았다.

이능화(李能和, 1869~1943)



이처럼 북창은 젊었을 때부터 신선술(神仙術)과 역리(易理)에 밝았고 여러 나라의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만큼 뛰어난 재주를 지니고 있었다. 성군의 자질을 갖췄던 인종은 중종이 승하하고 나서 즉위했을 때, 병풍 뒤에 ‘영의정 갖바치, 좌의정 서경덕, 우의정 정렴’이라고 써놓아서 이미 삼정승을 내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타고난 수명이 길지 않아 등극한 지 9개월 만에 승하함으로써 북창이 중용될 기회가 사라지고 말았다는 일화가 전한다. 이러한 이야기는 당대에 북창의 학문과 인품이 그만큼 높게 평가받고 있었다는 방증(傍證)일 것이다.

 
그의 학문에 대해 성수익(成壽益)은 “수리(數理)에 있어서는 소강절(邵康節)과 같고의술(醫術)에서는 고대의 명의인 유부(兪跗)나 편작(扁鵲)과 같았다.”라고 했다. 조선 후기의 문신 장유(張維)는 “그가 수련함에는 도가(道家)와 비슷했고 깨달음에는 선가(禪家: 선종)에 치우친 듯하며, 인륜의 상도(常道)와 의리를 행함은 한결같이 우리 유가(儒家)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라고 평했다. 일찍이 북창은 “성인(聖人)의 학문은 인륜을 중히 여기므로 오묘한 곳을 말하지 않았고, 도교나 불교는 오로지 마음을 거두고 성(性)을 깨닫는 것을 근본으로 삼아서 위로 천리(天理)를 통하는 곳은 많으나 아래로 인사(人事)를 배우는 일은 전혀 없으니, 이것이 삼교가 다른 점이다.”라고 하여 유불선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이처럼 그는 역학(易學)과 의학뿐만 아니라 유불선 삼교의 본질을 꿰뚫어 오묘한 이치를 터득했기 때문에 그의 주장은 대부분 다른 사람들이 미처 논구하지 못한 내용이 많았다.



이런 북창도 일찍이 다른 사람의 마음속을 통하는 석가의 법을 터득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산사(山寺)에 들어가 선종(禪宗)의 육통법(六通法)을 연마하기 위해 조용히 관(觀)한 지 사흘 만에 문득 환하게 돈오(頓悟)하였다. 이후 그는 산 아래 백 리 밖에서 벌어지는 동네의 일을 마치 눈으로 본 것처럼 다 알았는데, 부절(符節: 대나무나 옥으로 만든 신표)을 합한 것처럼 꼭 들어맞아 백의 하나도 어긋남이 없었다. 여기서 육통법은 불교의 ‘육신통(六神通)’을 이르는 것으로, 정신을 완전히 통일함으로써 얻어지는 여섯 가지 신묘한 능력을 뜻한다.

조령산



조선 후기 임방(任埅, 1640~1724)이 편찬한 『천예록(天倪錄)』에는 이와 관련된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북창이 하루는 고모를 찾아뵙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그러던 중 고모가 영남으로 보낸 노비가 아직 돌아오지 않아 걱정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북창은 앉은 자리에서 그 지방을 향해 바라보더니 그 노비가 조령(鳥嶺)을 넘다가 양반에게 무례를 저질러 두들겨 맞고 있으나 곧 돌아올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고모는 그의 말을 농담으로 생각하면서도 그 날짜와 시간을 벽에 기록해 두었다. 나중에 돌아온 노비에게 확인해보니 북창이 했던 말이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고 한다. 북창은 노자(老子) 『도덕경』의 “문밖에 나가지 않고도 천하를 안다(不出戶, 知天下 불출호 지천하).”는 말처럼 천하사를 한눈에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북창은 예언능력도 탁월하였다. 그는 6형제 중 장남이었는데 유독 셋째 아우의 부인인 구씨(具氏)를 존중함이 남달랐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우리 집안은 모두 제수씨의 자손이 될 것이니 내가 어찌 존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실제로 북창의 손자 대에 이르면 형제들은 모두 자손이 없었는데 셋째 집안에서만 대가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다고 한다. 또 판서를 지낸 홍성민과 함께 술을 마실 때 작은 소주잔을 가리키며 훗날 이 잔이 큰 사발만 해지면 나라에 큰 변고가 일어날 거라고 했다. 북창이 세상을 떠난 후 세간에서는 큰 사발로 소주를 마시기 시작했는데 이 무렵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홍성민은 그의 선견지명을 칭송하였다.

조상님의 은덕



그는 또한 풍수지리에도 밝았다. 한번은 그의 사촌 동생 삼형제가 찾아와 북창에게 아버지의 묏자리를 잡아 달라고 청했다. 북창이 그들을 데리고 진흙밭으로 가서 이곳이 뛰어난 명당이라고 이른 뒤 한밤중에 관(棺)을 묻도록 당부했다. 삼형제가 아버지의 시신을 안장하기 위해 구덩이를 팠더니, 땅이 워낙 물기가 많은 진흙으로 이루어진 까닭에 물이 반 정도 차올랐다. 그들이 처음에는 북창을 의심하다가 그가 물이 나오는 것을 모르지 않았을 것으로 믿고 돌을 넣어 구덩이를 평평하게 만들어서 묘를 썼다. 나중에 북창에게 전후의 일을 고하니, 구덩이에 던진 돌의 개수만큼 귀한 자손이 태어나리라 했는데, 과연 그 후 그 집안에서 명사(名士)가 많이 나왔다.



■정북창의 관직생활과 은둔생활

 

북창은 어렸을 때부터 여러 학문에 통달하였고 남다른 재주를 지녔지만, 32살이 되어서야 소과(小科)인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해 진사(進士)가 될 수 있었다. 이것은 그의 부친 정순붕이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1521년에 삭탈관직 된 이후 등용을 제한받다가 1537년에 복직하면서 그의 일가(一家)도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북창은 벼슬길에 뜻을 두지 않아 대과(大科)에는 응시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음률에 밝고 천문과 의약에도 조예가 깊었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그에게 종6품인 장악원주부 겸 관상감과 혜민서의 교수를 제수하였다.

 

그는 중종과 인종이 위독했을 때 내의원(內醫員)과 제조(提調)들이 북창을 명의(名醫)라고 천거할 정도로 뛰어난 의술로 명망이 높았다의술과 약리(藥理)에 정통했던 그가 항상 했던 말은, “의원이란 의논한다는 것이니, 마땅히 음양(陰陽)과 한열(寒熱)을 살펴 증상에 맞게 약을 투여하면 거의 다 완전할 수 있다. 그런데 세상의 의원들은 낡은 서적에 국한되고 한 가지 방술에 집착하여 변통(變通)할 줄을 모르고 증상의 반대로 약을 쓰고 있으니, 어떻게 효험을 볼 수 있겠는가?”라는 것이었다.

과천 청계산



그 후 포천현감으로 있다가 임기가 차기 전에 관직에서 물러나 세속과는 인연을 끊고 과천 청계산과 양주 괘라리에 은둔하여 약초를 캐며 살았다. 애초에 관직에 뜻이 없었던 그가 과거를 본 것은 부모의 권유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던 중 속세를 등진 것은 부친 정순붕이 자신의 출세를 위해 을사사화(乙巳士禍)의 주역이 되어 무고한 사람들을 해하려 했기 때문이다. 북창은 부친에게 그 일의 부당함을 누차 고(告)하였고울면서 힘써 간하며 만류해 보았으나 듣지 않았을 뿐더러 도리어 크게 미움을 받았다.

을사사화(乙巳士禍)란?
을사사화(乙巳士禍)는 명종 즉위년(1545)에 대윤(윤임)과 소윤(윤원형)이 충돌한 끝에 소윤이 승리하여 대윤 일파가 모조리 숙청된 사화(士禍)를 말한다. 을사사화 자체는 대윤, 소윤 대신들 내부의 대결이며 그와 동시에 파평 윤씨 내부의 대결이었지만, 특히 을사사화 이후로 벌어진 사건들에서 대윤에 협력했던 사림이 피해를 입어 사화라고 불린다.
'훈구파가 사림파를 핍박했다'라는 단순한 구도로 이해하기엔 을사사화는 그 구도에서 많이 벗어나는 편이다. 옥사를 주도한 정순붕은 원래 기묘사화를 당한 조광조 일파의 선비였고, 남곤, 심정, 김안로가 그랬듯이 대다수 권신은 사림 출신이 많았다.
대윤의 핵심인 윤임과 소윤의 핵심인 윤원형/문정왕후는 9촌 지간으로, 윤원형의 아버지인 윤지임이 윤임의 8촌 종형이다.


부친과 넷째 아우 정현은 거사를 그르칠 것을 우려해 그를 제거하려고 했다. 이를 미리 간파한 북창은 몸을 피한 후 속세와의 인연을 끊은 채 산속에 은거하며 살았다. 북창이 남긴 글 가운데 당시 그의 심경을 엿볼 수 있는 구절이 있다.


 
세상에 처함에는 겸손하고 물러남을 힘써서 높은 벼슬을 바라지 말고 몸을 낮춰 살 것이며, 권세 있는 집안에 붙어 혼인하지 말라. 시절이 태평하면 벼슬을 해도 되나 세상이 어지러우면 전원으로 물러나 농사를 지으며 자급자족하라.” - 『온성세고(溫城世稿)』 「유훈(遺訓)」 중에서
 

은둔생활을 하면서 북창은 산림에서 자연을 벗 삼아 선도(仙道) 수련에 전념하고 의리(義理)를 탐구하며 지냈다. 어느 날 한 선비가 찾아왔는데, 매우 추운 겨울이어서 매서운 추위를 견디지 못했다. 그러자 북창은 자기 곁에 있는 차가운 쇳조각을 집어 겨드랑이에 끼워 따뜻하게 했다. 잠시 뒤 꺼내서 그 손님에게 주었는데, 마치 화롯불처럼 따뜻해 땀이 흘러 온몸을 적셨다. 또 어떤 사람이 고질병을 앓아 여러 달 침과 약을 썼으나 나아지지 않았다. 북창이 한 움큼의 풀을 손으로 비비고 입으로 불어 따뜻하게 한 뒤 그 환자에게 복용하도록 했더니 병이 곧 나았다.

 

북창은 천성적으로 육식을 즐기지 않았으나 술을 좋아하여 서너 말을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 하지만 만년(晩年)에는 신병(身病)으로 인해 한 잔의 술도 마시지 않으며 조심했다. 그의 풍채는 구름을 탄 학과 같았는데, 이때는 특별한 증세가 없이 몸이 마르는 병을 앓고 있었다. 그래서 항상 자신이 헤아려 병세에 따라 하인에게 아침저녁으로 약재를 달리 쓰게 하였다.

 

스승도 제자도 없었던 북창은 훗날 제학(提學)에 추증되었고 청원(淸原)의 노봉서원(魯峰書院)에 제향되었다. 그의 묘소는 생시에 그가 집안의 장지(葬地)로 친히 잡아두었던 사정산(砂井山)온양 정씨 선영(先塋) 하에 자리하고 있다. 양주시에는 그가 은거하며 수련했던 장소를 ‘정씨골’이라 하여 아직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오늘날 전해지는 북창의 대표적인 저서로는 이능화의 『조선도교사』에 부록된 『용호비결(龍虎泌訣)』온양 정씨 문집인 『온성세고(溫城世稿)』에 실린 45수의 시와 「가훈」이 있다.

 

북창은 최치원으로부터 이어지는 내단학을 크게 성취해 조선조 단학의 중시조로 평가받고 있다. 그가 저술한 『용호비결』은 도교의 내단수련법(內丹修鍊法)을 알기 쉽게 요점만을 서술하여 초학자라도 곧바로 실천에 옮길 수 있도록 한 것이어서 단학의 교과서라 불린다. 여기서 그가 밝힌 정기신론(精氣神論)은 조선의 의학사상, 특히 허준의 『동의보감』의 원리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런 그가 단명한 사실은 수명과 관계된 일화를 통해 이해해 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의 타고난 수명이 80여 세임을 알고 있었다. 어느 날 과거에 낙방한 친구가 찾아와 자신의 명(命)이 짧아 가족들의 생계가 막막함을 한탄하며 도움을 청했다. 그러자 북창은 어떤 노인(사명신군: 司命星君)을 찾아가 끝까지 매달리라고 일러주었다. 이 일로 북창의 수명 중 30년이 그 친구에게 옮겨졌다. 또, 한번은 다른 친구의 부친이 그를 찾아와 병에 걸려 위독한 자식을 구해달라고 간청했다. 북창은 그 친구가 한명(限命)이 되었음을 알았지만, 남산의 두 노인(남두신군·북두신군)을 찾아가 부탁하면 수명을 연장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로 인해 북창의 수명 중 10년이 다시 그 친구에게 옮겨졌다고 한다.



정북창은 짧은 생애를 살았고 벼슬이 높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앞일을 예견하고 의술과 수학에 정통하여 그의 사후 수십 년 뒤에도 궁중에서 거론되곤 하였다. 선조와 신하들이 『주역』을 강론하는 자리에서 북창이 타심통(他心通: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술법)을 얻었으며, 점을 잘 치고 의술을 잘하기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고 거론되었다. 또, 한번은 수학(역학)에 정통한 인물에 화제가 미치자, “우리나라에는 화담(花潭) 이후에 정렴이란 자가 수학이 서경덕에게 뒤지지 않아 미래의 일을 알았다고 합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북창의 비범한 재주는 후대 사람들에게도 강한 인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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