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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조기 인물로
고려거란전쟁 드라마에서 나오는 인물
강조( 康兆)는 누구인가?
고려 초기의 문관이자 권신. 고려 왕실 반정의 시초 격인 강조의 정변을 주도한 인물이다.
목종으로부터 큰 신뢰를 받았으나, 되려 정변을 일으켜 목종을 시해하고 현종을 옹립했다. 거란이 고려를 침범했을 때는 직접 출정했고, 초반에는 선전하다가 통주 전투에서 패배했다. 요나라 성종의 회유를 받았지만 완강히 거부해 전장 한복판에서 최후를 맞았다.
강조(964~1010) : 강조의 본관과 세계는 자세하게 알 수 없으나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강씨가 토성으로 나와 있는 곳이 주로 황해도 서해안 일대의 군현들이다. 따라서 강조의 본관은 신천(信川)·영강(永康)일 가능성이 높다.이수건, 『한국중세사회사연구』, 일조각, 1984.
위에선 강조의 본관을 신천 강씨와 영강 강씨 둘의 가능성을 제시하였으나, 영강 강씨의 시조 강증(康拯, 1049년 ~ 1120년)은 강조 사후의 인물이므로 강조는 신천 강씨의 인물으로 해석해야한다.
결정적으로, 신천 강씨 족보에 따르면 강조는 신천 강씨의 인물이 맞다. 부를 '태주'로 하는 1-1쪽(고려시대 인물)을 보면 조(兆)를 확인할 수 있다.
강조는 서북면 도순검사로서 북방 군대를 순찰하고 있었다. 어머니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자신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품자 목종은 강조를 빨리 내려오게 해 자신을 호위하게 한다. 하지만 강조는 도리어 목종을 폐위시키고 대량원군을 옹립한다.
1009년 2월 3일, 강조는 본격적으로 움직인다. 합천에서 갓 도착한 17세의 대량원군을 즉위시킨 뒤 목종을 폐위하고 양국공(讓國公)으로 끌어내린 뒤 고향 충주로 내려가고자 하던 그를 부하들인 김광보와 안패를 보내 현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에서 시해한다. 이후 천추태후를 황주로 유배시키고 친족을 섬으로 유배, 김치양과 그의 6살 아들, 목종에게 빌붙어 전횡을 일삼던 유행간 등을 죄다 처형하거나 귀양을 보내면서 천추태후 - 김치양 세력과 자신에게 걸림돌이 될만한 이들을 완전히 제거한다.
강조는 이어서 2월에 중대사(中臺使), 3월에 이부상서(吏部尙書), 및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승진해 요직을 차지한다.
강조가 목종을 폐위한 이유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강조가 목종이 시해되었다는 거짓 정보를 듣고 개경 근교까지 휘하 군을 이끌고 진군하였는데 목종이 아직 멀쩡히 살아 있다고 하자 이미 여기까지 군대를 끌고 와 버렸는데 반역으로 몰릴까 두려워 폐위시켰다는 설과 강조가 평소에 우유부단하고 추문이 많은 목종에게 불만을 품고 새로운 왕을 옹립하기 위해 폐위했다는 설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북적(北狄) 거란이 호시탐탐 고려를 노리고 있었다는 것. 요성종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군주를 시해한 반역자 강조의 죄를 묻는다는 명분으로 의군천병(義軍天兵)이란 이름을 붙인 40만 대군을 직접 이끌고 고려를 침략했다.
물론 요성종이 진짜로 목종을 시해한 죄를 묻기 위해 침공한 것은 아니다. 성종은 모후의 사망 이후에 황제 단독으로 친정을 하여 자신의 군사적 능력을 조정과 군부에 보여주고 1차 여요 전쟁 이후에 고려가 통제력을 갖고 개척한 강동 6주를 빼앗거나 고려를 완전히 복속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고려를 침공했다. 기존에는 송을 공격하기 전에 후방을 든든히 하려는 목적으로 고려를 침공했다는 설이 정설처럼 여겨졌지만, 이미 송 - 요 양국은 전연의 맹을 맺어 평화를 이뤘고 서로가 상대방을 완전히 끝장낼 수 없음을 인식한 상태였다. 역사적 기록에서도 성종은 고려에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했고 철퇴할 때에도 현종의 입조를 약속받고 퇴각했다. 이후에도 송으로부터는 세폐를 받고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고려는 침공하는 모습을 보면, 대송 전쟁 때문에 고려를 침공했다는 말이 사실이 아님이 드러난다.
성종의 침공을 알게 된 강조는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 직위를 받아 군권을 위임받고 직접 출진한다. 사료에서는 조정의 명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본문에 언급했듯이 강조가 이미 실권을 장악했고 그 과정도 자발적일 가능성이 높으므로 군권의 위임 과정도 조정의 결재는 요식 행위이고 강조 본인이 처음부터 계획했을 가능성이 크다. 제2차 여요전쟁 때 고려는 30만 대군을 소집하였다.
강조는 고려의 실권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개경에 머무르지 않고 최고 사령관으로서 직접 출전했다. 거란군에게 포로로 잡혔을 때의 행적을 보면 고려의 장수로서 무거운 책임감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출전했다는 해석도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강조가 책임감이 부족했다고 해도 출전이 불가피한 상황임은 분명했다.
취약한 권력기반 : 이때 강조는 전왕을 시해하고 새로운 왕을 옹립함으로써 사실상 정권을 장악한 상태였음에도 권력 기반이 매우 취약했다. 당장 중신 중 한 명이자 목종으로부터 현종의 호송 임무를 명 받았던 최항이 정변을 일으켜 군왕을 끌어내린 강조를 보고 "고금에 이러한 일이 있었느냐?!"며 대놓고 일갈할 정도였다. 당시 명백한 권력자였음에도 면전에서 대놓고 비판을 다 들을 정도로 초기부터 권력 기반과 입지가 불안정했다는 것. 이런 상황에서 거란이 자신의 집권을 명분으로 침공했는데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면 반대 세력에게는 "강조 저 놈 때문에 거란이 쳐들어 왔는데도 자신은 겁나서 출전도 하지 않고 비겁하게 숨어 있다."는 비판의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빈약한 인력풀 : 게다가 30만이라는 대규모 병력을 지휘해 거란의 침략을 방어해야 하는 상황인데 강조에게는 자신을 대신해서 병력 지휘를 맡겨서 출전할 정도로 신뢰할 수 있는 인사도 전혀 없었다. 아니, 신뢰 이전에 그런 능력과 위치를 가진 인사부터가 없었다. 결국 본인이 울며 겨자 먹기로 출전해야 했던 것이다.
거란군이 국경 지역인 흥화진에서 양규가 지휘하던 고려군에게 고전을 면치 못하자 요성종은 약간의 별동대를 귀주 방면으로 보내고 본대는 빠르게 강조가 주둔한 통주로 진군하여 이틀 만에 도착하게 된다. 야전으로 승부를 보기로 한 강조는 전체 부대를 셋으로 나누어 한 부대는 전면, 또 한 부대는 배후 요새와 전면에 나선 부대 사이의 후퇴로를 지키기 위해 성 근처, 나머지 한 부대는 주변 고지에 주둔시켜 굳건히 지키게 하였다. 그리고 하천을 기병 기동을 방해하는 천연 참호로 이용하여 측면 강습을 막고 전면에는 검차(劍車)를 배치하여 첫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에 대한 기록을 보면,
兆引兵出通州城南, 分軍爲三, 隔水而陣. 一營于州西, 據三水之會, 兆居其中. 一營于近州之山, 一附城而營. 兆以劒車排陣, 契丹兵入, 則劒車合攻之, 無不摧靡. 契丹兵屢却. 兆遂有輕敵之心, 與人彈棋.
강조가 군대를 이끌고 통주성 남쪽으로 나가 군사를 셋으로 나눠 강물을 사이에 두고 진을 쳤다. 하나는 통주 서쪽에 군영을 세워 세 강물이 만나는 곳을 차지하였는데 강조가 그 중에 머물렀다. 하나는 통주 근처의 산에 쳤으며, 하나는 성에 붙여서 군영을 만들었다. 강조가 검차로 진을 쳤다가 거란의 군병이 들어오면 검차가 합공하여 꺾거나 쓰러뜨리지 못하는 바가 없었으니(항상 이겼다는 뜻) 거란병이 번번히 퇴각하였다. 강조는 점차 적을 가볍게 여기는 마음을 품어 사람과 바둑을 두었다.
지속적으로 거란군을 밀어내는데 성공하자 강조는 긴장이 풀렸는지 점차 방심하기 시작했다. 한편 거란군은 대군이 한 번에 들어가기는 어려우니 전략을 바꿔 소수 부대로 빠르게 치고 나오기로 한다.
그리하여 선봉 야율분노, 야율적로를 파견해 삼수 쪽 진영을 치고 빠지는 식의 속도전으로 나온다. 허나 강조는 처음 삼수 쪽 진영, 즉 자신이 있는 진영이 뚫렸다는 보고를 받고 믿지 않았다. 아니면 소수만 잠시 들어온 것으로 여겼을 수도 있다.
"如口中之食 少則不可宜. 使多入."
"마치 입안의 음식처럼 적으면 만족스럽지 않다. 더 많이 들어오게 해라."
이 때 강조의 부대를 격파하는데 선봉에 선 부대가 '우피실군'[17]인데, 거란군의 최고 정예인 이들의 기동력이 강조의 예상보다 훨씬 뛰어나서 미처 고려군이 협공하기도 전에 지휘부가 붕괴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적이 이미 안까지 깊숙히 들어왔다는 보고를 또 받자 그제서야 사태가 여간 심각해진 게 아님을 비로소 깨닫는다. 다른 두 진영이 협공하기 전에 본인의 진영이 먼저 붕괴되자 이제는 끝이라는 것을 깨닫고 무릎을 꿇고 일어나지 못했다. 《고려사》에서는 이때 목종의 혼령이 강조 앞에 나타나 "이제 네 놈은 결코 천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라고 호통을 치자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라며 무릎 꿇고 빌었다고 전한다. 이후의 장렬한 죽음과 연관해 볼 때 뒤늦게나마 자신의 행위가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를 깨닫고 목종을 떠올리며 후회한 것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강조의 방심이 한몫하기는 했지만 일부 평가에서는 "전술적 부분보다는 병사들의 숙련도가 강조의 지시에 대해 그만큼 빠르게 반응하지 못한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혹은 제 아무리 많은 병력이 있어도 한군데 뭉쳐 기동력이 제한되어버리면 그냥 앞줄의 병사 때문에 안 쪽의 병사들은 우왕좌왕 해버려 뭉치가 되어버리기 십상인데 이런 점을 이용해 강조는 "거란군은 기동력을 우선시하는 군이라 이를 제한시켜 버리기만 하면 승리할 수 있을 거라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이것은 일반적으로 크게 나쁘지는 않은 판단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거란이 그것을 무시할 정도의 엄청난 기동력을 보여줬다는 것. 실제 거란이 기동력을 살려 소수 정예군만으로 휘젓는다면 정예 '우피실군'이 많은 손상을 입기는 하겠지만 엄청난 기동력을 회복하니 전 같은 몰아죽이기 전략은 안 통했을 것이다. 결국 거란은 하이리스크 하이리턴 전략을 썼고, 강조는 이 점을 놓친 것이다.
어찌 되었든 이 통주 전투에서 강조가 지휘하던 30만 고려군이 거란군에게 대파되면서 순수 전사자만 무려 3만 명이나 발생했으며, 그 외 이현운과 도관원외랑(都官員外郞) 노전(盧戩), 감찰어사(監察御史) 노의(盧顗) · 양경(楊景) · 이성좌(李成佐) 등도 모두 덤으로 사로잡혔고, 노정(盧頲)과 사재승(司宰丞) 서숭(徐崧), 주부(注簿) 노제(盧濟)는 모두 그 자리에서 전사하는 엄청난 피해가 발생하게 된다.
통주 전투에서의 대패 후 포로로 잡힌 강조는 결국 거란 요나라의 신하가 되기를 거부하고 요나라군에게 죽임을 당한다.
후세인들이야 고려가 거짓말처럼 승리할 것을 알고 있지만 당시 강조 입장에서 거란의 침공은 고려라는 나라의 사활을 자기 손으로 뒤집은 것이나 마찬가지로 여겨질 만하니 심리적으로 압박감과 죄의식을 느껴도 이상하지 않다. 최후는 당시 강조와 함께 포로가 된 오랫동안 자신의 부하로 활약한 이현운이라는 자와 대비되는 장렬한 죽음으로 기록되었다.
강조는 쿠데타를 일으켜 왕을 시해했지만, 자신이 왕이 되려는 역심은 없었다.
이후에 역성혁명을 일으키는 자들도 선위 받기에는 시기상조이거나 명분을 더 확보하기 위해 일단 "나는 절대로 왕이 될 생각이 없으며 단지 새로운 분을 왕으로 모시려 할 뿐이다."라고 허울 뿐인 충성 코스프레를 하는 사례가 흔했지만 이후 강조의 행적을 보았을 때 권력욕 자체는 있었어도 역심은 없었을 가능성 역시 무시할 수는 없다. 애초에 무리해서 왕위에 오르는 것보다 얼굴마담 하나 세워놓고 본인이 권신으로 권력을 휘두르는 게 나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강조가 실권을 잡고 뭘 해보기도 전에 거란군과 싸우다 붙잡혀 처형된 탓에 지금에 와서는 모든 게 가설의 영역이 되어 버렸긴 하다.
외치 부분에서는 당시 고려의 일개 무장도 아닌 최고 권세가가 직접 최전선에 나가 목숨 걸고 싸운 점만큼은 분명 호평받을 만하다. 물론 상기되어 있듯 일단 명분론적으로는 거란의 침공 자체가 자신이 일으킨 정변 때문에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강조가 출전하지 않는 것이 어찌 보면 더 이상하기는 하다.[21] 또한 자신이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잡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군권을 맡겼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으니 강조 자신이 직접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22][23]
그래도 포로로 잡힌 뒤 요 성종의 회유를 받아들여 생존을 도모할 수 있었고, 특히 살이 찢겨나가는 극형을 받으면서까지도 스스로를 "나는 뼛속까지 고려인이다!"라고 목소리를 높이다 장렬하게 최후를 맞은 것을 보면 강조는 고려 왕가에 대한 충신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고려인이란 정체성만큼은 확실한 사람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인 간신들처럼 단순히 권력만을 탐하는 것이라면 그냥 요 성종의 항복권유를 받아들였을테니. 심지어 정벌의 명분이 반역을 저지른 강조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사로잡자 황제 본인이 직접 나서서 투항을 권유한 데다가, 강조 본인의 참패로 고려의 전쟁 수행 능력이 박살난 상황에서도 끝까지 절개를 부르짖은 만큼 이 부분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보인다.
내치 부분에서 강조는 집권 이후 본인이 선전한 대로 나라를 혼란스럽게 만든 천추태후와 김치양과 그 휘하 일당들을 전부 보내버렸다. 문제는 자신에게 명을 내린 목종마저 폐위 후 시해해버리고 현종을 옹립해 졸지에 권신이라는 낙인이 찍혀버렸다는 것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얼마 안 가 거란의 침입으로 본인과 휘하 세력이 전부 쓸려 나가면서 순식간에 정적들이 사라져버린 현종은 본격적으로 자신의 뜻대로 정치를 펼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건 어찌 보면 매우 단편적인 시각이기도 한 것이, 당장 강조의 고려군이 대패하면서 현종은 왕권 강화고 나발이고 나라 멸망 직전의 사태를 맞이해 수도 개경을 버리고 남쪽의 나주시까지 몽진을 떠나야 했고, 피난 와중에도 사실상 반란군이나 다름없던 지방 호족들에 온갖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나마 현종이 《고려사》 뿐만 아니라 세종대왕과 맞먹을 정도로 한국사에 길이 남을 만한 성군이라 이후 전란을 수습하고 고려의 전성기를 열어젖힌 건 불행 중 다행이다. 덕분에 강조도 의도한 건 아닐 텐데 얼굴마담 현종이 알고 보니 능력자라고 재평가받는 측면도 더러 있다.
다만 아무리 그래도 임금을 시해하고 권신이 된 점이 못마땅했는지 《고려사》의 <반역 열전>에 그 이름을 올렸다. [24] 사실 함부로 정변을 일으켜 임금을 폐위한 것으로도 모자라 시해한 것이 가장 임팩트가 컸지만, 목종에게 멋대로 시호, 묘호, 능호를 올린 것도 큰 문제였을 것이다. 군주의 시호와 묘호, 능호를 정할 때는 먼저 신하들과 논의한 후 現 왕이 최종 결정을 하는데, 강조는 신하들과의 논의와 왕의 재가도 무시한 채 멋대로 올려버렸다. 이렇게 올려진 시호와 묘호, 능호는 후에 현종에 의해 수정된다. 유교를 받아들인 조선에서 삼강오륜을 저버린 강조를 위인으로 대우해 줄 수 없었고, 고려사에서 죽을 때 비로소 목종의 혼령에게 잘못을 빌었다는 식의 서술을 추가했다.
한편으로 현종과 강조의 관계에 있어 짐작해 볼 기사가 있는데, "현종 2년 8월에 강조의 일당들을 유배 보냈다."는 기사가 그것이다. 이때 강조의 일당으로 지목된 5명[25] 중 3명이 정변 당시 강조의 부하였거나 강조의 편에 섰던 이들로, 탁사정은 정변 당시 강조에게 붙었고,[26] 최창과 위종정은 강조의 부하들로서 강조가 쿠데타를 일으키도록 부추긴 인물들이다. 물론 대부분은 잘 나갔지만, 저 5명을 강조의 일당이라고 엮어 부른 것은 정치적인 이유로 숙청했을 것이고, 그 이유는 강조와 관계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당대에 실제로 강조에 대한 평가는 자료의 부족으로 알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강조를 대놓고 반역자로 규정했다면 그 가족들도 연좌제로 처벌을 받았을 텐데 정작 강조의 가족에 대한 기록도 전혀 없어서 이에 대한 내용도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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