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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를 침공한 거란이 처음으로 맞이하는 성에서 이루어지는 전투가 흥화진 전투이다.고려군과 거란군이 강동 6주의 하나이자 요충지인 흥화진(興化鎭, 현 평안북도 의주군)의 지배권을 놓고 여러 차례 맞붙은 전투 중 하나로 고려거란전쟁 시기 중 제2차 고려거란전쟁 때 일어났다.
흥화진 성은 현재 평안북도 의주군 위원면에 위치한 산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성의 경우 삼수채가 휘감고 있어 규모는 작으나 막강한 방어력을 자랑하는 성이다.
1009년에 일어난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삼아 거란의 제6대 성종이 직접 400,000명에 달하는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했다. 침공한 시기가 겨울이라 압록강이 얼어 거란군의 기병들이 빙판 위를 지나 고려의 최전방 요새인 흥화진의 고려군과 대치하게 되었다.
1010년(현종 원년) 음력 11월 16일(양력 12월 24일), 거란의 성종이 압록강을 건너 최전방의 고려군 요새인 흥화진을 포위했다. 서북면 도순검사 형부낭중 양규가 흥화진사 호부낭중 정성, 흥화진부사 장작주부 이수화, 판관 늠희령 장호 등과 더불어 성문을 닫고 3,000명의 병력만으로 굳게 지켰다.
거란의 성종은 통주성 밖에서 벼를 베던 남녀를 사로잡아 각각 비단옷을 하사하고, 종이로 감싼 화살 하나를 준 뒤, 병사 300여 명으로 하여금 흥화진까지 호송하여 항복을 권유했다. 화살을 감싼 종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적혀 있었다.
"짐은 전왕 왕송(목종)이 조정을 섬긴 지 오래되었는데 지금 역신 강조가 임금을 시해하고, 어린 왕(현종)을 세웠기 때문에 친히 정예병을 거느리고 와서 이미 국경에 이르렀다. 너희가 강조를 잡아서 어가 앞으로 보내온다면 곧 군대를 되돌리겠다. 그렇지 않으면 곧장 개경으로 들어가 너희 처자식들을 죽일 것이다."
뒤이어 칙서를 화살에 묶어 성문에 꽂아두었는데, 그 내용은 이랬다.
"흥화진의 성주와 군인 및 백성들에게 명한다. 짐이 생각하건대 전왕 왕송(목종)은 그 조상을 계승하여 복속한 뒤 우리의 번신이 되어 변방을 지켜오던 도중 갑자기 간사하고 흉악한 자(강조)들에게 해를 당했다. 짐은 정예병을 이끌고 와서 죄인들을 토벌하고자 하되, 여타 위협에 굴복하여 가담한 자들은 모두 용서할 것이다. 더욱이 너희는 전왕이 안무해주던 은혜를 받았고, 역대의 반역과 순종이 유래한 바를 알고 있으니, 의당 짐의 뜻을 체득하여 후회를 남기지 말도록 하라."
이수화 등이 거란의 성종에게 표문을 올리며 아뢰었다.
"하늘을 이고 땅을 밟고 서있는 자는 마땅히 간사하고 흉악한 자를 제거해야 하고, 아비를 의지하고 임금을 섬기는 자는 모름지기 절개와 지조를 굳건히 해야 하니, 만약 이러한 이치를 어긴다면 반드시 그 재앙을 받게 될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민(民)의 심정을 굽어 살피시어 밝으신 지략을 거두어주십시오. 천망을 크게 펼쳐두고 어찌 참새와 같은 작은 새들이 먼저 뛰어들기를 바라십니까. 병거에 올라가 통할하시면 비휴와 같은 용맹한 군대의 복종을 얻어내실 수 있을 것입니다."
거란의 성종이 비단옷과 은그릇 등의 물품을 흥화진 안의 고려군 장수들에게 차등있게 하사하고, 칙서를 내려 일렀다.
"표문을 올려 아뢴 바를 모두 살펴봤다. 짐은 다섯 성군을 계승하여 천하에 임어한 이후로 충성스럽고 어진 자에게는 반드시 포상을 했고, 흉악하고 반역하는 자에게는 모름지기 형벌을 시행했다. 강조는 옛 군주(목종)를 시해한 뒤 저 어린 군주(현종)를 끼고서 마음대로 간악한 권세를 부리며 크게 위압과 복덕을 보였다. 따라서 친히 죄인을 토벌하고 특별히 형전의 명분을 바로잡고자 바야흐로 모든 군사를 이끌고 국경 근처까지 이른 것이다. 앞서 특별히 칙서를 반포한 것은 초유하려는 뜻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는데, 문득 올라온 글을 보니 귀부하겠다는 말은 아뢰지 않았다. 진술하고 있는 바는 성심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며, 화려한 문장은 단지 공경하는 듯 보이려는 것뿐이다. 하물며 너희들은 일찍부터 관직에 포열하여 필시 반역과 순종에 대하여 알고 있을 터인데, 어찌 역당에게 계책은 보태면서 전왕(목종)을 위해 설욕할 것은 생각하지 않는가. 의당 안위를 되돌아보면서 재앙과 미리 분별해야 할 것이다."
다음날 이수화가 표문으로 회답했다.
"신들은 지난 날 조서를 받들 때마다 번번이 굳건한 심정을 진술했습니다. 허물을 보고 눈물 흘리는 은혜를 내려주시기 바라고, 그물을 풀어주는 인자함을 간절히 기원합니다. 서리에도 버티고 눈을 감내하면서 백성의 마음을 더욱 편안하게 할 것이며, 뼈가 재로 변하고 몸이 가루가 되더라도 1,000년의 성업을 영원히 받들 것입니다."
거란의 성종은 표문으로 흥화진의 고려군이 항복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흥화진을 내버려두고 통주 등 남쪽 지역으로 내려갔다.
결국 거란의 성종은 흥화진을 버리고 통주에 있었던 강조 휘하의 고려군 주력 300,000명을 상대하기로 했다. 황제는 흥화진을 떠나며 칙서를 보냈다.
"너희는 백성을 안무하며 기다리도록 하라. 200,000명의 병력을 인주 남쪽의 무로대에 주둔시키고, (나머지) 200,000명의 병사들로 통주까지 진격할 것이다."
"신묘 거란주(契丹主)가 직접 보병(步兵)과 기병(騎兵) 40만 명을 거느리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흥화진(興化鎭)을 포위하자, 양규(楊規)·이수화(李守和) 등이 굳게 지키며 항복하지 않았다."
역사학자 이익주에 따르면, 고려사 및 고려사절요에 요 성종과 고려군이 흥화진에서 대치했다는 기록은 있으나, 실제 전투가 벌어졌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다고 결론을 지었다. 이는 생각보다 상당히 중요한데, 해당 전투가 묘사된 드라마와 고려 거란 전쟁 방영 이후 대다수의 블로그와 유튜브, 심지어 다큐멘터리인 평화전쟁 1019에서도 1010년의 흥화진 전투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추측을 해 볼 수 있다. 하나는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서 해당 전투에 대한 기록을 빼먹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실제로 전투가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투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첫 번째 가설은 신빙성이 떨어지는 것이, 고려사 및 고려사절요가 현재 고려거란전쟁의 주요 사건을 알 수 있는 자료이며, 제2차 고려거란전쟁의 원인, 경과 및 각 지역의 전투에 대해 상세하게 다루었기 때문에, 1010년 흥화진에서 실제 양국 간의 전투가 벌어졌다면 고려사 및 고려사절요에서 이 기록을 다루었을 것이다.
여기서 전투가 없었다고 볼 수 있다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은 단지 거란 주가 포위를 했다가 포위를 풀었다는 기록만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당시 큰 전투였던 통주 전투나 곽주 전투의 경우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에서 전투에 대한 경과나 사상자가 양측에서 몇 명이 발생하였는지, 양측의 참전 장수는 누구인지 등에 대해서 명확히 밝히고 있다. 특히 동시대 양규가 퇴각하는 거란군에 큰 피해를 입힌 반격전이나 지채문 등이 서경에서 거란에 맞서 싸운 것에 대해서는 기록이 자세히 남아있다. 또 다른 기록이라 할 수 있는 고려사 양규 열전에도 흥화진을 포위한 채(圍興化鎭: 흥화진을 에워싸다) 서신으로 양측이 대치한 기록은 있지만, 전투가 벌어졌다는 기록은 없다.
당시 전투의 또 다른 주체였던 거란이 기록을 남겼을 수도 있겠지만, 1010년 11월 당시 요사의 기록은 "大軍渡鴨淥江, 康肇拒戰, 敗之, 退保銅州."로, 해석하면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 강조와 싸우다" 이것이 전부이다. 그렇기에 거란군이 흥화진에서 고려군과 싸웠다는 기록은 거란 측의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요사의 경우 해당 항목에도 나와 있지만, 부실한 면이 많아서 부정적인 시선으로 보는 경우가 많지만, 그래도 고려와의 전쟁도 비교적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고 이는 고려사와도 교차검증이 되는 부분이 많아서 여요전쟁을 연구하는 데 있어 엄연히 빼놓을 수 없는 사료다.
결국 기록에 따르면 거란군이 성을 포위한 것은 사실이고, 고려군이 거란 황제의 칙서를 거부해 항복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고려군과 거란군이 흥화진 성을 두고 실제 전투를 벌였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불분명하다. 특히 이후 1014년, 1015년에도 거란군은 흥화진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는데 이때 고려사의 원문을 보면 '포위한 거란군을 쳐서 물리쳤다(擊, 却)'다고 분명히 표기하고 있는 점도 주목할 점이다.
다만 실제로 흥화진에서 교전이 없었다고 해도 양규라는 인물의 평가가 과장되었다거나 깎이는 것은 아니다. 흥화진에서의 전투가 정말 없었다면 양규의 흥화진 부대는 고려군이 통주 전투 등에서 대패한 상황에 이르렀어도 전력을 보존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고, 이것이 양규 부대가 서북방에서 맹활약을 펼칠 수 있던 원동력이 되었으며 거란 입장에서는 흥화진을 본격적으로 공격해 함락하지 않은 것이 결국 2차 여요전쟁에서 거란군의 뼈아픈 실책으로 작용하게 되었음은 변함이 없다.
결국 해당 전투가 실제 존재했는지에 대해서는, 해당 전투에 대한 명확한 기록이 남아 있어야 한다. 물론 다양한 역사적 사료를 교차검증할 필요성이 있겠지만, 현재 해당 기록에 대해서는 오로지 서신만 주고받은 기록밖에 없기 때문에, 여기서 더 나아가서 전투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하는 것을 아직 판단할 수는 없다.
사학계 연구자들의 서적과 논문을 보면 알 수 있듯이 1010년의 해당 사건에 관하여 '흥화진 전투'라는 표현은 분명히 존재하며 인정된다. 애초에 흥화진에서 설령 전투가 없었고 단순히 대치만 있었다면, 요 성종이 친정을 하면서까지 기록상 40만 대군을 이끌고 와서 겨우 3천 명만이 지키고 있어 수적으로 열세인 흥화진 앞에서 7일 동안 포위 '행동'만 하다가 갔다는 일이 설명되지 않는 문제도 있다. 그 전에 포위라는 행동 자체가 공성전이 시작되었음을 뜻할 정도로 공성전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행위이기에 '포위'라는 단어만 있으니까 정말로 포위만 했다고 섣불리 해석해서는 안 된다.
기록상 거란군은 흥화진의 항복을 받아내지 못하자 흥화진 주변에 20만의 병력을 주둔시키고 그대로 놔둔 채 삼수채의 고려군을 격파하였으며, 곧바로 통주성 정도를 제외한 서북면의 거의 모든 성들을 함락시킨 뒤 서경성으로 간 와중에도 흥화진에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았고, 흥화진 주변에 주둔시킨 병력 또한 어느 순간부터 기록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위 주장을 인정한다면 서북면의 대부분의 성들은 큰 무리 없이 금세 함락시켰으면서 왜 이전에 수적으로 열세인 흥화진을 굳이 거점으로 삼기 위해 공격조차 하지 않았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이에 대해 흥화진이 산성이라서 공략이 어렵다고 할 수는 있지만, 따지고 보면 거란군이 함락시킨 곽주성(능한산성)도 산성이다. 게다가 삼수채에 주둔한 고려군을 먼저 격파하기 위해 흥화진을 일부러 놔뒀다면, 승전 직후 보급이나 훗날의 원활한 철군을 위해서라도 최대한 많은 성들이 함락되어야 하거나 거점이 필요한 거란군이 흥화진을 공격하지 않았을 리가 없는데, 이런 일은 어느 기록에도 남아 있지 않다. 거란군이 삼수채에서 이겨놓고 통주성을 지나친 이유도 항복 권유와 함락이 둘 다 실패했기 때문이고, 애초에 항복 권유가 실패하자 통주성을 공격했듯이 흥화진도 방관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함락시키려고 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흥화진성의 이명이 걸망성(契亡城), 즉 거란을 망하게 한 성이다.
결론을 내리자면, 위 역사학자의 주장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견해'일 뿐이며, 역사학계 또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사항이 아니다. '흥화진 전투'가 흔히 미디어에서 연출된 묘사 방식에 대해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을 수 있지만, 최소한의 교전도 없었다고 일축하는 것 또한 무리가 있으며, 설령 전투가 없었더라도 왜 그랬는지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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