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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하라지 수행법(자연요가(Nisarga Yoga)
만약 전기(電氣)와 자동차의 소음이 없다면, 사람들은 지금 여기가 몇 세기인지 알지 못할 것이다. 니사르가닷따 마하라지가 사는 가난한 집이 그렇다.
그의 작은 방 주위에서는 시간의 냄새를 전혀 맡을 수 없고 거기에서 교환되고 있는 이야기의 주제들도 시간을 넘어선 것이다.
또 그 주제들이 해설되고 검토되는 방식 역시 시간의 한계를 벗어나 있다. 수백 년 수백만 년을 한 순간에 왔다갔다하면서, 저 오랜 옛날부터 내려오는 영원히 새로운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서 이루어지는 대담과 가르침은 아마도 천 년 전에도 동일했을 것이며 앞으로 천 년 후에도 여전할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어째서 의식이 있는가에 궁금증을 갖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을 것이고 그 원인과 목적을 탐구할 것이기에 그러하다.
왜 사람으로서의 존재의 원인과
인생의 목적은 누구나 깊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시원한 답을 구하지 못하게 되고 먼서 깨친 선지자를 찾게 된다.
♣ 나는 어디서 왔는가?
♣ 나는 누구인가?
♣ 나는 어디로 가는가?
등등의 질문들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것들이다.
그리고 그런 질문에 대한 답이 없거나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한다면, 삶이란 우리가 알지 못하는 힘들에 의해 부여된 목적을 알지 못하는 꿈에 불과하므로, 시간 속의, 그리고 영원 속의 "나 자신"에 대한 탐구는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니사르가닷따 마하라지는 학식이 많은 분이 아니다. 그의 고향 사투리에는 현학의 냄새가 없다. 어떤 권위나 경전이 인용되는 법도, 언급되는 일도 거의 없다. 놀라우리만치 풍부한 인도의 영적인 유산이 그의 내면 속에 담겨 있는 셈이다.
그의 주변에 큰 사원이 건립된 바도 없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도 대부분 때때로 그와 함께 나누는 한 시간 정도씩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가난하고 소박한 일꾼들이다.
소박함과 단순함이 그의 생활이며 가르침의 요체이다. 그는 내면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결코 높은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다.
그는 그가 말하는 존재의 핵심을 자기 자신에게서 보는 것과 똑같이 다른 사람 속에서도 본다. 또한 그는 자기는 알고 다른 사람들은 아직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 차이는 일시적이며 마음과 끝없이 변하는 마음의 내용물이 중요할 뿐 큰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
시간이 가면 몰랐던 사람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자신의 요가(가르침)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자기는 내세울 것이 아무것도 없고 제시할 체계나 신학, 우주론이나 심리학 혹은 철학 같은 것도 없다고 말하며, 단지 자신과 자신의 말을 듣는 이들의 본래 모습을 알고 있으며 그것을 지적하는 것뿐이라고 한다.
듣는 이가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것은 그 뚜렷한 것을 단순히, 그리고 직접 보지 못하기 때문이며, 그들이 아는 것은 모두 감각에 의해 자극을 마음으로 받아 아는 것인데 그 마음 자체가 하나의 감각임을 사람들은 의심조차 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말한다.
니사르가(Nisarga) 요가 즉, 마하라지의 "자연(Natural)"요가는 놀라우리만치 단순하다.
언제나 무엇인가로 변하기만 하는 마음은
이것 혹은 저것_ _마음(心)
여기와 저기_ _ _ 공간(空間)
그때와 지금_ _ _ 시간(時間)
이라는 분별을 넘어서서 시간과 공간와 마음과 무관한 자신의 정체를 깨달아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 자신의 정체
시간을 벗어난 이 존재는 생명과 의식의 원천이다.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과율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원인 없는 원인이므로 몹시 강력하고, 시작도 끝도 없으며 항존 한다는 의미에서 영원하며 보편적이다.
원인이 없으므로 자유롭고, 보편적이므로 알며(It Knows), 나누어지지 않았으므로 행복하다. 이것은 살아있으며 충만하고 영원한 사랑으로 우주를 꾸며나가고 있다. 누구나가 그것을 지니고 있으며, 아니 바로 말하자면 누구나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알지는 못하므로 자신의 몸에 붙인 이름이나 형상(외모), 혹은 의식(마음)의 내용물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실체에 대한 이러한 이해 부족을 바로 잡는 유일한 방법은
자기 마음의 작용방식을 잘 알아서 마음을 자기 발견의 도구로 바꾸어 버리는 것이다.
원래 마음은 생물학적 생존투쟁 속에서의 도구였다. 자연을 이겨내기 위해 그 법칙 흐름을 익히지 않으면 안 되었고, 마음은 그 일을 해냈고 지금도 하고 있다.
마음과 자연이 서로 손을 잡고 일하면 생명을 더 고차원으로 끌어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상징을 통한 사고와 의사소통의 수단, 즉 언어의 기술을 얻었던 것인데, 그로 하여 말이 실제보다 중요해지고 관념과 추상개념들이 진리인 양 보이게 되면서 개념이 실제를 대신하게 되었고 마침내 사람들은 말로 가득차고 말에 의해 지배되는 언어의 세계 속에 살게 된 것이다.
사물이나 사람들을 다루는 데에 있어서 말이 몹시 유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말은 우리들을 완전히 상징으로 투영된 세계 속에 살도록 함으로써 비현실적으로 만든다.
이러한 언어의 감옥을 깨고 진리의 바다에 들려면 관심의 초점을 말이 아닌 말이 지칭하고 있는 것 쪽으로 옮기지 않으면 안 된다.
가장 흔히 사용되고 또 여러 가지 느낌과 상념을 가장 많이 낳는 낱말은 바로 "나"라는 말이다. 마음은 그 속으로 무엇이든 넣어 버리는 경향이 있어서, 육신이나 절대자도 그 속에 집어넣는다.
그러나 마음은, 직접적이며 대단히 중요한 하나의 체험을 가리키는 역할을 할 뿐이다. 존재하는 것, 있는 것(to be), 그리고 자기 자신이 있음(one is)을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하나의 사물이 관심의 대상이 되려면 모든 욕망과 두려움의 근원인 사람(나)이라는 의식과 관계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모든 욕망의 궁극적인 목적이 이러한 존재를 강화시키는 것이며, 한편 모든 두려움은 자기 소멸이라는 두려움에 기인한다.
그처럼 생생한 "나"라는 느낌 속에 깊이 잠겨서 그 근원을 찾는 것이 자연요가 (Nisarga Yoga)의 핵심이다.
"나"라는 느낌은 연속적이지 않기 때문에(잠) 반드시 그것이 흘러나오고 되돌아 갈 근원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근원이 어디이냐!
시간을 벗어난 그 의식의 근원이 바로 마하라지가 말하는 본래 면목, 즉 스와루빠(Swarupa)인 것이다. 깨달음의 방법론에 관한 마하라지의 가르침은 별로 특별한 것이 없다는 것이 오히려 특징이다.
그는 각자 자기의 길이 있으며 일반적인 방법이나 법칙은 있을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진리의 문이 되는 것은 바로 "내가 있음"의 느낌이다.
우리가 본원적이고 궁극적인 상태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내가 있음"을 파악하고 그 의미를 완전히 맛보고 그것을 넘어 그 근원으로 넘어감으로써이다.
시작과 끝 사이의 차이는 오직 마음 속에 있을 뿐이다.
▶ 마음이 어둡고 시끄러울 때에는 그 근원이 느껴지지 않지만,
▶ 마음이 맑아지고 빛나게 되면 근원이 충실히 반영된다.
근원은 언제나 어둠과 빛, 삶과 죽음, 의식과 무의식을 넘어서 있는 것이다. 그처럼 "내가 있음"의 느낌에 머무르는 것이 가장 단순하고도 쉬우며 자연스런 요가, 즉 니사르가 요가(Nisarga Yoga)이다.
거기엔 무슨
♠ 비밀로 할 것도
♠ 의지할 필요도 없고,
♠ 어떤 사전준비도
♠ 입문식도 따로 필요치 않다.
자기 자신에서 일어나는 의식의 현존에 대한 궁금함이 있고, 참으로 그 근원을 알고자 하는 이는 언제나 존재하는 "내가 있음"의 느낌을 잡고 거기에 열심히 꾸준히 머물러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리하면 마침내 마음을 가리던 구름이 없어지고 존재의 핵심은 밝은 빛을 드러내는 것이다. 인내심을 가지고 열매 맺기를 기다리면, 자연(Nisarga)요가를 통해 무의식적이고 수동적인 데서 의식적이고 적극적으로 된다.
종류의 차이가 있는 게 아니라 오직 방법의 차이, 즉 금덩어리와 금으로 세공한 빛나는 보석과 같은 차이인 것이다. 삶은 예전과 똑같이 지속되지만 그때의 삶은 자연스럽고 의미 있으며 행복하게 된다.
마하라지는 이 책을 통해 그러한 자연스럽고 자연발생적인 상태를 아주 구체적으로 그려내지만 장님으로 태어난 사람이 빛과 색을 알지 못하듯이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그러한 표현의 의미를 감지하기 어렵다.
열정에 휩싸이지 않은 행복이라든가
정감어린 무집착,
무시간성,
원인 없음 등등은
모두가 생소하게 들리고
감응을 일으키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런 말들이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들의 내면에서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갈망, 다가올 일에 대한 예감을 불러 일으킨다.
그러나 그 뿐이다. 마하라지가 말하듯이 말은 방향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이지, 우리들과 함께 가지는 못한다.
▶ 진리(眞理)는 진지한 행동의 열매인 것이며
▶ 말은 단지 방향을 가리킬 뿐이다.
모리스 프리드만(Maurice Fryd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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