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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stradamus_백시선

[Nostradamus]백시선 1권 3편_백색파와 적색파

by 청풍명월7 2023. 10.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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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시선(centuries) 1권(券) 3편(篇) 사행시(四行詩)


[프랑스어]
Quand la lictiere du tourbillon versee
Et seront faces de leurs manteaux couuerts,
La republique par gens nouueaux vexee,
Lors blancs & rouges iugeront à l'enuers.


[영어]
When the litters are overturned by the whirlwind
and faces are covered by cloaks,
the new republic will be troubled by its people.
At this time the reds and the whites will rule wrongly.


[한국어]
가마들이 소용돌이로 뒤집혀지리라.
그때 그들은 망토로 얼굴을 가리리라.
새 공화국은 국민들에 의해 혼란에 빠지리라.
그때 백색파적색파는 잘못 통치하리라 (백시선 1부 3편)

1789년 프랑스 혁명당시의 프랑스 상황


노스트라다무스(Nostradamus, 1503~1566년)의 백시선 1권 3편의 사행시는 프랑스의 정치상황을 예언한 것으로 보인다. 노스트라다무스가 생존했던 당시에는 발루아 왕조 시대 였다. 그러나 카톨릭(구교)신교(기독교)의 종교전쟁을 통하여 왕조가 교체된다.

노스트라다무스 생존시에 앙리2세가 통치하는 발루아 왕조시대였다.


노스트라다무스가 사망한 1566년 이후의 프랑스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이
프랑스 대혁명(1789년)이다.

왕비들이 타던 프랑스 가마

 

가마는 왕권국가에서 왕족들이 타던 이동수단이었다.
그런데 소용돌이(프랑스 대혁명)로 가마가 뒤집어 지게 된다고 예언 하였다.
즉 프랑스 대혁명으로 왕정이 무너지는 것을 말한다.

루이14세의 초상화_긴 망토로 만들어진 옷


그때 그들은 망토로 얼굴을 가리게 되리라.
가마을 타던 왕족들을 망토로 옷을 해 입었는데, 혁명군에 발견되면 죽을수 밖에 없어서
얼굴을 가리게 되는 것, 즉 도피하게 되는 것을 예언하였다.

프랑스 대혁명 결과 왕정이 폐지되고 국민 투표로 공화정(제1 공화정)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공화정은 다시 혼란에 빠지게 된다.
공포정치를 하였던 적색파백색파의 잘못된 정치로 다시 혼란하게 된다.

프랑스 대혁명(1789년)_8월 26일 프랑스 인권선언 선포
프랑스 제1공화국(1792.9~1804.5)-백색파와 적색파의 통치
            . 국민공회(1792~1795년)_루이16세 처형(1792년)
            . 총재정부(1795~1799년)
            . 통령정부(1799~1804년)_나폴레옹 출현

최초의 카톨릭 국가인 프랑스는 왕권과 교권이 연합하여 국민들의 정신(精神)과 생활전반을 지도했다. 하지만 왕권과 교권은 수시로 충돌했고, 더구나 프랑스 대혁명 때는 왕권과 교권 모두 타도 대상이었다. 좌파에 해당하는 혁명 주동자들이 신부들을 처형함으로써 교회는 정치적 우파와 동일시되었고, 프랑스 전역은 민주주의와 공화국 이념을 심고자 하는 '적색파'(자코뱅 당)와 전통적인 정치와 가치를 보존코자 하는 사제 중심의 '백색파' (지롱드 당)로 나누어졌다.

프랑스 대혁명과 인권 선언

17세기 후반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재정 전문가 콜베르를 기용하여 강력한 중상주의 정책을 펼쳤다. 이에 따라 국가의 부를 늘리려고 상업을 중심으로 한 경제 정책을 실시했다. 그 결과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강한 국가로 올라섰고, 루이 14세는 절대 군주(나라의 모든 권력을 쥐고 자신의 뜻에 따라 나라를 운영하는 힘을 가진 국왕)로서 최대 전성기를 맞았다.

발루아 왕조를 이어서 부르봉 왕조가 등장한다. 부르봉 왕조의 계보이다.


하지만 18세기 초 베르사유 궁전 건축과 팔츠 전쟁이나 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과 같은 여러 전쟁에 참여하여 국가 재정을 바닥냈다. 또 루이 15세 때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7년 전쟁에 참가하여 엄청난 재정만 낭비한 채 성과도 없이 물러나고 말았다. 이어 ‘제2차 백 년 전쟁’이라 불리는 영국과의 식민지 쟁탈을 위한 오랜 전쟁에서도 밀려 재정 상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루이 16세가 즉위하였을 때는 이미 국가 재정은 위험 수위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런데도 미국 독립 전쟁에 참전함으로써 왕실 재정은 거의 파탄 상태에 빠졌다. 루이 16세는 이를 개선하기 위해 제3 신분인 평민들만 냈던 세금을 제1 신분(성직자)과 제2 신분(귀족)에게도 거두려는 재정 개혁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왕비와 귀족들의 반대로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루이 16세는 재정 문제 해결을 위한 마지막 선택으로 1614년 이후 한 번도 열리지 않은 삼부회를 소집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때 소집한 삼부회는 프랑스 혁명의 불씨가 되고 말았다.

그 당시 제1 신분과 제2 신분 대표는 각각 300명이고, 제3 신분 대표는 약 600명으로 숫자에서는 두 배였다. 그렇지만 표결 방식이 각 신분별 투표였기 때문에 관례대로 투표를 진행한다면 2:1로 제3 신분이 질 것이 분명하였다. 이에 제3 신분 대표자들은 신분별 표결 방식을 반대하면서 국민 의회를 결성했다. 그리고 프랑스 헌법을 제정할 때까지 해산하지 않겠다면서 베르사유 궁전의 테니스 코트에 모여 시위를 하였다(테니스 코트의 서약). 그들의 주장에 하급 성직자와 일부 귀족이 합류하면서 드디어 국민 의회를 인정하고 헌법 제정에 나섰다.

소집된 삼부회에서 결성된 국민의회


그러자 루이 16세는 군대를 동원해 의회 활동을 위협하려 했다. 이를 본 파리 시민들은 폭동을 일으켜 1789년 7월 14일에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였다. 이 사건이 바로 프랑스 대혁명(1789년)의 도화선이었다.

바스티유 감옥 습격 소식은 곧 전국으로 퍼졌고, 무거운 세금과 부역으로 고통받고 있던 농민들은 영주의 저택을 습격하여 성을 약탈하고 봉건적 의무가 기록된 문서들을 불태웠다. 농촌이 대혼란에 빠지자 국민 의회에서는 봉건제 폐지를 제의했고, 성직자·귀족들이 그 제의에 찬성하면서 새 헌법의 기본 원칙을 만들어 그 결과를 공포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프랑스 의회가 결의하여 1789년 8월 26일에 발표한 ‘인권 선언’ 이다.

프랑스 인권선언문

제1조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또한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
제2조 모든 정치적 결합의 목적은 사람의 천부적 권리를 유지함에 있다.
제3조 모든 주권의 원천은 본래 국민에게 있다.

1789년 8월 26일 선포된 것으로 원래의 제목은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이다. 프랑스 혁명의 상징이며 근대시민사회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문서이다.

 

그러나 헌법 제정 과정에서 루이 16세가 다시 의회를 제지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그 뒤 1791년에 입헌 군주제를 채택하는 새 헌법을 제정하고 각종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후 프랑스는 부유한 상공업자와 부농 출신에 기반을 둔 지롱드 당이 주도권을 장악하여 입법 의회 시대를 열었다. 그렇지만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 참전하여 전세가 불리하게 되었다. 그러자 파리 시민들은 다시 폭동을 일으켜 왕의 퇴위와 보통 선거 실시를 주장하였다. 그 결과 왕정이 폐지되고 국민 투표로 공화정(제1 공화정)이 시작되었다.

그 당시 프랑스 시민들에게 낡고 모순된 구제도(앙시앵 레짐)는 시정하고, 개혁해야 한다는 비판 의식을 심어 준 것이 있었다. 바로 18세기 중엽 유럽을 지배했던 계몽주의 사상이었다. 특히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자유롭다는 로크의 주장은 시민 계층인 부르주아들이 사회 개혁을 요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거기에 바다 건너 미국이 독립 혁명에 성공하게 되자, 이에 자극을 받아 봉건적인 요소와 전제 정치를 타파하고 자유와 평등이 존중되는 사회 건설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정이 수립되었지만, 집권 세력인 공화파지롱드 당(부르주아 기반, 백색파)과 자코뱅 당(소시민층과 소생산자층 기반, 적색파)으로 분열되었다. 새로 정권을 장악하게 된 자코뱅 당로베스 피에르는 혁명 정부를 수립하고, 국외로 탈출하려다 실패한 루이 16세를 1793년에 단두대에서 처형하였다. 뿐만 아니라 1만 5천 명에 이르는 반혁명 용의자들을 처형하는 등 공포 정치를 펼쳤다. 이때 도시 빈민층이나 하층 시민인 상퀼로트(‘반바지(퀼로트)를 입지 않은 사람’이라는 뜻)들이 프랑스 혁명에 적극 참여하여, 반대파를 잡아들이고 숙청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이 시기를 ‘상퀼로트 시대’라고도 한다.

루이16세가 붙잡혀 사형당하게 된다.


그 무렵 주변 국가들은 루이 16세가 처형되는 것을 보고, 프랑스 혁명의 여파가 자기 나라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1793년 제1차 대불 동맹(영국 수상 피트의 주창으로 영국오스트리아프로이센네덜란드가 맺은 동맹)을 맺고 프랑스에 선전 포고를 하였다.

루이16세 단두대 처형장면


프랑스에서는 로베스 피에르의 독재 정치에 치를 떨던 시민들과 숨어 있던 부르주아지들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테르미도르의 반동’(프랑스 혁명력에서 ‘열의 달’ 을 뜻하는 말로 1794년 7월을 가리킴)을 일으켰다. 그 결과 로베스 피에르를 처형하고 공포 정치를 마감하면서 5인의 총재로 구성된 총재 정부가 들어섰다. 

5인으로 구성된 총재정부


그 뒤 해외로 망명했던 왕당파들이 영국 정부의 지원을 얻어 군대를 이끌고 들어와 ‘방데미에르 13일의 폭동’(프랑스 혁명력의 ‘포도의 달’ 13일. 1795년 10월 5일을 가리킴)을 일으켰다. 이때 왕당파의 반란을 진압한 핵심 인물이 바로 나폴레옹이다.

나폴레옹은 총재 정부로부터 사령관으로 기용되어 이탈리아를 평정하고, 오스트리아 빈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나아가 이탈리아 북부와 벨기에를 프랑스 영토로 병합시켰다. 그 결과 제1차 대불동맹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러나 영국군이 전쟁을 마무리할 생각이 없자, 프랑스 정부에서는 지중해를 장악하여 영국의 인도 항로에 타격을 주기 위해 나폴레옹을 이집트로 보냈다.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 군대가 전투마다 계속 승리를 하는 동안 영국은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를 끌어들여 제2차 대불 동맹을 맺고 프랑스 국경까지 쳐들어왔다.

그 무렵 프랑스는 무능력하고 부패한 총재 정부 때문에 정치적·경제적 혼란이 더욱 심각해졌다. 이것을 알게 된 나폴레옹은 1799년 몰래 프랑스로 들어와 총재 정부를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것이 바로 나폴레옹을 프랑스 역사에 공식적으로 등장시킨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브뤼메르는 혁명력에서 ‘안개의 달’로 11월을 가리킴. 1799년 11월 9일)이다.

나폴레옹은 3인의 통령 정부를 수립한 뒤, 임기 10년의 제1통령에 취임하였다. 그러다가 1804년 12월 2일 국민 투표를 실시하여 99.8%가 넘는 엄청난 지지를 받아 프랑스 역사상 최초의 황제, 나폴레옹 1세가 되었다.

통령정부


노스트라다무스는 조국
프랑스가 왕정시대가 끝나고
프랑스 대혁명으로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것을
미리 보고 그 글을 예언시로 남겨 두었다.
그의 예언처럼 왕정은 무너지고 왕족들은 처형되고 공화정이 세워졌지만
결국 백색파와 적색파는 잘못된 정치로 무너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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