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시선(centuries) 1권(券) 4편(篇) 사행시(四行詩)
[프랑스어]
Par l'vniuers sera fait vn Monarque,
Qu'en paix & vie ne sera longuement,
Lors se perdra la piscature barque,
Sera regie en plus grand detriment.
[영어]
In the world there will be made a king
who will have little peace and a short life.
At this time the ship of the Papacy will be lost,
governed to its greatest detriment.
[한국어]
세계에 짧은 평화를 만들어 주고
짧은 수명을 가진 왕이 있을 것이니라.
그 시대에 교황의 배(교회)를 잃게 되고
가장 큰 손실이 있으리라.(백시선 1권 4편)
백시선(百詩選, 제세기諸世期, Centuries)는 주로 서양사(西洋史)를 잘 공부해야만 겨우 추측할 수 있는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다. 기승전결의 이야기에 딱 맞는 역사를 찾아야만 그 이야기가 힘이 실린다. 교황이 교회의 통제권을 잃게 되는 사건은 바로 카톨릭(구교)에 반발하여 생긴 신교(기독교)의 출현이다. 이는 근대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중세를 벗어나는 대 사건이다. 각 나라의 정신(精神)을 지배하는 종교의 변혁이었기 때문이다.
신교의 출현으로 카톨릭은 큰 위기에 빠지게 된다.
개신교(신교)는 단일한 교파가 아니며, 각각의 교파 간에도 세부적인 교리의 스펙트럼이 상당히 넓다. 종교 개혁이 일어났던 16세기부터 현재까지 매우 다양한 교파가 탄생하였는데, 어느 교파부터 어느 교파까지를 개신교로 간주할 것인가에 관한 명확하고 통일된 기준은 없지만, 일반적으로 천주교(카톨릭), 정교회와 분리되어 있는 복음주의적 교파들을 개신교로 분류하고 있다.
서교(西敎)의 주요 종교와 교파
▶ 유대교
▷ 그리스도교_카톨릭
▷ 그리스도교_정교회
▷ 그리스도교_개신교
▶ 이슬람교_시아파
▶ 이슬람교_수니파
16세기 유럽에서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와 장 칼뱅(Jehan Cauvin)이 당시 카톨릭 성직자들의 타락을 비판하면서 종교개혁이 시작되었다는 인식이 일반적이지만, 기독교가 로마 제국에 의해 국교화된 4세기 이래 지배층들이 교계로 편입되면서부터 이러한 비판은 꾸준히 존재해 왔다. 천여년 간 가운데 르네상스 시기만이 특별히 교회의 타락상이 심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종교개혁자들은 중세의 신학이 교회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고 보았으며, 면벌부나 사제, 수도원, 신자들의 타락상 같은 것은 그 부작용에 불과했다.
그리하여 초기 교회의 순수했던 신학을 되찾기 위해 성경을 연구했고 이러한 움직임이 점점 커지면서 개신교회가 탄생했다. 한편 잉글랜드 왕국에서는 당시 왕이었던 헨리 8세가 적법한 남자 후계자를 낳기 위한 재혼을 위해서 잉글랜드 성공회(잉글랜드 국교회)를 만들기도 했다.
종교개혁의 기원은 발도파(Waldenses, 12세기 프랑스에서 발생한 그리스도교 운동의 구성원들)까지 기원이 올라가기도 하는데, 주요한 교리에서 지금의 개신교들은 인정하지 않는 것이 많아서 개신교 내부에서도 위의 세력을 '종교 개혁의 불씨'라고 하지 '종교 개혁의 시작'이라고 하지 않는다. 마르틴 루터 이전 성서중심 신앙을 강조한 영국의 존 위클리프와 얀 후스 또한 종교개혁의 선구자 취급을 받기도 한다.
개신교에서는 대체로 16세기 이후 카톨릭에서 갈라져 나왔으며 교황의 수위권을 부정하며 제2경전을 정경으로 인정하지 않는 종파들을 통칭해서 개신교라고 부른다. 또한 개신교에서 갈라져 나온 종파들도 역시 개신교라고 불린다.
그러나 기원 자체가 서방교회에서 떨어져 나온 기독교 종파들의 집합으로 여겼기 때문에 현재에도 어디까지가 개신교 종파인가?"라는 합의된 정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루터파, 칼뱅파(츠빙글리), 재세례파, 잉글랜드 국교회 같이 현재는 아무런 문제 없이 개신교로 함께 구분되는 종파들 모두가, 16세기 종교개혁 당시에는 서로를 같은 믿음의 형제·자매로 여기지 않았고, (물론 카톨릭을 대하는 정도 만큼은 아니지만) 서로 반목했다.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믿음을 가진 기독교인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당시 이들의 표면적인 공통점이라면 로마 교회에서 이단 선고를 받았다는 점 정도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들 전체를 겨냥한 종교재판, 마녀사냥,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 30년 전쟁 등을 겪으면서 루터파, 칼뱅파, 잉글랜드 국교회(잉글랜드 성공회)는 비로소 로마교회에 대항하는 공동의 신앙을 가졌다고 여기게 되어, 카톨릭에 대항한 일종의 연합전선을 형성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개신교의 정체성은 16세기경 종교개혁자들이 로마 교회의 미신적 악습이라 보는 요소들을 극복하고, 성경에 충실한 '바른 교회'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에서 생겨났다고 볼 수 있다. 현대에도 개신교는 '오직 성경'을 가장 중요한 핵심으로 삼으며 이는 교회조직의 전통과 성경을 동등한 위치에 놓는 카톨릭·정교회와의 큰 차이점이다.
세계에 짧은 평화를 만들어 주고 짧은 수명을 가진 왕이 있을 것이니,
그 시대에 교황의 배(교회)는 잃게 되고 가장 큰 손실을 있으리라.(백시선 1권 4편)
대표적인 개신교는 루터파, 칼뱅파, 잉글랜드 국교회 등이다. 그런데 이 파 중에서 나라를 이루는 왕으로부터의 교황에 반기를 든 곳은 잉글랜드(성공회) 국교회이다.
잉글랜드 왕국에서는 당시 왕이었던 헨리 8세가 적법한 남자 후계자를 낳기 위한 재혼을 위해서 잉글랜드 성공회(잉글랜드 국교회)를 만들기도 했다. 이로서 영국내 카톨릭계와 국교회간의 큰 분쟁이 시작되었다.
ㅇ 헨리 8세 (재위 1509 ~1547년) 영국의 종교(성공회) 개혁을 이끌어 강력한 왕권 강화
ㅇ 에드워드 6세(재위 1547~1553년, 짧은 6년 재위), 헨리 8세의 아들_성공회
ㅇ 메리 1세(Mary I)(재위 1553~1558년, 짧은 5년 재위), 헨리 8세의 딸_카톨릭
ㅇ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 I)(재위 1558년~1603년), 헨리 8세의 딸_성공회
이 시대에 카톡릭의 교황으로 부터 독립을 하게 된다. 결국 카톡릭은 많은 교회를 잃고 카톨릭 역사상 가장 큰 손실을 보게 된다. 교구와 교회의 재산권을 잃고 그 교회의 추기경을 임명할 권한을 잃어버리게 된다.
역사상 가장 큰 변혁의 사건을 노스트라다무스는 놓치지 않고 예언하고 있다.
헨리8세와 3명의 자녀 후계자 기간 동안 성공회로 독립하였다가, 다시 카톨릭으로 돌아 섰다가, 다시 성공회로 전환되는 시기였다.
에드워드 6세(재위 1547~1553년, 짧은 6년 재위), 헨리 8세의 아들_성공회를 이끌었고, 아버지를 이어 성공회를 정착되도록 구교를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메리 1세(Mary I)(재위 1553~1558년)는 다시 구교로 회귀했지만, 그 후계자인 엘리자베스1세에 이르러 다시 성공회로 돌아섰고 지금까지 성공회로 유지되고 있다.
결론적으로 헨리 8세, 에드워드 6세, 엘리자베스1세 동안 교황은 교회를 잃고 큰 손실을 보게 된 사건이었다. 그 중에서 짧은 수명을 가진 왕은 에드워드 6세이다. 즉 이 때를 간파하고 노스트라다무스는 예언 시를 남기게 된 것이다.
프랑스의 종교전쟁
샤를 8세(1483~98 재위)가 1494년에 시작한 이탈리아 전쟁은 1559년에 카토캉브레지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왕국의 군사적·행정적 구조뿐만 아니라 왕권의 전통적인 역할에까지 변화를 가져왔다.
전쟁으로 국왕은 보다 더 많은 수입원이 필요했는데, 전통적으로 프랑스 국왕은 신하의 동의 없이는 세금을 징수할 수 없었다. 그래서 왕은 관직을 팔기 시작했다. 관직매매는 특히 16세기에 일반화되었으며, 이로써 부유한 부르주아 집안들은 후에 정치적·사회적 지위 향상의 확고한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왕은 또한 귀족작위도 팔았으며, 현금을 받고 작위와 관직 세습을 허용했다.
루터의 저서가 파리에 처음 나타난 것은 1519년이었다. 1521년에 프랑수아 1세(1515~47 재위)는 이 저서의 출판을 금지했으며, 1534년에는 이를 탄압하는 일련의 칙령이 반포되었다.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티즘은 1530년대 중반에 장 칼뱅의 개혁 사상으로 변형되고 강화되었다.
노스트라다무스가 예언한 늙은 사자는 창 시합의 부상으로 사망하게 된다. (1559.07.10)
그 앙리 2세(1547~59 재위)는 보다 더 억압적인 수단을 강구했으나 프랑스의 칼뱅주의, 즉 위그노주의(멸시하는 호칭)는 날로 그 세력이 커지고 반항도 거세어졌다. 샤를 9세(1560~74 재위)의 섭정이었던 카트리느 드 메디시스 왕비는 종교문제의 타협과 어느 정도의 관용을 시도했으나 로마 카톨릭파의 수령인 기즈 공의 강력한 반발을 샀을 뿐이다.
프랑스의 종교전쟁, 즉 위그노 전쟁은 신·구 양쪽의 대립이 주축이지만 귀족간의 세력다툼, 귀족과 왕권과의 대립, 왕위계승문제 등이 엉켜 장기간에 걸쳐 복잡한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또한 영국이 위그노(신교)를, 스페인이 카톨릭(구교)을 지원해 국제분쟁의 양상까지 띠었다.
전쟁이 고조되어가고 있던 1572년 8월 23일부터 24일 새벽에 걸쳐 때마침 위그노(신교) 지도자의 한 사람인 나바라 왕 엔리케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파리에 모여든 위그노(신교)들은 카톨릭(구교)의 습격을 받아 지도자인 콜리니 제독을 비롯해 약 3,000명이 학살되었다.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로 알려진 이 엄청난 유혈극으로 전쟁은 가열되었다. 강경한 카톨릭 동맹(1576 결성)의 지도자 기즈 공이 앙리 3세(1574~83 재위)에 의해 살해되고, 이에 격분한 동맹파가 앙리 3세를 살해하여 나바라 왕 엔리케가 왕위계승자가 되고 후에 왕위에 올라 앙리 4세(1589~1610 재위)가 되었다.
그는 카페 왕가의 방계인 부르봉 왕가의 초대 왕으로서, 또다른 5년간의 내전 끝에 카톨릭으로 개종하고 지위를 굳혔다. 종교전쟁의 최종 단계는 스페인과의 싸움이었는데, 1598년 베르뱅 조약으로 스페인은 앙리 4세를 프랑스 국왕으로 인정하고, 같은 해에 앙리 4세는 낭트 칙령으로 위그노(신교)에게 종교적 관용을 허용함으로써 종교전쟁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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