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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_우크라이나 전쟁

[우크라이나의 선택] 국가의 운명이 달렸다.

by 청풍명월7 2024. 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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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렌스키의 보좌관이었다가 2023년 1월 난파선에서 내린 뒤 지금은 미국으로 망명해 유튜브를 하고 있는 아레스토비치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아레스토비치

아레스토비치는

2023년 1월 드니프로 9층 아파트에 날아들어 사망자 44명을 낸 미사일이 우크라이나 공군이 격추했으나 완파되지 않은 것임을 주장했으나, 우크라이나 공군이 우린 그 종류의 미사일을 요격할 능력이 없다고 반박, 정치적 논쟁으로 확산되려 하자 17일 페이스북 개인 계정에서 사직서를 제출했음을 밝혔다

아레스토비치는 지금 아주 잘나가는 유튜버입니다.구독자가 171만이 넘고 한번 영상을 찍으면 100만 뷰는 쉽게 넘깁니다. 그는 2024년 1월 18일 우크라이나가 EU와 NATO의 동화에 목숨을 걸었다는 제목의 영상을 찍었습니다. 

아레스토비치는 우크라이나가 루저(소어 루저 sore loser는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고 화를 잘 내는 사람을 일컫는 영어 단어로, 한국어로 번역하면 '찌질한 패자' 정도가 된다), 패자에 베팅을 하고 있다면서 키예프는 과거의 실수를 하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는 .우크라이나인들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시점마다 반복적으로 지는 쪽에 서왔다면서 이로 인해 또다시 자기네들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습니다. 아레스토비치는 젤렌스키의 최고 Spin Doctor, 정책홍보 전문가였습니다. 

그러나 젤렌스키 정권이 결국 무너질것임을 감지해 보좌관직을 그만뒀습니다. 그리고 태도를 바꿔 젤렌스키에게 쓴 소리를 해왔습니다. 지금은 미국에서 유튜버 활동을 하고 있는데 당연히 젤렌스키는 그를 잡아넣고 싶어합니다. 아레스토비치는 아주 영악합니다. 그리고 똑똑하기도 합니다. 


그는 소셜미디어 X에 다보스와 모스크바에서 나타난 기류를 보니 아마도 전쟁이 장기화 될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우크라이나가 나토와 EU에 기웃거리는 바람에 러시아와의 전쟁이 불가피했는데 우크라이나의 사정을 고려하지 않는 나토와 EU에 너무나도 의존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야 EU와 나토가 키예프를 조직원으로 받아들이느냐 마느냐의 협상을 시작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우크라이나에 두가지 선택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는 생존을 위한 전쟁을 수행해 삶과 죽음의 문제가 되도록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주제에 맞고 이익에 부합하는 정책 실행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또 나토와 EU의 동화를 위해 지금 우크라이나가 덧없는 전쟁을 계속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지난해 이스탄불 협상을 통해 유리한 위치에서 전쟁을 그만둘 기회가 있었지만 그 것을 발로 차버렸다고 말했습니다. 아레스토비치는 이 대목에서 역사도 인용했습니다. 

 

파벨 스코로파드스키


그는 1918년 독일 제국의 편에서서 우크라이나의 Гетманщинa를 이끌다 동맹국이 연합국에 항복하자 도주했던 기병장교 파벨 스코로파드스키를 한 예로 들었습니다. Гетманщинa란 단어는 제정 러시아 짜르체제와 대비되는 우크라이나 코자크족 Гетман의 체제, 우크라이나어로는 헤트만이라고 읽는데 추장, 족장의 정권이란 의미입니다.

파울로 페트로비치 스코로파즈키(우크라이나어: Павло́ Петро́вич Скоропа́дський, 러시아어: Па́вел Петро́вич Скоропа́дскийй 파벨 페트로비치 스코로파츠키, 독일어: Paul Petrowitsch Skoropadskyj 파울 페트로비치 슈코로파츠키, 1873년 5월 3일 ~ 1945년 4월 26일)는 우크라이나의 카자크 귀족, 군인, 정치인이다.

러시아 제국에서 카자크 기병으로 복무해 중장까지 진급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우크라이나의 보수파 지도자가 되었다. 1918년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헤트만 작위의 부활을 선언하고 자신이 그 작위에 올랐다. 스코로파즈키의 우크라이나국 정권은 독일 제국을 등에 업고 반공주의적인 억압정치를 펼쳤으나총재정부의 봉기가 일어나 8달만에 쫓겨났다. 독일로 망명한 스코로파즈키는 죽을 때까지 우크라이나의 군주정 복고와 자신의 복위를 주장했으며, 후손들도 그 유지를 그대로 따랐다.

이반 마제파

이반 스테파노비치 마제파(우크라이나어: Іван Степанович Мазепа, 폴란드어: Jan Mazepa Kołodyński 얀 마제파 코워딘스키[*], 1639년 3월 30일 ~ 1709년 10월 2일)는 우크라이나의 카자크 지도자이다. 1687년부터 1708년까지 카자크 수장국의 수장을 역임했었다.

생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현재의 우크라이나) 빌라체르크바에서 우크라이나 귀족의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였던 스테판 아담 마제파는 카자크 지도자였으며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일으킨 반란에 가담하기도 했다.

1656년부터 1659년까지 서유럽에서 교육을 받았다. 폴란드의 국왕을 모셨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뒤부터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의 시종으로 일했으며 1659년부터 1663년까지는 외교관으로 근무했다. 1663년 폴란드의 궁정을 떠나 고향으로 귀환했고 1669년부터 1673년까지는 우안 우크라이나의 카자크 지도자였던 페트로 도로셴코가 지휘하고 있던 부대에서 복무했다.

1687년 좌안 우크라이나의 카자크 지도자로 추대되었지만 러시아 차르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대북방 전쟁에서 스웨덴을 지지하기로 결심한다. 일설에 따르면 마제파는 술에 취한 러시아의 차르인 표트르 1세를 모욕한 적이 있었으며 러시아 차르국의 토지를 소유하는 야심을 품고 스웨덴의 국왕이었던 칼 12세를 전쟁에 끌어들이려는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1708년 10월 마제파는 대북방 전쟁에서 3,000명의 카자크 병사들과 함께 스웨덴군과 합류했다. 1709년 6월 마제파가 속한 스웨덴군은 폴타바에서 일어난 폴타바 전투에서 러시아군에 패전하고 만다. 폴타바 전투에서 패전한 마제파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몰도바 벤데르로 도주했고 그 곳에서 사망하게 된다.

독립된 카자크 국가를 세우려는 노력 때문에 보흐단 흐멜니츠키와 함께 우크라이나 제2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조지 바이런, 빅토르 위고, 대니얼 디포 등은 마제파를 소재로 한 문학 작품을 남겼으며 프란츠 리스트는 마제파를 주제로 한 교향시 《마제파》를 작곡했다.


아레스토비치는 또 다른 사례로 뾰트르 대제가 스웨덴을 상대로 벌인 대북방전쟁 당시 스웨덴 편에 서서 싸우다 패해 도주했다가 사망한 코자크 추장 이반 마제파의 예도 들었습니다. 스코로파드스키나 마제파나 모두 우크라이나인으로 외세편에 서서 러시아에 반기를 들었다가 몰락한 사람들입니다. 아레스토비치는 이들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젤렌스키에게 말한 것입니다. 

폴타바 전투에서 패전한 이반 마제파와 칼 12세


특히 이반 마제파란 인물은 제정 러시아 짜르 시기 우크라이나 족장,Гетман이었는데 폴란드와 스웨덴에 충성을 바치면서 러시아를 배반했습니다. 젤렌스키와 하는 짓이 똑같은 역사인물입니다. 그래서인지 젤렌스키는 유서깊은 우크라이나의 키예프 뻬체르스크 라브라 정교회 사원에서 이반 마제파 추도식도 열었습니다. 젤렌스키는 그의 이름을 딴 거리도 만들었고 2020년부터는 10그리브냐 지폐에 그의 초상화를 넣기도 했습니다. 또 그의 이름을 딴 코르벳함을 건조하기도 했습니다. 젤렌스키 정권은 러시아의 뒤통수를 친 역사인물에 미쳤었습니다. 

마제파가 몰락했을 때 불과 3천명만이 그를 따랐고 나머지는 모두 러시아편으로 돌아섰습니다. 지금 젤렌스키가 갈수록 민심을 잃고 있는 우크라이나 상황과 똑 같습니다. 아레스토비치는 역사가 다시 반복되고 있다면서 젤렌스키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가 말한 우크라이나 역사는 아주 정확합니다. 아레스토비치는 우크라이나 사태가 글로벌 사우스와 컬렉티브 웨스트간 충돌로 확대될것이라는 점도 예측했습니다. 

아레스토비치의 말은 한국인도 새겨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국제 분쟁에서 지는 쪽에 베팅을 해서는 안된다는 점입니다. 별 연고도 없는 우크라이나 편을 들면서 잘 지내오던 러시아에 대고 멸공을 외치며 적대시하는 코미디는 있어서는 안됐습니다. 아직도 우크라이나가 이겼으면 좋겠다는 사람들은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지금 우크라이나는 물론이고 집단 서방도 지리멸렬입니다. 그 반대로 러시아는 더욱 강대해 지고 있습니다. 승부는 이미 결정난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아직도 몽유병을 앓는 사람들이 한국에는 적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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