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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있음(I am)>에 대한 질의 응답(괄호는 이해를 돕기 위한 해설_청풍명월7_10페이지를 읽는 것보다 1페이지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알아야 진리에 가까워 진다.)
질문1: 날마다 겪는 일이지만,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전 세계가 갑자기 나타납니다. 이 세계는 어디서 나타납니까? (누구나 잠에서 깨어나면 의식이 돌아온다.)
답변1(마하라지): 뭔가가 나타나려면 모습을 나타내게 하는 누군가가 있어야 해. 나타나고 스러지는 모든 것은 변화 없는 배경을 전제로 삼는 거야. (의식을 알아차릴 존재가 있어야 하며_ 나( I am), 내 의식이 나타나고, 잠이나 삼매 등 으로 사라지려면 그 근본(변화 없는 배경_본심本心)이 있어야 한다.)
질문2: 일어나기 전에 저는 무의식(unconscious)이었습니다.(잠이 들면 의식은 사라지고 의식이 없는 무의식, 즉 본래 자리인 본심(本心)으로 돌아간다. 바다의 파도가 전혀 없는 잔잔한 상태처럼 의식의 움직임이 없는 상태)
답변2(마하라지): 그것은 어떤 뜻인가? 잊어 버렸다? 아무런 체험이 없었다? 무의식일 때에도 경험은 있잖은가? 앎이 없이 존재할 수 있어? 기억이 없다고 존재가 없어지나? (좀 어려운 답변이나 무의식 상태여도 잊어버리거나, 체험이 사라지거나, 경험이 사라지거나, 앎이 없어지거나, 기억이 없어지거나, 존재_육신_가 사라지거나 그렇치는 않다는 것이다. 즉 무의식이어도 의식이 돌아오면 기억하고, 체험이 있고, 경험이 있고, 앎이 있고, 기억이 난다는 것이다.)
그럼 지금 질문한 사람은 자신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실제 경험으로 타당하게 말할 수 있어? 마음이 없었다고도 할 수 없어. 잠잘 때 누가 이름을 부르면 깨지 않아? (존재하지 않았다를 경험으로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경험하려면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마음(의식)이 없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부르면 의식이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잠에서 깨고 나면<내가 있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나타나지 않아? 의식의 씨앗은 잘 때나 기절했을 때도 존재하는 거라구. 그리고 잠에서 깨면 경험이 시작 되지. "내가 있다, 육체가, 세계 속에" 생각이 이런 순서대로 나는 듯해도 실은 모두 동시에 발생하는 거야. (잠에서 깨어나면 의식이 돌아온다. 돌아오지 않으면 죽은거다. 잘때나 기절했을 때도 의식은 존재하는 거다. 깨면 의식이 돌아오고, 인식이 살아나고, 경험이 시작된다)
이 세계 속에서 자신이 하나의 육체를 지니고 있다는 단일한 아이디어지. 누군가가 없으면 <내가 있다>는 감각이 있겠어? (즉 내가 존재하기에 내가 있다는 의식이 살아나는 거다.)
질문3: 저는 언제나 기억과 습관을 지닌 누군가입니다. 다른 '나 임'은 알지 못합니다.(겉으로 들어나는 평상심(平常心)은 스스로 알 수 있으나 변화없는 배경인 본심(本心)은 알지 못하다는 질문이다.)
답변3(마하라지): 뭔가가 알지 못하게 가로막는 거겠지. 다른 사람들이 아는 것을 자기 자신은 모를 때, 그때 자넨 어떻게 하나? (본심을 알지 못하는 것은 뭔가 가로막는 것이 있다는 이야기 이며, 그 것을 제거하면 당신도 그 본심(本心)을 만날 수 있다는 말이다. 다른 사람들은 알고 나는 모르면 물어보고 배워야 한다는 말씀이다.)
질문4: 그 사람들의 지도로 그들이 어떻게 알았는지 배워서 그걸 찾아봅니다.(즉 아는 사람에게 여쭈어 보아 배운다는 말이다. 그래서 스승이 필요한 것이다.)
답변4(마하라지): 본인이 단순히 하나의 육신인지, 아니면 다른 그 무엇인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지 등을 아는 게 자네에겐 중요치 않지? 지금 본인의 문제가 모두 육체에 관한 문제임을 모르겠어? 먹을 것, 입을 것, 옷, 가족, 친구, 이름, 명성, 안정, 생존 이런 것들은 사람이 단순히 육신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모두 무의미해지는 것이야. (사람의 주인은 마음이다. 마음의 바탕인 영혼이 떠난다면 육신은 죽어 썩게 될 것이다. 일단 이것부터 명확하게 깨달아야 한다. 몸이 주인이 아니라. 마음이 주인이다.
_ "心也者 一身之主(심야자 일신지주)" 즉 마음이라는 것은 몸의 주인이다.)
늘 함께 다니는 정다운 새 두마리가 같은 나무가지에 앉아 있다.
그 가운데 한 마리는 열매를 따먹느라고 정신이 없다.
하지만 다른 한 마리는 아무 집착이 없이 열매를 탐닉하고 있는 새는 에고(평상심)이고
그것을 초연하게 바라보고 있는 새는 참나(본심)이다.
그 둘이 함께 앉아 있는 나무는 육체이고 열매를 탐닉하는 새가 따먹고 있는 열매는 행위이다.
-우파니사드-
질문5: 제가 육신이 아님을 알면 뭐가 좋습니까?(즉 몸의 주인이 마음이다 라는 것을 알면 어떤점이 좋은가요.)
답변5(마하라지): 육신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조차 꼭 맞는 말은 아니야. 어떻게 보면 사람이란 모든 몸들, 모든 가슴들, 모든 마음들, 그 밖의 무엇들 그 모두이지. <내가 있다>는 느낌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알 수 있어.
물건을 어디 뒀는지 모를 때에 우리는 기억날 때까지 계속 생각해보지 않나? 자신을 모르면 자신을 찾아 봐. 우리에게 <내가 있음>의 느낌이 처음 떠올라. 그 느낌이 어디서 오는지 자문해보든가 그냥 조용히 지켜 봐.
우리들의 마음이 <내가 있음> 속에 고요히 머무르면 말로 표현될 수는 없으나 체험될 수는 있는 상태로 들어가게 되지. 자꾸자꾸 해봐야 해. 결국 <내가 있음>의 감각이 언제나 본인과 함께하게 되고, 거기에 온갖 것을 덧붙인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일 뿐이었던 거야.
육신이라든가 느낌, 사고, 생각들, 소유물 등등의 모든 자기동일 현상들이 오해를 일으키는 것들이지. 그것 때문에 자신이 아닌 것을 자신으로 여기게 되니까.
(그냥 조용히 지켜본다는 것, 그것이 수행이다. 요가는 최초의 스승은 신이였다 할정도로 오랜역사를 가지고 있다.우파니샤드에는 스승에서 스승으로 거슬러 올라가 결국 비쉬누신의 화신 라마로 부터 전수 받았다고 했다. 역사적으로는 5000년전 인도의 모헨조다로 왕조의 히답파유적지에서 명상자세를 한 조각이 발견되었고 문자로 기록된것은 4000년전 신을 찬미하는 노래와 재사의식을 기록한 베다경전이다. 이기록에는 일종의 환각제인 버섯즙을 마시고 단식과 묵언, 체위(아사나), 호흡법(프라나야마) 를 행했는데 이것이 요가행법으로 변한것이라고 했다. 그후 힌두교경전인 우파니사드에도 요가에 관한 기록이 있으며 3000년전에 바라타종족의 전쟁을 기록한 대서사시 마하바라타 제6권 바가바드기타에도 요가의 종류와 행법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 되어있다. 요가는 종교적 태두리를 벗어나 일반적 실천수행방법으로 보편화 됨에 따라 제사위주의 브라만교에서 탈피한 사문이라는 수행집단이 생겨나고 그 집단 중에서 불교 자이나교를 탄생시켰고 이수행법이 전파되어 기독교 이슬람교의 창시자에게 영향을 주어 헌신요가 수행방법으로 행해지기도 했다. 그후 기원전2세기 경에 파탄잘리가 방만하게 흩어져 있는 요가수행법을 체계화 시킨것이 요가수트라이다 . 오늘날 여러 수행단체에서 행하는 요가행법은 여기서 파생되었다고 볼수있다.)
질문6: 그럼 전 뭡니까?
답변6(마하라지): 무엇이 아닌지 알면 돼. 지식이라는 것은 이미 알려진 것들에 대한 지각적 개념적인 용어의 묘사이기 때문에, 알려지지 않은 자기 자신에 관한 지식 같은 것은 있을 수 없어. 왜냐하면 사람의 존재는 부정을 하지 않고는 묘사될 수 없기 때문이야.
"이건 내가 아니고, 저것도 내가 아니고", 뭐 그런 식이지. 이것저것으로 지칭하는 것은 결코 우리 자신일 수가 없어. 우리의 참존재(참나,본심)는 지각으로도, 상상으로도 알 수 없는 그 뭔가이지. 그렇지만 그게 없으면 지각도 상상도 있을 수 없어.
우리는 가슴이 느끼는 것을 보고, 마음이 생각하는 것을 보고, 몸이 움직이는 걸 본단 말야. 지각하는 행위가 사람은 지각되는 대상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지. 자네가 없이 지각과 경험이 있을 수 있겠어? 체험이라는 것은 누군가의 체험일 수밖에 없지 않아?
"이건 내 체험이요" 하고 공표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어야 체험이 있는 거야. 체험하는 사람이 없으면 체험은 없어. 체험에 현실성을 주는 건 바로 체험자라구. 생각해 봐. 자기가 겪을 수 없는 체험이라면 그게 자네한테 무슨 소용이 있겠나?
질문7: 체험자로서의 느낌, "내가 있다"는 느낌, 이것도 체험이 아닙니까?
답변7(마하라지): 맞아. 체험된 건 모두 체험이지. 그리고 모든 체험에는 체험자가 생겨나지. 그리고 기억이 '계속'이라는 환상을 일으킨다구. 그러나 실제로는 개개의 체험마다 각각의 체험자가 있는 거라서 동일성(identity)의 느낌은 모든 체험자와 체험의 관계의 뿌리에 있는 공통요소에 기인하는 거야. 동일성과 계속성(continuity)은 다른거야.
하나하나의 꽃에 각각 다른 자신의 색깔이 있지만 모든 색이 같은 빛에 의해 생긴 것처럼 많은 체험자가 분리되지 않은 그리고 분리될 수 없는 자각 속에서 나타나지. 그 체험자들은 기억 속에서는 따로이지만 본질적으로는 같다 이거야. 이 본질이 바로 뿌리요 기초이며 시간도 없고 공간도 없는 모든 체험의 "가능성"이지.
질문8: 어떻게 하면 거기에 이를 수 있습니까?
답변8(마하라지): 그리로 갈 필요가 없어. 이미 자네가 바로 그거니까. 자네가 기회를 주면 그것이 자네에게 올 거야. 실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집착을 풀어놓아 봐.
그러면 참된 것이 재빨리, 그리고 조용히 나타나면서, 내가 모든 것의 근원이며 핵심인 것이로구나 하는 깨달음이 오게 되어 있어. 이와 더불어, 선택도 선호도 집착도 아니면서 모든 것을 사랑스럽게 만드는 힘인, 큰 사랑이 오게 되는 것이야. (마음에서 성령이 충만해 지며, 도기가 충만해 지며, 큰 사랑이 마음에서 샘솟듯이 올라온다. 그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체험을 해야 느낄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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