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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_우크라이나 전쟁

[우크라이나 사상] 우크라이나 나치군 경력자

by 청풍명월7 2023. 9.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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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도, "캐나다 국회서 나치군 경력 우크라 이민에 기립박수는 유감"
2023.09.26

지난 주 하원의장의 나치경력 노병 초청과 기립박수에 언급
젤렌스키의 의회 연설후 로타 하원의장이 98세 "영웅" 소개

[오타와 캐나다)=AP/뉴시스] 캐나다 의회에서 기립박수를 받은 나치부대 경력의 야로슬라우 훈카(98. 오른쪽) 가 22일 의회안의 방청석에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의 의회 연설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 로타 하원의장은 그를 ' 영웅' 으로 지목하며 기립박수를 선도했고 나중에 사과했다. 2023.09.26.[서울=뉴시스]


(차미례 기자)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는 25일(현지시간) 캐나다국회가 지난 주 제2차 세계대전시 나치 군대에서 우크라이나 독립을 위해 싸운 군인 출신 이민자에게 기립박수를 보낸 '사고'에 대해서 한탄하며 기자들에게 유감을 표했다고 AP 신화통신 등 외신들이 보도했다.

트뤼도 총리는 이 날 캐나다 하원에서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지난 주 22일의 그 일에 대해 "극도로 불편한 사건"이라고 평했다.

"하원의장이 자기 실수를 인정하고 이미 사과를 했다. 하지만 이번 일은 캐나다 국회에게도 정말 창피스러운 일이고 나아가 모든 캐나다 국민에게 영향이 파급된 사건이었다"고 트위도 총리는 말했다.

이 사건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지난 주  2023년 9월 22일 캐나다 하원에서 연설을 마친 뒤 의원들이 98세의 우크라이나계 캐나다 이민인 야로슬라우 훈카(98)를 특별히 영웅으로 예우하며기립박수를 보낸 것을 말한다.

하지만 그로 부터 이틀 뒤에 그가 사실은 러시아에 대항해서 (우크라이나 독립을 위해) 싸운 나치 부대에 속해 있었다는 사실이 세상에 드러나면서 그를 '영웅'으로 칭송했던 의회가 웃음거리가 된 것이다.

당시 앤터니 로타 하원의장은 연설 중에 훈카를 소개하면서 " 러시아에 대항해서 우크라이나 독립을 위해 싸웠던 2차 세계대전의 우크라이나계 캐나다인 영웅"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크라이나의 영웅이자 캐나다의 영웅"이라며 기립 박수를 보냈다.

[오타와=AP/뉴시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왼쪽)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22일 캐나다 오타와 의회에서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와 공동 기자회견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2023.09.26. 진상이 드러난 뒤에 나치부대의 우크라이나 군인 출신을 의회에 초청한 로타 하원의장에게 의장직을 사퇴하라는 전화가 전국에서 빗발치기 시작했다.


로타의장은 이에 25일 국회가 개원하자마자 의원들 앞에서 즉시 사과 성명을 발표했다.

로타는 자신이 젤렌스키 연설이 끝난 뒤에 훈카를 불러내 의원들의 관심을 받게 한 것과 애초에 그를 초청한 것을 모두 개인적인 잘못이라고 인정하고 유감으로 여긴다고 말했다.

"이번 사건은 전적으로 나의 책임이다. 나의 행동과 언사로 많은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게 한 데 대해 깊이 사과드린다. 그러나 나는 캐나다 의회를 창피스럽게 만들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고 그는 말했다.
차미례 기자(cmr@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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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지나간 역사보다는 지금 펼쳐지고 있는 사실에 더 관심이 많다. 그러나 현재 이런 사건들이 펼쳐지는 이유가 지나간 역사의 사건에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위 기사에서 나오는  " 러시아에 대항해서 (우크라이나 독립을 위해) 싸운 나치 부대에 속해 있었다는 사실"
은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며, 이 사건이 오늘날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의 이변에 자리잡고 있는 사건이다. 이는 매우 불행한 일이며 이 일은 역사적 과오이며, 그 민족의 수치인데도, 그것을 모르고 지금도 나치주의자를 추종하는 우크라이나국민들이 많다. 
그 이념을 따르는 자들을 '반데라 분파'라 한다. 그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스테판 안드리요비치 반데라(1909.1.1~1959.10.15)

우크라이나의 인종주의 반유대주의 성향의 국수주의 성향을 가진 극우 민족주의자로, 파시즘 단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단(OUN)의 반데라 분파와 우크라이나 저항군(UPA)의 수령으로서 이 두 단체를 이끌며 제노사이드를 계획하고 주도한 전쟁범죄자이다.

OUN(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단)은 “유태인 절멸”과 같은 우크라이나 혁명의 중요한 임무를 나치와 같은 외세의 손에만 맡겨두지 않았다. 앞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우크라이나 땅에서 유태인을 비롯한 “타자”를 물리적으로 제거하는 일은 전쟁 발발 전부터 돈초프와 같은 민족주의 사상가들이 꿈꾸던 시나리오이자 시급히 해결해야 할 주요 선결과제였기 때문이다. 독소전의 발발을 “영구혁명”의 시작이자 “인종적으로 순수한 우크라이나 독립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민족혁명의 전 단계로 바라보았던 OUN은 소련군이 후퇴하자마자 적극적인 인종청소에 나섰는데, 그 첫 번째 희생자는 물론 유태인으로 독일군 진주와 더불어 음지에서 나타난 OUN은 독일군이 진주하는 곳마다 함께 하며 포고령과 선언문을 통해 유태인 학살을 우크라이나 민중들에게 적극 선동하였다.
“(우크라이나) 노동자들이여. … 여러 분 사이의 적들, 유태인들과 (소련의) 비밀 요원들을 살해하시오!”
“(우크라이나) 인민들이여, (다음의 내용을) 명심하시오. 모스크바와 폴란드, 마자르인, 그리고 유태인들은 모두 당신들의 적들입니다. 그들을 처단하십시오. 명심하시오. 당신들의 지도자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을 영도하는 OUN입니다. 여러분의 (유일) 수령은 스테판 반데라입니다!”
“유태인들이여! 너희들은 스탈린을 꽃으로 환영했다. 이제는 우리가 너희들의 목을 따 히틀러의 발밑에 둘 것이다!”
“우리는 너희들(유태인들)을 끝장내 버릴 것이다. … 우리는 너희(유태인들)의 파멸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할 것이다!”
이렇듯 악의적인 선동의 결과는 자명했다. 소련군 철수 직후 서부 우크라이나 전역은 도처에서 유태인을 대상으로 폭력과 성폭행 그리고 도살이 자행되는 살육의 대향연, “포그롬”의 도가니가 되었으니, 독일군과 함께 리비우시에 도착한 독일 외무성의 한 관리는 당국에 “황색과 청색의 (우크라이나 국기) 배지를 단 다수의 OUN 조직원들이 이미 (즉 독일군 도착 전부터 나타나) 거리에서 목격되며 그들 중 일부는 무장한 상태로 (외곽에서는 여전히 소련군과의 전투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유태인들에 대한 공격행위가 우크라이나인들에 의해 시작되었음”을 상부에 보고했다. <악마와의 계약? 우크라이나의 파시즘 운동, 1929~1945>

UPA(우크라이나 저항군)가 자행한 학살에서 일관되게 발견되는 전대미문의 잔인성은 이러한 정책의 필연적 귀결이었다고 할 수 있다. 비록 UPA은 비무장 민간인을 죽이는 행위“전투” 또는 “군사작전”으로 명명했지만, “UPA식 전투(또는 현대 우크라이나 극우파 집단의 표현을 빌면 ‘독립투쟁’)”의 상당수는 무장한 군인들 사이에서 교전규칙에 따라 벌어지는 실제 전투와는 거리가 멀었고, 그들의 소위 “군사작전”은 저항할 수 없는 어린 아이들과 노인, 부녀자들만을 골라 최대한 잔인한 방식으로, 그리고 피해자나 목격자가 최대한의 고통과 공포를 느낄 수 있도록 살해하는, 일방적 도살로 점철되었던 것이다. 1943년 7월 11일 자믈리치(Zamlichi)의 한 마을에서 UPA 전사들은 고령으로 피난가지 못한 84세의 폴란드인 노파를 “석유를 끼얹은 채 산채로 태워 죽였으며,”올렉산드리브카(Oleksandrivka) 지역의 한 폴란드인 마을에서 습격을 피해 필사적으로 도망친 한 생존자는 “UPA 전사들이 ··· 아기를 안고 있는 엄마로부터 아이를 낚아채서 거꾸로 든 채, 펜스에 [아기의] 머리가 부딪치도록 흔들며 [짓이겨진 아기의 머리에서] 뇌수가 흘러나오게 만드는 장면”을 목격했다. 이 광경에 비명을 지르던 아기의 엄마는 다른 UPA 전사에 의해 “건초 갈퀴로 난자된 채 살해되었고, 아기는 산채로 우물에 던져졌던 것이다.” 1943년 8월 28일 벨림체(Velimche) 마을에서 학살의 생존자들은 귀환 후 UPA 전사들에 의해 “산채로 눈이 뽑히고 머리가 쪼개졌으며 혀가 잘린 채 살해된” 3명의 폴란드인 어린이와 그 부모의 시신을 발견하였다.

1944년 2월 12일 비쉬니베츠(Vishnivets’) 마을의 사례는 UPA의 민간인 학살이 철저한 정치적 계산에 따라 이뤄진 의도적 선택이었음을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인데, 이 마을에서 일어난 UPA의 “군사작전”은 (심지어 나치 당국조차도 손대길 주저했을) 폴란드계 가톨릭 수도원에 대한 공격으로 시작되었다. 비쉬니베츠 마을을 습격한 UPA 전투부대는 UPA의 공격을 피해 도망한 다른 마을의 “폴란드인 피난민”으로 위장한 채 나타나 피난민을 보호하던 현지 가톨릭 수도원에 보호를 요청하였는데, 그 요청을 받아들인 수도자들이 문을 열자마자 정체를 드러낸 이들 UPA 전사들은 수도자들은 물론이고 수도원에 피신해 있던 어린이와 여성 및 노인들까지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노약자 및 부녀자들과 수도자들을 상대로 한 “수도원 전투”에서의 승리 후, 이들 UPA “독립군”들은 또한 인근 마을의 폴란드인 농부들에게 총부리를 돌렸는데, 이들이 퇴각한 후 발견된 희생자 중에는 “[고문 때문에] 이가 모두 뽑히고 팔 다리가 모두 부러지거나 잘렸으며 [배가] 칼에 난자되어 위장이 노출된 채” 시신으로 발견된 5세 유아가 포함되어 있었다.

반데라는 자신의 과격노선에 동의하지 않으면, 우크라이나 독립운동가라도 암살하였는데, 대표적인 사건이 우크라이나 독립전쟁의 영웅으로 민족운동 진영의 온건파 지도자이며, 문화교육운동과 민중계몽운동에 몸담아온 유력 지식인 이반 바비(Іван Бабій, 1893–1934)를 1934년 7월 암살한 사건이다. 또한 우크라이나인과 폴란드인이나 유대인이 결혼하였을 경우에는, 우크라이나 남편에게 폴란드 아내와 자식들을 직접 죽이도록 명령하였다. 자신의 가족을 직접 죽이길 거부할 경우에는 순혈 우크라이나인이라도 학살당했다.

UPA는 또한 폴란드인과 결혼한 우크라이나인들에게도 잔인한 선택을 강요했다. 이들은 폴란드인 아내나 남편을 둔 우크라이나인 모두를 “친폴파”로 낙인찍었으며, “친폴파”로 몰린 이들 우크라이나인들이 생존을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자신의 배우자를 자기 손으로 죽이는 것이었다. 많은 “친폴파”들이 이렇듯 잔인무도한 명령에 따를 리는 만무했으니 명령을 거부한 대가는 물론 참혹했다. 페니키(Pen’ki) 마을의 한 우크라이나인 농부는 민족적 대의를 위해 폴란드인 아내를 죽이라는 UPA의 명령을 거부한 죄로 목숨을 잃어야 했으며, 앞서 언급한 벨림체 마을의 한 우크라이나 남성 역시 폴란드인 여성과 결혼했다는 죄목 하나만으로 처형을 당했다. 또 다른 예로 1943년 9월 소스노베(Sosnove) 마을의 한 우크라이나 남성에게는 자신의 폴란드인 아내와 1살 난 아기를 죽이란 명령을 그가 거부한 죄로 전 가족이 몰살당하는 참극이 벌어졌던 것이다.

1909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의 스타리우흐리니우(Старий Угринів, Staryi Uhryniv)에서 태어났다. 학창 시절 폴란드 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청소년 조직에 영향을 받으면서 자라났고 이후 1929년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Організація Украінських Націоналістів, Organization of Ukrainian Nationalists, OUN)에 가입한 이후 조직 내의 활발한 활동을 통해 두각을 드러내면서 1933년에 조직 내 집행관이 되었다 집행관이 된 이후엔 폴란드 제2공화국의 우크라이나인 탄압과 강제동화 정책에 대해 우크라이나인 계몽 활동, 반우크라이나 정책 항의 시위 등을 주도하다가 1934년 폴란드 당국에 의해 종신형을 선고받고 투옥된다.

OUN은 퇴역군인과 가난한 농민, 폴란드에서 일자리를 찾지 못한 교육받은 우크라이나의 젊은이들이 가담했는데 의회민주제도를 불신하는 대학생과 고등학생들이 지하 OUN 조직의 선봉이 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동족에 대한 테러행위도 서슴지 않았는데, 대표적으로 1934년 폴란드 내무장관 브로니스와프 피에라츠키(Bronisław Pieracki, 1895–1934)를 암살하고, 학생들의 OUN 가입을 금지시켰다는 이유로 존경받는 고등학교 교장 이반 바비를 살해하기도 했다. 골때리는 사실은 이반 바비가 1차 대전 직후 발발한 폴란드-우크라이나 전쟁과 소비에트-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우크라이나군을 지휘한 민족영웅이었다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민족혁명을 통한 파시스트 우크라이나의 건설을 꿈꾸면서도 실제 행동에 있어서는 (물론 상대적인 의미에서) 여전히 신중하고 보수적인 접근을 취한 구세대 지도자들과는 달리, 이들 신세대 청년 파시스트들은 우크라이나 독립 쟁취를 위해 보다 가시적인 무장투쟁과 더욱 빠르고 즉각적인 결과를 원했다. OUN이 공식 출범하던 1929년만 해도 이들 신세대 파시스트의 영향력은 크지 않았지만, OUN의 테러활동이 본격 궤도에 오르며 유럽 전역에 전운(戰雲)이 감돌기 시작한 1930년대 후반부터 상황은 급격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제 완전한 성년(成年)에 다다른 이들 “돈초프 키드”들은 중견 간부의 역할 – 특히 OUN의 중장년층 지도부가 처형이나 수감으로 이탈한 할리치나 현지의 경우는 고위간부의 직위 – 을 맡으며 할리치나 현지 OUN 조직을 급속도로 장악해 나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들 청년 파시스트 세대를 대표하며 학생 운동권 세대의 리더로 떠오른 인물이 바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운동사에서 문제적 아이콘이자 논쟁적 유산으로 남아 있는 스테판 반데라(Stepan Bandera)였다. 우니아트 정교회 소속의 성직자 집안에서 태어나 이미 청소년기부터 SVO에 참여하여 일련의 테러활동에서 두각을 나타낸 반데라는 불과 24세의 나이로 할리치나 현지 OUN 조직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던 인물로, 1930년대 중반 일련의 테러 교사 혐의로 폴란드 당국에 체포되었을 때 공판과정에서 보여준 단호한 저항적 이미지와 카리스마로 할리치나 민중들 사이에 크나큰 대중적 명망을 얻은 신세대 파시스트의 대표주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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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데라가 어린 나이에 OUN의 할리치나 현지 조직의 최고 지도자로 떠오를 수 있었던 것은 동년배 사이에서 독보적이던 그의 카리스마 및 지도력 외에도, 폴란드 당국의 계속된 탄압으로 구세대에 속한 노장층 OUN 지도자들이 계속 체포되어 심각한 지도부 공백상황이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던중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반데라는 감옥에서 풀려나 당시 독일의 점령 아래 있던 크라쿠프로 이동했고, 그 곳에서 조직을 이끌던 안드리 멜니크(Андрій Мельник, 1890–1964)와 재회한다. 하지만 온건한 방식으로 독립운동을 이끌길 원했던 멜니크와 갈등을 빚으면서, 반데라는 자신을 지지하는 조직원을 데리고 우크라이나 혁명 민족주의자 조직(OUNR, 통칭 OUN-B)을 설립한다.

그리고 1941년 나치 독일이 소련 침공을 준비하면서 아프베어(Abwehr)에서 반데라와 접촉했는데, 반데라는 소련 내에서 내부 공작을 벌여서 나치독일을 돕는 조건으로 나치독일이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용인하도록 하는 조약을 나치독일과 맺었고

이윽고 1941년 6월 22일 나치 독일이 바르바로사 작전을 통해 소련을 침공한다

 

1941년 여름 르비우에 걸려있던 플래카드, 플래카드에 쓰인 문구는 '히틀러 만세! 반데라 만세!', '우크라이나 독립국이여 영원하라! 반데라여 영원하라! '로 폴란드의 우크라이나인 탄압과 강압적인 동화정책 그리고 소련(러시아)의 스탈린의 강압적인 농업 집산화 정책으로 인한 대기근으로 수많은 우크라이나인이 기근으로 사망하면서 생긴 폴란드와 소련(러시아)에 대한 깊은 적대감으로 나치 독일을 해방자로 여긴 우크라이나인들이 무엇을 기대한건지 단적으로 드러낸다.

 

독일군을 환영하는 우크라이나인
나치독일을 환영하는 우크라이나인
나치독일을 환영하는 우크라이나 인파
나치독일을 환영하는 우크라이나인
나치독일을 환영하는 우크라이나인


독일 국방군이 우크라이나로 빠르게 진주해 1941년 6월 30일 수도인 키이우를 점령하자 반데라와 휘하의 민족주의자들은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선포하고 국명을 우크라이나 국가정부라고 지었다. 반데라 휘하 민족주의자를 비롯한 많은 우크라이나인들이 나치독일을 해방자로 여겨서 독일 국방군에 협력해서 우크라이나 해방군이 창설되고 그 안에 SS 갈리시아이 있었다. 이 군대의 규모가 대략 80,000명 정도 되었는데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수 많은 폴란드인, 유대인, 러시아인이 인종청소를 목적으로 SS갈리시아에 의해 학살 당했다. SS 갈리시아의 경우 대다수 인원들의 출신이 스테판 반데라가 창설한 OUN이었다. 1929년에 창설된 이 조직은 인종적으로 우크라이나인 밖에 없는 우크라이나 민족 국가를 창설하는 것이 목표였다.

참고로 당시의 우크라이나인 민족 개념에는 유대인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으며, 우크라이나 유대인도 우크라이나인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한 것은 니키타 흐루쇼프 시대부터였다.

스웨덴 출신 홀로코스트 사학자인 페르 안데르스 루들링(Per Anders Rudling)에 따르면 당시 OUN과 그 동조자들은 우크라이나 서부에서 적어도 140건의 포그롬을 일으켜 13,000~35,000명을 학살했다. OUN 민병대는 직접 학살을 저질렀을 뿐만 아니라 나치 독일에 협력하여 유대인을 색출하거나 이송하는데 인력을 지원하여 홀로코스트에 간접적으로 가담했다.

스테판 반데라(Stepan Bandera) 휘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로 구성된 2개의 독일군 소속 우크라이나인 부대, 롤랑드(Roland) 대대와 나이팅게일(Nachtigall) 대대가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독일군의 침공을 안내하는 향도(嚮導) 역할을 담당했다...
나치 독일을 해방자로 보며 히틀러에게 일방적으로 구애했다는 점에서 OUN-B의 친독일 노선은 OUN-M과 동일했지만 구세대 파시스트들과 달리 OUN-B가 원하는 것은 즉각적이고 가시적인 성과였다. 나치 독일 당국과의 일체의 사전 논의 없이 우크라이나 독립 국가의 수립을 선포하고 이를 기정사실로서 독일 측에 통보하고자 했던 (이에 따라 독일 측의 당혹과 반발을 불러온) 1941년 6월 30일의 소위 “우크라이나 민족혁명” 선포나, 나치 치하에서 부역한 소속 조직원들을 중심으로 나치 당국과의 협의 없이 OUN-B가 독자적으로 조직한 “우크라이나 봉기군(UPA)”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OUN-B는 독일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도 필요시에는 독일로부터 자주적인 독자 행보를 걷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집단이었다. 예컨대 UPA가 저지른 2차 세계대전 최악의 전쟁 범죄 중 하나인 독소전 후반의 볼히니아 지역 폴란드인 대학살은 독일 측과는 일체의 사전 조율 없이 OUN-B가 주체적으로, 자주적으로, 독자적으로 그리고 의도적으로 저지른 전쟁범죄 행위였던 것이다.
이러한 각론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나치 독일에 대한 협력에 있어서는 전쟁 초기부터 양 분파 모두가 (특히 전쟁 초기에는) 경쟁적으로 열성과 성의를 보였다. 보다 신속한 행동을 원하던 OUN-B는 즉각적인 가시적 성과를 가져올 것으로 예상된 나치 독일과의 군사적 협력에 보다 적극적이었고, 이러한 OUN-B의 열정과 구애는 1941년 6월 나치 독일의 소련 침공 당시 독일군의 일원으로 바르바로사 작전의 우크라이나 전역(戰域)에서 침공군의 향도 역할을 담당한 우크라이나인 부대, “나이팅게일 대대”와 “롤랑드 대대”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나치에 대한 OUN의 협력은 물론 군사적 기여에 한정되지 않았다. 1941년 가을 우크라이나 전토가 나치 치하에 떨어진 직후 우크라이나 점령지 전역에서는 이후 자행될 홀로코스트에서 나치 점령 당국을 도울 우크라이나인 보조 경찰부대(Schutsmannschaft)가 우크라이나 현지인들의 열정적인 참여와 더불어 조직되기 시작했는데, 초기에는 민병대의 형태로 전적으로 자원에 의해 만들어진 이 부대의 주축을 이뤘던 이들이 과연 누구였을 지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으며, 그 해답은 OUN-B의 지도자로 베를린에 있던 반데라를 대신하여 할리치나 현지의 OUN 조직을 이끌던 야로슬라브 스테치코가 나치 당국에 보낸 다음의 자술서(自述書)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나는 비록 … 모스크바(의 소비에트 정권)을 가장 중요한 결정적인 적으로 간주하지만, 우크라이나를 노예화하도록 모스크바를 돕고 있는 유태인들의 유해하고 적대적인 역할을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나는 (나치가 행하는) 유태인들에 대한 파괴와 … 독일식 학살 방식(즉 총탄에 의한 홀로코스트)의 시급성을 전적으로 지지하는 바이다.”...


나치 독일의 힘을 빌려 우크라이나인 청년을 무장시키고 훈련시켜 우크라이나 독립군을 양성한다는 OUN-B의 착상은 1943년 중반 실제 현실이 되었다. 소련군의 반격이 본격화하여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한 1943년 여름 서우크라이나 지역에는 붉은 군대에 대항하는 대규모 무장세력이 홀연히 등장하여 1950년대 초반까지 (이 무렵에는 이들의 군사적 가치에 주목한 미국과 영국의 지원을 받으며) 반소 게릴라 투쟁을 지속하였는데, 소련과 같은 외세에 저항하는 “우크라이나 민중의 군대”라는 의미에서 스스로를 “우크라이나 봉기군”으로 자처한 이들 무장집단은 나치에 부역하던 (따라서 홀로코스트에 가담했던) 민병대와 보조경찰부대 출신의 OUN 조직원들과 추종자들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진 부대였다. 소련군의 우크라이나 진공이 시작된 1943년 중반 OUN-B 지도부는 나치에 부역하던 휘하 조직원 모두에게 집단 탈영을 명하였고, 이후 우크라이나 지역의 나치 보조경찰부대는 사실상 완전한 해체의 수순을 밟았다. 대다수의 OUN 조직원들은 나치를 위한 복무 당시의 편제와 무장을 유지한 채 중대나 대대 차원으로 탈영하여 삼림지역에서 활동하던 우크라이나 봉기군의 대오에 고스란히 합류하였고, 자신들이 나치에게서 받은 군사적 훈련과 나치 부역을 통해 얻은 전투와 살인의 경험을 우크라이나를 탈환한 소비에트 정권에 맞서 싸우는 무장 게릴라 투쟁(그리고 민간인 학살)에 활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렇게 UPA에 참여한 전 나치 부역자들은 냉전기 서방 진영에서는 공산주의와 투쟁하는 “자유의 전사”로, 현재의 우크라이나 사회 일각에서는 소비에트 러시아의 압제에 대항하여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위해 싸운 영웅적인 “독립투사”로 포장되고 있지만, 이들이 탈영 전까지 나치에 부역하면서 담당했던 주 업무가 무엇이었는지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자행된 유태인 학살이 (폴란드나 독일 본토 또는 발트해 연안 지역처럼) 가스실이라고 하는 자동화된 설비에 의존하지 않은 채 순전히 총살로만 진행되었던 사실을 고려할 때, 이른바 “총탄에 의한 홀로코스트”는 현지 사정에 익숙한 우크라이나인 부역자들의 도움 없이는 성취 불가능한 과업이었고, 우크라이나 보조경찰부대는 독일 당국을 도와 일상적인 치안 활동을 보조하는 동시에 오직 학살과 살인을 목적으로 우크라이나에 파견된 나치의 유태인 도살 전문 특수부대, “아인자츠그루펜”의 명령을 집행하는 손과 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어느 연구자의 표현을 빌면 “총탄에 의한 홀로코스트”는 결코 나치의 단독 범행이 아니라 자원자로 구성된 현지인 부대와의 협력을 통해 수행된 “공동작전(Joint Action)”이기도 하였던 셈이다. 당시 불과 15세의 나이에 나치 보조경찰부대에 입대하여 홀로코스트에 참여한 한 OUN 조직원의 회고에 따르면, “[나치가 원하는] 모든 일을 행하며 … [나치가 원하는 곳은] 어디든 가서 유태인을 사살하던” 친나치 부역자들이 넘쳐나던 곳이 바로 우크라이나 서부 지역으로, 이 지역 출신 OUN 계열 자원자들로 채워진 우크라이나 민병대와 보조경찰부대가 특히 두각을 나타낸 업무는아인자츠그루페조차도 꺼리던 영유아와 청소년 유태인들을 살해하는 임무였다.
예컨대 1941년 9월 6일 우크라이나 북부의 지토미르시 인근 라도미슬(Radomischl) 마을에서 일어난 유태인 학살은 당대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자행된 무수한 학살 중에서도 우크라이나인 협력자들이 담당한 역할을 보여주는 전형적 사례로, 당일 현지에 나타나 1,107명의 현지 유태인을 일시에 총살해 버린 아인자츠그루페 소속 제4A 특수임무단의 임무는 (상기 유태인들의 자녀들로 추정되는) 561명의 아이들을 도살한 우크라이나인 민병대의 협력에 의해 완수되었으며, 다수의 미성년자가 포함된 약 500인의 유태인이 살해된 같은 해 10월 디박읍 학살의 주역 역시 우크라이나인 민병대였다. 단 “이틀” 동안 무려 3만 명이 넘는 유태인을 총살하는 잔인무도한 전대미문의 대기록이 수립된 1941년 9월 바비야르 대학살에서도 OUN 조직원들이 참여하고 지휘하던 우크라이나 민병대와 보조경찰은 학살의 주요 협력자였던 것이다.

허승철 교수에 따르면 나치 독일의 점령 기간 동안 희생된 우크라이나 유대인의 수는 최소 140만명에서 150만명으로 추산된다고 하며, 이런 주된 원인은 나치와 이에 협력한 민족주의 조직 및 우크라이나 주민들의 협조로 인해 일어난 것이라고 한다. 나치의 우크라이나 지역 유대인 대학살의 숫자는 소련이 해체되기 이전까지는 대략 90만 명 정도로 파악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소련 해체 이후 소위 문서고 개방을 통해 소련측 문서들이 발굴되면서 실제 희생자가 90만명보다 더 많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독일의 역사학자 디터 폴(Dieter Pohl)은 1990년대 발굴된 문서를 포함한 자료들을 종합해 대략 120만 명에서 160만 명의 유대인이 SS와 아인자츠그루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그룹 등의 학살로 희생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나치 독일 수뇌부는 우크라이나 독립에는 관심이 없었다. 우크라이나인을 러시아인과 똑같이 열등인종으로 본 나치 독일 수뇌부는 반데라의 일탈 행위들을 용인하지 않았고 우크라이나 독립을 용인한다는 조약을 쌩까고 결국 1941년 9월 15일 반데라와 OUN-B의 주요 간부들을 체포해 부헨발트(Buchenbald) 수용소로 보냈다.

이후 지도부를 잃고 나치 독일에 대한 배반감이 치솟은 OUN-B는 극단주의로 치달아 독일군과 소련군 모두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OUN-B는 1942년 새로운 지도자 미콜라 레베드(Микола Лебедь, 1909–1998)가 이끌게 되었다. 미콜라 레베드는 OUN-B의 테러 전담 별동대인 우크라이나 봉기군(Українська повстанська армія, Ukrainian Insurgent Army(UIA) 혹은 Ukrayins'ka povstans'ka armiya(UPA))을 조직했으며, 봉기군은 나치 협력자를 포함해 우크라이나 극우 국수주의자들로 구성됐다. 이들은 무장투쟁 전개 과정에서 루치크 학살, 볼린 학살[10] 등을 자행하여 5만~12만명에 이르는 폴란드인을 학살하고, 수십만 명을 추방했다. 또한 1944년 소련 장군이었던 니콜라이 바투틴을 암살하는 등 우크라이나 내 파르티잔 반소투쟁의 거대한 축이었다.

나치 독일이 1944년들어 전쟁에서 점점 불리해지자 나치 독일 수뇌부는 반데라를 풀어 주면서 까지 전황을 바꿔 볼려고 했으나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쿠르스크 전투에서 소련이 승리하면서 이 전쟁에서 승기를 잡아가자 나치 독일 뿐만 아니라 이들의 운명도 비극적으로 전개됐다.

이윽고 1944년 겨울부터 1945년까지 소련군은 우크라이나 반소 게릴라의 본거지인 우크라이나 서부 카르파티아 산악 지역을 대대적으로 수색하며 저항군을 소탕해 나갔다. 1944년부터 1945년까지 소련군은 대략 91,615명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게릴라들을 사살했고, 비슷한 숫자인 96,466명을 체포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이후 일부 잔존 세력들은 우크라이나에 남아 소련군에 맞서 저항을 벌였다. 이러던 와중에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시작됐고, 이들은 또 다른 동맹세력을 찾게 되는데, 그게 바로 미국 CIA였다.

OUN의 지도자 스테판 반데라는 냉전 초기 미국과 손을 잡았고, 앞서 설명한 미콜라 레베드의 경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로마로 탈출해 서방 연합국과 접촉했으며, 미군 방첩대는 1947년 레베드와 손을 잡은 뒤 그를 뮌헨으로 빼돌렸다. 미국 CIA는 반데라를 포함하여 소련을 피해 도망친 우크라이나 극우 민족주의자들의 서유럽이나 미국 이주를 도왔다. 우크라이나 지역에 남아있던 일부 잔존세력들은 미국의 지원을 받아가며 1946년과 1947년에 여러 작전들을 개시했다. CIA의 문서에 따르면, 이들과 미국의 관계는 1946년부터 굳건했음을 알 수 있다. 벨라돈나 작전(Operation Belladonna 1946), 스라소니 작전(Operation Lynx, 1946), 그리고 삼지창 작전(Operation Trident, 1947) 등이 있다. 1948년 말 서독 뮌헨에 정착한 반데라와 미국 CIA는 일부 OUN 출신 대원들을 훈련시켜 반소작전을 위해 우크라이나로 침투시킬 계획을 세웠다. 이들의 계획은 1949년 9월 5일에 시작됐으며, 이런 공작은 이오시프 스탈린 사망 이후인 1954년까지 지속적으로 전개됐다. 이런 작전의 목적은 소련의 동유럽 지배력을 약화시키려는 차원의 목적이 강했으나, 소련은 침투자 대부분을 신속히 처리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CIA의 지원을 받은 우크라이나 독립 게릴라들과 소련군, 그리고 공산 폴란드와 교전이 일어났으나, 1950년대 초반까지는 소련, 폴란드가 대부분의 게릴라들을 소탕하였다. 이 전쟁도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수만명의 사상자를 낸 참혹한 전쟁이었다. 처음부터 화력에서 밀렸던데다가 스탈린 사후 우크라이나인으로 간주되었던 (실제로는 러시아인) 흐루쇼프가 소련 최고지도자가 되어 크림반도 할양, 스탈린 격하, 농민대우 향상, 주택건설 등 우크라이나에 우호적인 정책을 잇따라 펼치며 우크라이나내에서 독립운동에 대한 지지가 격감하였고, 그렇게 게릴라전은 종말을 고한다. 최후의 우크라이나 게릴라 지도자 바실 쿠크(Василь Кук, 1913–2007)는 소련군에 체포되었으나, 감옥에서 전향하여 소련의 우크라이나 지배를 인정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이 대가로 1960년 사면되어 감옥에서 나왔다. 쿠크는 장수하여 우크라이나 독립을 보고 키이우에서 사망한다.

한편 반데라는 나치 독일이 패망하자 소련을 피해 서독으로 이주, 우크라이나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1959년 뮌헨에서 KGB 요원인 보흐단 스타신스키(Богдан Сташинський)에 의해 암살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스타신스키는 1931년 르비우 인근에서 출생한 우크라이나인이었고, 부모들은 반데라주의자였다. 이후 그는 1961년 소련에서 서독으로 망명했으나 우크라이나 극우파의 테러와 암살 보복 때문에 1984년 아내와 함께 새 신분으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이주한 걸 끝으로 철저하게 숨어 살았다.

반델라 묘지는 독일 뮌헨 발트프리드호프에 있다. 러시아인들에 의한 반달리즘을 방지하기 위해 묘지 주위에 펜스를 쳐 놨으며 오늘날 스테판 반데라를 존경하는 수 많은 우크라이나인들이 그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그의 묘지를 방문하고 있다.

스테판 반데라를 추종하는 우크라이나인들은 나치와의 연관성을 부정하여 미화한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단이 학살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이는 너무 명확히 행해진 일이기 때문이다.
먼저 OUN-M은 우호국이자 후견 세력인 나치 독일의 승리가 전제된 후에야 우크라이나 독립이 가능하다고 보며, 독일과 소련 간의 생사를 건 전쟁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민족혁명의 즉각적인 실현을 추축국 진영의 전쟁 승리 이후로 유보하는 노선을 택했고, 따라서 OUN-M의 기본 정책은 독일의 전쟁 수행에 협조함으로써 영구혁명 단계를 더욱 심화시키고 궁극적으로는 민족혁명의 토대를 점진적으로 준비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노선에 따라 나치 독일과의 협력에 전력을 기울였던 OUN-M과는 달리, 보다 과격하고 급진적이며 신속한 혁명을 꿈꾸는 청년층으로 이뤄진 OUN-B의 선택은 달랐다. 나치 독일을 해방자로 보며 히틀러에게 일방적으로 구애했다는 점에서 OUN-B의 친독일 노선은 OUN-M과 동일했지만 구세대 파시스트들과 달리 OUN-B가 원하는 것은 즉각적이고 가시적인 성과였다. 나치 독일 당국과의 일체의 사전 논의 없이 우크라이나 독립 국가의 수립을 선포하고 이를 기정사실로서 독일 측에 통보하고자 했던 (이에 따라 독일 측의 당혹과 반발을 불러온) 1941년 6월 30일의 소위 “우크라이나 민족혁명”선포나, 나치 치하에서 부역한 소속 조직원들을 중심으로 나치 당국과의 협의 없이 OUN-B가 독자적으로 조직한 “우크라이나 봉기군(UPA)”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OUN-B는 독일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도 필요시에는 독일로부터 자주적인 독자 행보를 걷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집단이었다.

스테판 반데라는 나치 독일이 침공해오자 폴란드 감옥에서 풀려나서 나치 독일과 협력 하였으나, 스테판 반데라가 이끄는 우크라이나 독립 공화국이 나치독일에게 필요하다면서, 나치 독일과 상의 없이 독단적으로 우크라이나 독립 선언을 하였기에, 쿠데타 미수로 간주되어 1941년 7월 5일 체포되어 1941년 9월까지 가택연금되었다.

1941년 11월 25일자의 나치 문서에
"... 반데라는 궁극적인 목표로 독일 제국 의회에서 독립 우크라이나를 수립하려는 반란을 준비하고 있으며, 간부들을 즉시 체포하고 철저한 심문을 거쳐 청산해야 합니다..."
라는 글이 있다. 그리고 1941년 7월 5일 반데라는 체포되어 베를린으로 이송되었다. 7월 14일 구금에서 풀려났지만 베를린에 남아 있어야 했고, 1941년 9월 15일 반데라와 주요 OUN 회원들은 게슈타포에 의해 체포되어 1942년 1월 반데라는, 베를린에 살고 있는 그의 아내와 딸과 가까운 곳에 있는, 작센의 특별한 정치범을 위한 특별한 수용소에 수용되었다.

이렇게 반데라는 1942년 1월부터 1944년까지 정치범 수용소에 갇혀 있었다. 우크라이나에서 반데라가 폴란드 및 유대인 학살에 실질적으로 동조하지 않았다는 왜곡의 근거가 여기서 나온다. 그러나, 애초에 반데라가 나치독일에게 체포되기 이전에도 이미 아인자츠그루펜과 협력하여 대대적인 유대인 학살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반데라가 독일군에 협력하는 동안 우크라이나 국가정부는 반유대활동에 참여했다.

우크라이나 우파의 역사왜곡에 의하면, 반데라는 1944년 석방된 이후 바로 독일군과 맞서 싸우며, 이 당시 유대인을 보호했고, 유대인을 군대에 받아들였으며, 독일의 인종차별적 개념과 관행을 청산할 것을 촉구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반데라가 직접 남긴 유대인 학살을 선동하는 글들이 너무 많아서, 반데라가 유대인 학살을 선동하였다는 증거는 너무 명백하다. 실제로 반데라가 초기에 '그 목적이 무엇이었든 간에' 나치와 협력했고, 평소에도 반유대주의에 동조했으며 학살에 동참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반데라파가 UPA와 함께 폴란드 민족 학살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등 볼히니아 학살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Motyka 2008) 또한 최측근인 야로슬라우 스테츠코(Ярослав Стецько, 1912–1986)가 유대인 제거를 위한 민병대를 만들고 있다고 반데라에게 제출한 보고서가 발견되어 학살 책임에서 빠져나가기 힘들어졌다. 또한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반데라가 진짜로 지시하였든 아니든 간에, 전쟁 전부터 OUN과 나치 독일의 협력을 추구하고 나치 독일의 사상에 감화되어 학살을 자행하게 만든 책임이 매우 크며 전후 행적도 깔끔하지 못하다. 게다가 1944년 9월에 감금돼있던 OUN-B 지도부와 함께 반데라와 스테츠코가 풀려났는데[16] 반데라는 나치 독일과 다시 협상, 결국은 나치 독일과 다시 손을 잡는다. 그 결과 1945년 3월17일 우크라이나민족위원회가 설립되고, 이 위원회의 지휘를 받는 우크라이나 군대도 창설된다 하지만 이후 나치 독일이 패퇴하자 OUN들은 해외로 망명했다.

설령 반데라가 감옥에 있는 동안 유대인 학살을 아무것도 몰랐다고 가정한다고 하더라도,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단이 나치의 비상식적인 유대인 학살에 아무런 거리낌없이, 전혀 반항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부역한 것을 보면 애초에 나치랑 다를게 없으며, 반데라는 감옥에서 풀려나왔을때도,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OUN의 유대인 학살을 한번도 비난한 적이 없었으며, 범죄들을 인정하지도 않았다.

2009년 여론조사에 따르면, 반데라가 이끌던 OUN-B에 대해 긍정적이라고 응답한 우크라이나인은 14%인 반면 부정적이라고 응답한 우크라이나인은 45%로, 부정적으로 평가한 사람의 비율이 더 높았다. 서부 갈리치아(긍정 63% : 부정 12%) 지역에서는 OUN-B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비율이 높았으나, 도네츠크를 포함한 동부(긍정 2% : 부정 59%)나 오데사를 포함한 남부(긍정 2% : 부정 79%)의 경우, 압도적으로 부정적인 평가가 많았다. 키이우를 위시한 중부 지역은 동·남부 지방과 달리 역대 선거 결과 등을 보면 친서방 성향이 강한 편이었으나, OUN-B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인 편이었다(긍정 13% : 부정 38%). 

스테판 반데라는 폴란드 치하에서 OUN, UPA 같은 민족주의 단체를 조직해서 우크라이나의 독립운동을 이끌던 공로가 있지만 나치와 협력하여 폴란드인, 유대인 등을 상대로 제노사이드를 주도한 행적 때문에 당시 우크라이나 사회 전반의 여론은 나치 협력자 또는 극우 제노포비아에 찌든 학살자 정도 였다.

그러나 2014년에 유로마이단크림 사태, 돈바스 내전을 겪고 결정적으로 2022년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전면적으로 침공하면서 우크라이나 전역에 반러 감정이 급격하게 높아지면서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민족주의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반데라에 대한 호의적인 여론이 크게 치솟기 시작했는데 그리고 결국 2022년 4월 27일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스테판 반데라의 지지율이 74%나 되었다 # 여기서 주목할만 한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스테판 반데라에 대한 호의적인 여론이 이전에 비해 가장 크게 치솟았던 지역은 동부지역으로 돈바스 내전에서 피해를 입었고 또 러시아의 침공에서도 큰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그간 반데라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던 동부에서도 스테반 반데라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비율이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비율보다 매우 크게 높아졌으며, 그 때문에 하르키우, 드니프로에서도 스테판 반데라의 이름을 따온 도로가 잇따라 생기고 있는 중이다.#

이렇게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우크라이나인들의 스테판 반데라에 대한 호의적인 여론이 크게 치솟으면서 국민들의 스테판 반데라에 대한 지지를 발판으로 국회, 군대, 종교계 등 국가 전반에 반데라주의자들이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2014년 1월 키이우 유로마이단 시위본부에 내걸린 반데라 초상화


2022년 7월
안드리 멜니크 주독 우크라이나 대사는 반데라가 유대인과 폴란드인을 대량 학살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해당 인물은 과거 2015년에도 반데라는 우크라이나의 영웅 이라고 칭송했다. 과격한 언행으로 독일 정계와 갈등을 빚던 멜니크 대사는 이 발언 이후 젤렌스키 대통령에 의해 주독 대사에서 해임되었다.

2023년 1월 그를 기리는 행사가 우크라이나 곳곳에서 일어났고 급기야 발레리 잘루즈니 총사령관까지 그의 초상화 앞에서 찍은 셀카를 올려 그를 존경하고 있음을 보여줬는데, 직후 물심양면 도와주던 폴란드와 미온적으로 기울던 이스라엘이 반발하자 곧 삭제했고, 이런 사실은 기사화 되었다.

2023년 6월 우크라이나 정교회에서 대주교등이 참여해 우크라이나군 104여단의 이콘들을 봉헌하는 행사를 했는데 그중 여러 인물들이 모여있는 한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중 스테판 반데라가 있음에도 행사에 해당 그림이 사용되었다.

그래서 현재 우크라이나 내에서 스테판 반데라는 단순한 극우 과격 민족주의자가 아닌데 그 과정은 잔혹했었지만 오늘날의 우크라이나를 우크라이나 민족 국가로 만드는데 영향을 주었으며 소련의 압제에 맞선 OUN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단체)와 UPA (우크라이나 봉기군) 같은 단체의 창설자이자 지도자로 여겨지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스테판 반데라에 대한 우크라이나인들의 이러한 존경을 담은 노래인 '우리 아버지는 반데라, 우크라이나는 어머니'(Батько наш Бандера, Україна мати!)라는 곡이 있다.

하지만 반데라의 나치 협력 문제와 그와 그의 조직원들이 유대인(우크라이나 유대인 포함)과 폴란드인의 학살을 주도했다는 점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유대인들, 폴란드인들 입장에서는 나치 부역자의 상징이나 다름없다. 특히 폴란드인들 입장에서는 800년에 가까운 역사에 걸쳐 폴란드인들이 살고 있던 르부프와 갈리치아, 볼린 지방의 폴란드인들을 학살했던 만큼 오늘날까지도 우크라이나 정부에 지속적으로 사죄를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해 폴란드 의회는 2016년 7월 22일 볼린 학살을 제노사이드로 인정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래서 폴란드와 이스라엘, 체코, 슬로바키아 등에서는 러시아의 침공에 맞서 싸우는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면서도 우크라이나 내에서 반데라에 대한 재평가 여론이 크게 일고 있는것을 매우 고깝게 여기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지금 당장이야 러시아와 싸우는것이 시급하니 반데라를 찬양해도 묵인하는것이지만, 우크라이나가 종전이 된다면 외교적으로 골칫덩어리가 될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전쟁 영웅으로 우크라이나 내에서 절대적인 지지를 얻고있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도 주변국의 반발을 의식해서
"이의의 여지가 없는 영웅들이 있습니다. 스테판 반데라는 일부의 우크라이나인들에게는 영웅이고 이것은 정상적이고 멋진 일입니다. 그는 우크라이나의 자유를 수호한 사람 중 한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수많은 거리와 교량들에 똑같은 이름(반데라)을 붙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There are indisputable heroes. Stepan Bandera is a hero for a certain part of Ukrainians, and this is a normal and cool thing. He was one of those who defended the freedom of Ukraine. But I think that when we name so many streets, bridges by the same name, this is not quite right,"

"그나저나, 이것은 스테반 반데라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타라스 셰우첸코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하겠습니다. 나는 그분의 엄청난 업적을 매우 존경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현대의 영웅, 예술의 영웅, 문학의 영웅, 우크라이나의 모든 영웅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 거리의 이름을 오늘날 우크라이나를 하나로 묶는 영웅들의 이름으로 짓지 않습니까? 우크라이나를 통합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하게 하는 사회의 긴장이 있습니다. 한번은 안드리 셰우첸코의 이름을 딴 거리 이름이 없는 이유에 대해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는 나에게 영웅입니다. 저는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다."

"By the way, this is not about Stepan Bandera. I would say the same about Taras Shevchenko. I respect his tremendous work a lot. But we should remember modern day heroes, the heroes of art, the heroes of literature, all heroes of Ukraine. Why aren't we naming [streets] by their names – the heroes who unite Ukraine today? There is such a tension in society that we must do everything possible to unite Ukraine. I was once asked why wasn't any street named after Andriy Shevchenko [Ukrainian football star]? He is a hero for me, I really think so,"

스테판 반데라에 대해 이렇게 애둘러서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젤렌스키 조차도 전쟁 중에 우크라이나에서 반데라 붐이 일고있는것을 막지는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러시아의 프로파간다에 활용
러시아 당국은 오늘날 우크라이나에서 스테판 반데라를 추앙하고 의회 벽면에 스테판 반데라의 사진을 거는 것을 보고 우크라이나를 나치로 몰고 우크라이나의 탈나치화를 자신들의 우크라이나 침공 명분으로 내세웠는데 제2차세계대전 당시 스테판 반데라를 따르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이 나치와 협력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오늘날 스테판 반데라를 추종하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 마저 나치에 연루시키는 것은 좀 어불성설이다.


 대중매체
러시아 영화 브라뜨에서도 주인공 다닐라 바그로프의 형 빅토르가 우크라이나 갱단한테 시비를 털 때 반데라 개새끼 해봐라며 도발하는데 뭔 말을 해도 요지부동이었던 갱들이 바로 화를 낸다. 그만큼 주변 타 국가에서는 평판이 극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공격하는 주요 명분중 하나가 이 반데라주의자들의 나치즘이다. 심지어 젤렌스키 대통령조차 친러 노선을 배격한다는 이유로 네오 나치라고 주장할 정도.

2016년 개봉한 폴란드 영화 증오에도 반데라를 추종하는 반데라주의자들이 등장한다. 폴란드계 주민과 우크라이나계 주민의 뿌리깊은 갈등을 보여준다. 독일인폴란드인들이 우크라이나의 EU 가입에 반대했던 것도 반데라주의자들을 옹호하는 목소리가 아직 남아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같이 보기
아민 알후세이니, 찬드라 보스: 반데라와 비슷하게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나치 독일, 일본 제국과 손잡았기 때문에 극우 파시스트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특히 아민 알후세이니는 단순한 독립운동뿐만이 아니라, 반데라처럼 유대인 학살에도 가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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