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시선(centuries) 1권(券) 12편(篇) 사행시(四行詩)
[프랑스어]
Dans peu dira fauce brute fragile,
De bas en haut, efleué promptement,
Puis en intant desloayale & labile,
Qui de Veronne aura gouuernement.
[영어]
There will soon be talk of a treacherous man, who rules a short time,
quickly raised from low to high estate.
He will suddenly turn disloyal and volatile.
This man will govern Verona.
[한국어]
믿을 수 없는 자의 이야기가 곧 있으리니.
그는 짧은 시간 집권하고 빨리 재산을 축척하리라.
그는 갑자기 불충해질 것이고 변덕스러울 것이니
이 사람이 베로나를 통치하리라.(백시선 1권 12편)
노스트라다무스의 백시선은 인문학을 알아야 해석할 수 있는 공부다. 그래서 지나간 역사를 살펴보고 사건들을 찾아봐야만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우선 지명으로 이탈리아의 베로나를 먼저 살펴보고자 한다.
노스트라다무스는 한 인물을 지칭하는데
☞ 믿을 수 없는 자 → 믿을수 없는 기적을 만들어 낸 사람이다.
☞ 짧은 시간 집권 → 이집트 원정에서 몰래 귀국하여 쿠테타로 집권한다.
☞ 빨리 재산을 축척 → 엄청난 액수의 지원금이라 쓰고 삥뜯은 돈
☞ 갑자기 불충해질 것 → 쿠테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 변덕스러울 것
☞ 베로나를 통치한다. →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베로나를 점령한다.
그는 누구인가? 그는 나폴레옹이다.
▶ 베로나 Verona
이탈리아 베로나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배경으로 유명한 곳이다. 베로나는 매년 여름에 열리는 오페라 축제로도 유명하다.베네치아 서쪽, 레시니 산맥의 기슭에 있고 그 주위를 아디제 강이 반원을 그리며 흐른다. BC 89년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으며, 1405년 베네치아의 소유가 되어 1797년까지 지배를 받았다.
1797년에 나폴레옹은 캄포포르미오 조약에 따라 이곳을 오스트리아에 넘겨주었다. 4국동맹(러시아·프로이센·오스트리아·영국)의 마지막 회의가 1822년 이곳에서 열렸으며, 1866년에 이탈리아 왕국에 합병되었다.
▶캄포포르미오 조약 Treaty of Campo Formio
이탈리아 우디네 서남부의 베네치아 줄리아에 있는 마을 캄포포르미오(지금의 캄포포르미도)에서 조인되었다. 캄포포르미오 조약은 프랑스 정복지의 대부분을 인정하고 제1차 대(對)프랑스 동맹에 대한 나폴레옹의 승리를 완결지었다. 북부 이탈리아에서 치살피나 공화국과 리구리아 공화국이 프랑스의 영향 아래 창설되었으며 프랑스는 아드리아 해에 있는 베네치아령 이오니아 제도를 차지했다.
오스트리아가 롬바르디아의 영토를 잃은 데 대한 보상으로 나폴레옹은 이스트리아, 달마치아 그리고 베네치아 시를 포함하여 아디제 강 동쪽의 베네치아 영토를 양보했다. 이 일은 1,100년간 지속된 독립 베네치아의 종말을 의미했다. 오스트리아는 벨기에 영토를 프랑스에 양보하고 또한 제국 신분회의 비준에 따라 프랑스가 마인츠를 포함해 바젤에서 안더나흐에 이르기까지 라인 강 서안의 영토를 합병하는 데 동의했다. 그 대가로 프랑스는 오스트리아가 잘츠부르크와 바이에른 지방 일부를 획득할 수 있도록 영향력을 행사하기로 약속했다.
오스트리아의 옛 동맹국인 프로이센은 전혀 영토를 보상받지 못하도록 비밀협정이 이루어졌다. 원래의 대프랑스 동맹국 중에서 유일하게 영국만이 캄포포르미오 조약이 체결된 후에도 프랑스에 적대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프로이센은 1795년 1월 제3차 폴란드 분할에서 이득을 본 후 1795년 3월 평화협정을 맺었다.
▶ 나폴레옹 이탈리아 원정
1796년3월 ~1797년 10월( ☞ 짧은 시간 집권하는 계기가 된다. )에 걸쳐 이탈리아 반도 북부에서 벌어진 프랑스 제1공화국과 합스부르크 제국 간의 전쟁. 제1차 대프랑스 동맹 전쟁(프랑스 혁명 전쟁)의 일부로 나폴레옹 전쟁의 최초 국면이라 할 수 있다.
프랑스 혁명 4년차인 1793년 툴롱 공략의 승리로 명성을 얻은 나폴레옹은 다음해 24세의 나이로 준장으로 고속 승진해 이탈리아 방면 전선으로 배치되었다. 당시 프랑스 혁명 정부는 중부~동부 유럽 뿐만 아니라 북이탈리아를 지배하고 있던 합스부르크 제국과 전쟁 중이었기에 이탈리아 반도 북부의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고자 했지만 3년이 넘도록 성과가 없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프랑스 혁명 정부 내부 정치적 혼란 속에서 잠시 해임되기도 했으나 방데미에르 13일 사건 때 파리로 몰려든 왕당파를 강경 진압한 공을 세운 덕에 1796년 3월 이탈리아 방면 프랑스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될 수 있었다. 나폴레옹에게 주어진 병력은 4만 정도였지만, 이탈리아 방면군에 대한 보급이 무척이나 빈약해 사기가 많이 꺾여 있었다. 병사들 봉급이 많이 밀려있었고, 군복과 군화의 보급이 시원치 않아 장교들마저 누더기가 된 옷을 입고 있었고, 식료품마저 부족한 상황이었다. 당시 프랑스-오스트리아 전쟁의 주전장은 라인강 연안의 중부 유럽이었기에 이미 재정난에 허덕이던 프랑스 혁명 정부는 이탈리아 방면의 군대까지 신경쓸 여력이 없었다.
나폴레옹은 원정에 앞서 "정부는 제군에게 아무 것도 주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제군을 가장 비옥한 평원으로 데리고 간다. 제군은 거기서 부와 명예를 얻을 것이다"라는 연설해 사기를 단번에 끌어올렸다. 또한 자신의 연줄을 총동원하여 밀린 봉급 일부를 지급하고 군복도 최대한 마련했다.
제1차 이탈리아 원정에서 나폴레옹이 알프스를 넘지는 않았지만 산맥 남쪽에 해당하는 이탈리아 북부 내륙 지대를 통과해 오스트리아 본토로 향했다. 오히려 프랑스군이 해안 도로를 따라 진격할 수도 있다는 것은 당시 오스트리아군의 착각이었다. 지중해를 자기 앞마당처럼 드나들며 반프랑스 세력을 지원하던 영국 해군은 프랑스 혁명 정부의 큰 골칫덩이였기에, 프랑스군이 해안가를 따라 진격하고 항구들을 점령해 영국 해군을 이탈리아 방면에서 몰아낸다는 것은 상당히 가능성이 높은 시나리오였다. 그래서 오스트리아군이 프랑스군을 막기 위해 해안가로 내려와 있다가 나폴레옹에게 뒷통수를 얻어맞았다.
프랑스군이 해안가를 따라 이탈리아 반도를 침공하는 것을 염려하던 오스트리아군은 1796년 3월 먼저 지중해 연안에 전진 배치되어 있던 프랑스군 전초부대를 공격해 격파했다. 그런데 이를 보고 오스트리아군이 지중해 연안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나폴레옹은 전군을 즉시 북진시켜 사르데냐 왕국과 오스트리아령 이탈리아의 핵심지 밀라노 공국을 연결하는 산악지대를 점령해 두 나라의 연결을 끊어버린 후 사르데냐 왕국 수도 토리노로 진격했다. 나폴레옹의 계획은 허를 찔린 오스트리아가 사르데냐 왕국을 돕기 위해 더 북쪽으로 멀리 돌아오는 사이사보이아, 피에몬테를 빠르게 점령한 후 즉시 군대를 돌려 오스트리아군을 상대해 각개격파하는 것이었다.
상술하였듯이 보급 상황이 불량했던 프랑스군이 민가를 약탈하느라 정신이 팔려있는 사이 피에몬테군이 반격해 프랑스군을 격퇴하는 일이 몇차례 반복되긴 했지만, 워냑 피에몬테군이 약체였던데다가 나폴레옹의 저돌적 진격에 허를 찔린 피에몬테군이 빠르게 무너졌고 프랑스군은 오스트리아의 구원군이 도착하기 전 항복한 비토리오 아메데오 3세는 사보이아와 니차를 할양하는 케라스코 평화조약을 맺고 이탈했다. 사르데냐 왕국이 한달도 못 버티고 항복하자 오스트리아군은 이탈리아 반도 북부 본진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는데,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군이 재배치 되기 전 즉시 전군을 최단거리로 이탈리아 북부에 투입했다.
프랑스군이 오스트리아의 예상보다 빠르게 이탈리아 반도 북부 내륙 지역의 여러 거점을 점령하자 오스트리아는 북쪽으로 후퇴 가능한 병력은 티롤로 움직이고, 남은 1만5천 가량은 2달치 이상의 식량을 비롯한 물자와 함께 이탈리아 북부의 최대 거점인 요새도시 만토바로 이동시켰다. 합스부르크 제국령 밀라노 공국의 정중앙에 위치한 만토바는 그 지정학적 위치만으로도 전략적 중요성이 엄청났고 주변 지형도 공격은 어렵지만 방어는 쉬운 도시였다. 굽이치는 강을 끼고 도시가 위치하여 삼면이 강으로 보호받고 주변은 늪지대라 공격군이 막사를 설치하기가 힘들었다. 뿐만 아니라 도시 외곽은 요새화 되어 있었고 방어용 대포가 충실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오스트리아군이 허둥대며 물러나자 나폴레옹이 이끄는 원정대는 1796년 5월 밀라노를 손쉽게 점령하고 만토바를 포위했다. 프랑스군이 보유한 요새 공격용 중포의 수가 부족하여 만토바 공성은 지지부진 했으나, 남은 프랑스군은 이탈리아 북부 상당 부분을 점령했다. 또한 이때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 그나마 강력한 이탈리아 남부의 나폴리 왕국이 프랑스 혁명 정부와 화친을 맺자 경제력만 뛰어나지 군사력은 빈약했던 파르마 공국, 모데나 공국, 베네치아 공화국, 제노바 공화국 등 군소국가들은 프랑스의 위협에 무방비로 노출되었고, 나폴레옹은 이들 국가를 돌며 '엄청난 액수의 지원금이라 쓰고 삥뜯은 돈'( ☞ 빨리 재산을 축척 )을 수금했다. 나폴레옹은 이 돈을 프랑스로 보내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리던 혁명 정부의 신임을 샀다.
한편 북쪽의 티롤로 후퇴했던 오스트리아 본군은 증원군을 보충받아 4차례나 만토바 구원에 나서 프랑스군과 여러 차례의 전투를 치렀다(아르콜 다리 전투, 리볼리 전투 등). 당시 나폴레옹군은 상당히 불리한 처지에 있었는데, 만토바를 포위할 뿐만 아니라 적대적인 지역에서 넓은 영토를 지배하는 동시에 프랑스 본국과 연결되는 교통망을 유지하느라 넓게 흩어져 배치되었고, 오스트리아의 만토바 구원군은 항상 나폴레옹군 전체보다 많았다. 또한 프랑스 본국은 전력을 쥐어짜서 독일 방면의 전선에 집중해 나폴레옹에게 아무런 지원을 못해 매번 절박한 전투를 치러야 했다.
이 당시 전투들 중에 전투의 승패와 관계없이 이후 나폴레옹의 유명세에 큰 영향을 끼친 전투가 있는데 바로 아르콜 다리 전투이다. 거세게 압박하며 진격해오던 오스트리아군이 프랑스의 이탈리아 북부 지배 거점이었던 베로나 근처까지 밀고 들어오자, 나폴레옹은 수중의 병력 거의 전부를 이끌고 오스트리아군을 우회해 마치 삼국지의 조조가 관도대전에서 오소를 습격했던 것처럼 적의 후방 보급 기지를 급습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아르콜(Arcole)이란 지역 통과 중 2,000여 명의 오스트리아군이 지키는 다리를 지나해야 했고, 프랑스군은 이미 방열되어 있던 대포의 포격 지원을 받으며 다리를 사수하던 오스트리아군을 쉽게 돌파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나폴레옹이 삼색기를 들고 최일선에서 병사들을 독려해 다리를 돌파했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이는 이후 나폴레옹이 정권을 장악한 이후 추가한 영웅담으로 실제로는 강둑에서 병사들을 지휘하다 오스트리아군의 총격으로 죽을 뻔했다. 이때 부상투혼을 발휘한 장 란이 위기에 처한 나폴레옹을 구원했다. 이후 나폴레옹에게 천만다행으로 오스트리아군이 그대로 베로나로 전진하여 프랑스군의 본진을 털고 돌아들어와서 아르콜에 고립된 나폴레옹을 포위하는 대신에, 베로나로 향하던 병력을 돌려 아르콜로 증원하여 여기서 프랑스군과 이후 3일 동안 투닥투닥 하다가 후퇴해 전투가 종료되었다.
나폴레옹은 불리한 와중에도 매번 ‘줄건 줘’를 시전하며 전력을 집중시켜 오스트리아군 취약점을 들이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퇴했고, 오스트리아의 마지막 구원군을 1797년 2월 리볼리 전투에서 완파했다. 만토바에서 농성하던 오스트리아군도 식량이 떨어지는 와중에 리볼리 전투의 결과를 전해듣고는 더 이상의 저항을 멈추고 항복함으로써 이탈리아 반도 북부는 온전히 프랑스군 손에 떨어졌다.
프랑스 혁명 정부도 그동안 공을 들이던 독일 전역에서 프랑스군이 오스트리아군에 패배해 라인강 서안으로 밀리자, 독일 전역에 대한 희망을 접고 그동안 눈부신 전공을 세운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방면군에 증원군을 보내줬다.
나폴레옹은 지원군이 도착하자마자 즉시 오스트리아 본국으로 진격을 시작해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 160km 거리까지 접근했다. 그러나 나폴레옹군을 요격하기 위해 독일 전역으로부터 천천히 남하하는 오스트리아군의 위치를 특정할 수 없었던 나폴레옹은 진격로의 측면과 후방을 보호하기 위해 많은 병력을 할애해야만 했고, 결국 빈을 눈앞에 두고 공세종말점에 도달하고 말았다. 사실 이 상황은 나폴레옹이 자초한 바도 큰데, 원래는 라인강 서안의 독일 방면 프랑스군과 합을 맞추어 오스트리아 서쪽과 남쪽에서 양면 공격을 하기로 했으나, 오스트리아가 대비할 시간을 주면 안된다는 이유로 독일 전역의 프랑스군의 재편을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움직였던 것이다.
한편 오스트리아도 사정이 안 좋아 프로이센 왕국도 폴란드 분할 문제로 1795년 제1차 대 프랑스 전쟁에서 조기 이탈했고, 사르데냐 왕국도 사보이아와 니차를 할양하고 본토인 피에몬테가 황폐화되어 마비되고 나폴레옹군이 남쪽에서 치고 올라오는 바람에 빈의 안전도 장담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파국을 맞고 싶지 않았던 나폴레옹과 오스트리아 양쪽 모두 평화 조약을 맺는 것을 원하게 되었다. 오스트리아는 4월 18일 레오벤에서 정전을 제의하여 레오벤 강화가 체결되었고 1797년 10월 17일 프랑스와 캄포포르미오 조약을 체결하여 전쟁이 마무리 되었고 오스트리아의 이탈과 함께 제1차 대 프랑스 동맹은 와해되었다.
한편 강화 논의를 할 동안 프랑스군은 베네치아 공화국을 공격하였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마지막 도제인 루도비코 마닌은 의회에서 항복을 결정하고 5월 12일 의회에서는 사실상의 항복 비준인 권한 이양 안건을 통과시켰다. 1797년 10월 18일, 파사리아노에 있는 저택에서 항복 서명을 하며 베네치아 공화국(베로나 포함)은 멸망했다. ☞ 베로나를 통치한다.
이탈리아 전쟁의 결과로 프랑스는 사르데냐 왕국으로부터 사보이아 지역과 니차를, 옛 베네치아 공화국 영토 중 이오니아 제도를, 합스부르크 제국으로부터 라인강 서안 대부분과 오늘날의 벨기에와 룩셈부르크에 해당하는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차지했으며 롬바르디아를 포함한 이탈리아 반도 북부에 프랑스 제1공화국과 같은 공화제를 도입한 치살피나 공화국(Repubblica Cisalpina)을 수립했다. 오스트리아는 밀라노 공국을 포기하는 대신 옛 베네치아 공화국 영토를 획득했다. 이렇게 한때 동지중해를 내해로 만들 정도의 해양 강국이었던 베네치아는 멸망 후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에게 분할되었다.
당시 베네치아는 전성기 때의 국력을 모두 상실해서, 멸망 당시 베네치아 해군의 전력은 갤리선 십여척이 전부여서 쓸 만한 게 없었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조선소에서 만들고 있던 프리깃 2척만 강탈해 갔다. 그래도 나폴레옹은 베네치아의 S자 운하와 산마르코 광장을 보고 감탄사를 연발했다고 한다. 이 때 강탈한 프리깃 2척은 이후 이집트 원정에서 나폴레옹이 프랑스로 탈출할 때 타고 온 선박이다. 또한 나폴레옹은 이 전쟁의 승리로 국민적인 영웅으로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1796년 나폴레옹은이탈리아 원정 온 후 1797년 베네치아 공화국 멸망시킨 후 베네치아를 관통하는 거대한 Z자(혹은 S자) 형태의 대운하를 보고 경탄하여 극찬을 했지만 베네치아를 합스부르크 제국에 넘겨주었다가, 1805년 오스트리아 제국이 프랑스 제1제국에 반환하고 나폴레옹이 세운 괴뢰국인 이탈리아 왕국의 영토가 되었다. 그리고 1814년에 나폴레옹이 몰락하면서 다시 오스트리아 영토가 되었다.
▷ 1796년 ~1797년 이탈리아 원정 ☞ 이 사람이 베로나를 통치하리라.(백시선 1권 12편)
▷ 1797년 ~ 1805년 오스트리아 제국(합스부르크 제국)
▷ 1805년 ~ 1814년 이탈리아 왕국(나폴레옹) ☞ 이 사람이 베로나를 통치하리라.(백시선 1권 12편)
나폴레옹은 캄포포르미오 조약으로 오스트리아에 넘겨주었지만 결국 다시 1805년 이탈리아 왕국으로 소속되었다. 이는 나폴레옹의 왕국이다. 그러나 러시아원정에서 패배하고 결국에는 1814년 실각하면서 다시 오스트리아로 소속되게 된다.
이를 노스트라다무스는 정확히 보고 베로나 예언시를 통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 1804년 5월 18일 - 프랑스 상원의 나폴레옹 황제 추대, 헌법 채택
▷ 1804년 12월 2일 -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식
▷ 1806년 11월 21일 - 대륙 봉쇄령 발표
▷ 1807년 7월 7일 - 틸지트 조약 체결
▷ 1812년 6월 24일 - 러시아 원정
▷ 1814년 4월 11일 - 퐁텐블로 조약으로 1차 멸망
▷ 1815년 3월 19일 - 백일천하
▷ 1815년 6월 22일 - 나폴레옹의 퇴위 선언으로 최종멸망
오스트리아는 베네치아와 옛 밀라노 공국 영토였던 롬바르디아를 묶어서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으로 만들고 합스부르크 왕조 황제가 국왕으로 즉위하되 총독을 보내는 간접적인 방식으로 지배하였다. 1848년,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의 실각을 계기로 혁명이 일어나 이탈리아인 정치가 루도비코 마닌 을 대통령으로 하는 '베네토 공화국'이 세워졌지만 1년 만에 오스트리아의 공격을 받고 다시 항복하여 도로 오스트리아 영토가 되었다.
이탈리아 통일 운동이 벌어지면서 롬바르디아는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영토로 합병되었고, 1861년 이탈리아 왕국이 선언되었지만 베네토 지역과 베네치아는 여전히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았다. 신생 이탈리아 왕국은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이 벌어지자 프로이센 왕국과 손잡고 오스트리아를 공격했고, 전쟁의 결과 베네토까지 합병해 이탈리아 반도 통일을 얼추 완수했다.
노스트라다무스는 베로나의 이야기를 통하여 역사적인 인물에 대해서 미리 예언해 두었다. 그의 예언대로 그는 전쟁에서 승리를 기반으로 황제의 반열까지 오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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