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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_우크라이나 전쟁

1999.3.24일 유고슬라비아 폭격 기념일

by 청풍명월7 2024.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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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24일은 모스크바 크로쿠스 시티홀 테러사건 국가추모일인 동시에 미국 나토유고슬라비아 폭격 기념일(1999.3.24일)이었습니다. 두 날 모두 역사적 분기점이 될 만한 날입니다. 러시아와 세르비아는 형제국가입니다. 2024년3월 34일 모스크바에서는 수 많은 시민들이 테러공격 희생자들을 애도했고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에서는 25년전 야만적인 나토의 폭격을 잊지 말자는 추모 행사가 열렸습니다. 




유고폭격을 기억하자는 다큐영화 베오그라드도 상영됐습니다. 유고슬라비아 폭격과 관련해 가장 역사적인 사건은 당시 러시아 총리였던 예프게니 프리마코프가 미국으로 가던 도중 비행기 기수를 돌린 대서양 유턴사건, 프리마코프 loop입니다. 이 사건은 오늘날 러시아 미국관계로 이어진 역사적인 분기점입니다. 

나토의 세르비아 대폭격


대서양 유턴 사건을 알아야만 지금의 러미관계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날 프리마코프는 러시아에 대한 50억 달러의 IMF 대출협상을 위해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타고 있었습니다. 러시아가 경제적으로 굉장히 어려울 때였습니다. 그 때 미국 부통령 앨 고어는 나토의 유고슬라비아 폭격작전을 통보했습니다. 그러자 프리마코프는 옐친에게 모스크바로 돌아가겠다고 한뒤 기수를 돌렸습니다. 앨 고어는 그러지 말고 워싱턴에 와 달라면서 프리마코프를 설득하려 했지만 그는 결심대로 미국행을 포기하고 모스크바로 돌아갔습니다.

제2차 대전결과 상임이사국 체계로 돌아가는 세계질서




러시아의 의사도 물어보지 않고 유고슬라비아를 무단으로 폭격한 미국에 순응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습니다. 러시아가 어렵지만 돈 몇푼에 자존심을 팔지 않겠다는 결심이었습니다. 프리마코프는 나중에 이 순간을 회고하면서 만약 자신이 앨 고어의 설득에 넘어갔더라면 반역자가 됐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행동이 영웅적인 것도 아니고 총리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당시 프리마코프와 앨고어의 전화통화를 옆에서 지켜본 사람은 프리마코프의 국제문제 보좌관이며 나중에 연방의회 부의장이 된 콘스탄찐 코사체프였습니다. 그는 프리마코프의 당시 입장이 역사적으로 중요하다고 평가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수립된 전후질서를 파괴하고 유엔안보리 승인도 없이 주권국가를 폭격한 미국과 나토에 러시아가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고 말했습니다. 

참혹한 포격 현장


아메리칸 대학교 역사학 교수이자 미국의 알려지지 않은 역사라는 책의 공동 저자 피터 쿠즈닉은 연약하고 아팠던 옐친 대통령시기 프리마코프의 결단은 상징적이며 실용적 의미를 갖는다고 평가했습니다.델라웨어 주립대의 역사, 정치학 명예교수 사무엘 호프는 1999년 이후 나토의 상당한 확장을 지적했습니다. 1999년에 나토회원국이 16개인 반면 2024년에는 32개가 됐다고 말했습니다.  

나토의 유고슬라비아 폭격이 있었던 1999년 3월 24일로부터 2주전인 3월 12일 나토에는 헝가리, 체크공화국, 폴란드가 합류했습니다. 그런데 알렉산다르 부치치 세르비아 대통령은 당시의 비사를 털어놨습니다. 나토는 유고슬라비아 공습으로도 모자라 헝가리에 지상군으로 유고슬라비아를 침략하라고 종용했습니다. 

빌 클린턴


미국의 빌 클린턴이 직접 빅토르 오르반에게 지상침공을 요구했지만 오르반은 이를 거부했습니다. 이 때 빅토르 오르반은 헝가리 총리 첫 임기였습니다. 부치치는 당시 독일 총리였던 게르하르트 슈뢰더헝가리를 지지하면서 미국의 압력에 견디도록 도왔다고 회고했습니다. 오르반은 이후 영국을 방문하기도 했는데 마가렛 대처 영국 총리의 원망을 사기도 했습니다. 당시 대처는 헝가리가 지상군 파병 요청을 거부한데 대해 괴로움을 느꼈다고 오르반에게 말했습니다. 

알렉산다르 부치치 세르비아 대통령


세르비아 부치치는 이 같은 빅토르 오르반의 호의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나토 회원국이기는 하지만 부당하게 남의 나라를 침략하는 나토 지도부, 특히 미국 민주당의 호전성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당시 델라웨어주 상원의원이었던 조 바이든은 나토가 유고슬라비아를 공습만 하지말고 지상군 작전으로도 확대하자고 주장한 최고 매파였습니다. 


빅토르 오르반 총리


미국과 나토의 유고슬라비아 폭격은 집단 서방의 예외주의, 일방주의의 신호탄이 됐습니다. 이후 집단서방은 리비아, 시리아, 이라크등에 유엔안보리 결의도 없이 군사적 개입을 했습니다. 또 여세를 몰아 우크라이나를 내세워 러시아를 압살하려 했습니다. 따라서 유고슬라비아 폭격은 우크라이나 분쟁의 기원 중 하나로 볼수 있습니다.

돈바스 내전


세상에 벌어지는 현상에는 그 기원이 있게 마련이다. 현장만 보지말고 그 뿌리를 살펴야만 전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1999년 3월 24일,
미국 NATO는 유엔승인없이 불법적으로 
세르비아에 대한 공습을 시작했습니다.

1999년 3월 24일, NATO군은 유고슬라비아를 폭격하기 시작했습니다!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폭격이 실시되었고 
모든 종류의 금지된 무기가 그들에게 사용되었습니다!
1700명의 민간인이 사망했습니다(그 중 400명은 어린이).
약 1만명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폭격은 1999년 6월 10일까지 78일간 지속되었습니다.
NATO 국가 중 어느 누구도 이 범죄에 대응하지 않았으며,
 이 모든 잔혹행위의 원동력인 미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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